소설리스트

44화 (44/200)

신지혜는 비서와 함께 호텔 로비로 내려왔다.

그런데 부딪치고 싶지 않은 인간을 만나고 말았다.

노랑머리에 흰 피부를 가진 남자가 멀리서 서서히 다가왔다.

몸에는 온통 명품으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이게 누구야.”

“아씨 그냥 모르는 사람인 척 지나가!”

“그럴 수야 있어. 막냇동생이 지나가는데 어떻게 모른 척을 해. 비서랑 있는 거 보니까 아버지한테 가나 보지.”

“…….”

신지혜의 얼굴이 한순간에 굳어버렸다.

가뜩이나 울화가 치밀었는데 불난 집에 기름을 때려 붓는 격이었다.

“아버지한테 가서 계열사라도 받을 생각이야? 네 엄마처럼 되기 싫으면 조용히 입 다물고 쥐죽은 듯이 살아. 그래야 계열사는 아니라도 재산 일부는 받을 거 아니야. 그 정도는 눈감아 줄게.”

“그 더러운 돈, 회사 따위 받기 싫으니까 꺼져! 미친년한테 물리기 싫으면.”

“역시 매력적이야. 더러운 피를 가진 년의 딸이라 아주 매력이 있어. 그럼 난 간다. 다음에 또 보자 sister.”

“……개자식!”

신지혜는 더러운 기분으로 호텔을 빠져나와 벤틀리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잠시 밖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센트럴파크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

* * *

“다녀왔습니다.”

신지혜가 10인치는 되어 보이는 캐리어를 가지고 아리raM 공방으로 들어왔다.

“왜 오셨어요. 집에서 쉬시라니까. 시차 적응도 해야죠.”

“뭐 이 정도야 끄떡없어요. 다들 얼굴 보고 싶어서 공항에서 바로 왔어요.”

신지혜와 내가 대화를 이어가자.

다니엘과 류미리가 신지혜를 반기며 인사를 건넸다.

아버지도 작업을 잠시 멈추고 우리를 바라보고 계셨다.

“신 디렉터. 너무 보고 싶었잖아. 잔소리를 안 들으니까. 심심하더라니까.”

“다니엘 씨가 가장 반겨주네요. 그런 의미로 가장 큰 선물은 다니엘 씨.”

“오 역시 선물 사 올 줄 알았지.”

“그래서 그런 거면 다시 주세요.”

“NO, NO NEVER. 절대 선물 때문에 그런 거 아님.”

다니엘은 선물을 받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업대로 가 선물을 뜯어 봤다.

“이건 사장님 거 그리고 이건 사장님 아버님 거 그리고 미리 씨 거.”

“와 제 것도 있어요. 감사해요.”

“얼굴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샤네르 화장품이에요.”

“헉. 이 비싼 걸. 감사해요.”

‘그렇다면 내 건?’

선물이 생각보다 묵직한데 작다.

‘시계?’

나도 모르게 기대감이 생겼다.

그 순간.

“신 디렉터 선물이 바뀐 거 같아. 이거 사장 놈 거 아니야?”

“다니엘 거 맞는데요?”

“자유의 여신상 조각! 나 미국 사람이야.”

“마땅히 살 게 없었어요. 그냥 받아요.”

다니엘은 자유의 여신상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며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다니엘이 자유의 여신상이면 나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굿즈 수준인가.’

나는 신지혜가 사무실 직원에게 기념품을 주러 가는 순간.

선물 포장지를 뜯기 시작했다.

“제발!”

“넌 뭔데?”

다니엘이 너무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내 옆에 딱 달라붙었다.

내가 선물상자의 뚜껑을 개봉하는 순간.

“하하하! 나보다 더 작은 자유의 여신상이네.”

선물을 보더니 다니엘이 큭큭거린다.

“초콜릿?!”

내가 멍하니 신지혜를 바라보니.

“두 분 똑같은 거 사기 그래서 사장님은 초콜릿으로 만든 자유의 여신상 샀어요.”

“아….”

그때 흐뭇한 미소로 우리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팔목에 무언가를 걸고 계셨다.

그리고 슬며시 나에게 팔을 내밀며 질문을 하신다.

“이거 비싼 거냐?”

“에두아르 호이어?!”

“이름이 뭐 그래.”

“명품이에요.”

나는 고개를 돌려 신지혜를 바라보았다.

“오 아버님 멋져요. 제가 잘 골랐네요.”

“뭘 이런 걸 주고 그래. 비쌀 텐데.”

“저 돈 많아요. 좋아하시니 저도 좋네요.”

나는 신지혜의 따뜻한 마음에 감격했다.

“고맙습니다.”

“뭘요?”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아버지한테 잘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별말씀을요. 좋은 분이시잖아요. 그리고 이건 어머니 것.”

나는 무언가 따뜻한 감정과 함께 신지혜의 씁쓸한 표정을 순간 포착했다.

‘뭐지? 잘못 본 거겠지.’

“그러고 보니 오늘 아니에요?”

“네 오늘 2차전 결과 나오는 날이에요.”

“그럼 오늘도 치맥 파티해야죠.”

“해야죠. 당연히.”

“그럼 제가 같이 볼 사람들 모을게요.”

“네 그러세요. 그리고 장하나 씨한테도 연락해주세요.”

“네.”

드디어 2차전 결과가 방영될 시간이다.

경연대회 [의상] 7.

* * *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방송을 시청 중이다.

그런데 분위기가 썩 좋지 않다.

‘어찌 된 일이야. 왜 점수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고 압도적으로 제너락과 이안섭 하우스가 1등, 2등을 나란히 차지했다.

그리고 아리raM은 간신히 3등의 자리에 올랐다.

정말 간신히.

4등과의 표차가 2표 차였다.

자칫 잘못했으면 마지막 컬렉션에 참여조차 할 수 없을 뻔했다.

다행히 오프라인 시민투표 점수 덕분에 살아남았다.

오프라인 투표라서 그런지 참여율도 높지 않았다.

“말도 안 돼!”

“…….”

류미리가 크게 실망하며 공방을 빠져나갔다.

‘어휴.’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는 듯하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조용히 자리를 피해주셨고 같이 방송을 시청하던 직원들도 일제히 공방을 빠져나갔다.

신지혜는 점수를 보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심사위원들 미친 거 아니야! 이렇게 편파적으로 점수를 준다고?”

“뭐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거니까요. 아쉽기는 하네요.”

“화도 안 나세요. 분명 음모예요. 제너락이랑 이안섭 하우스 둘 다 YK어패럴 소속에다가 가장 많이 투자받은 브랜드들이에요.”

나도 의심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증거라고 해봐야 YK어패럴이 투자한 브랜드들의 목록이 다였다.

아주 작은 증거와 정황일 뿐이다.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최종 컬렉션을 준비해야 했다.

.

.

.

[제보 박스].

시청자로 제보로 이루어지는 아침프로그램의 하나다.

“이재인 리포터. 오늘은 어디인가요?”

“한 시청자의 제보로 오늘은 한국의 오트 쿠튀르 경연대회가 한창 진행 중인 DDP에 나와 있습니다.”

“무슨 제보죠. 설마 아름다운 모델분들은 제보한 건가요?”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제보입니다.”

“오늘의 제보 박스 기대해야겠는데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모두 함께 외쳐보죠. 열려라. 열려라. 제보 박스!”

리포터의 외침과 함께 화면이 바뀌며 아리raM의 디스플레이 전시관이 나타났다.

“오오. 현재 화젯거리라는 디자이너 경연대회인가 보군요.”

“네 맞습니다.”

“그럼 화려한 의상이 제보 대상인가요?”

“땡! 문석희 아나운서님 오늘 정답을 너무 피해가시는데요.”

“하하하. 어서 알려주시죠. 궁금해서 안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바로바로 이겁니다. 오늘의 제보 박스.”

화면에 박스 모양의 CG가 나타나며 펑 하고 터졌다.

그 순간.

아리raM 디스플레이 전체가 나타났다.

“명품의상이네요. 제가 맞춘 거 아닙니까?”

“땡입니다.”

“진짜 궁금하네요. 도저히 못 기다리겠어요. 바로 보시죠.”

“그럼 제가 좋아하는 문석희 아나운서님을 위해 제보 박스의 제보를 파헤쳐라를 시작하겠습니다.”

* * *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공방 앞에 모르는 사람이 공방 안을 유심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천천히 공방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 한 여성이 나를 알아본 것인지 천천히 다가왔다.

“차진혁 대표님?”

“네, 그런데요. 무슨 일로?”

“혹시 제보 박스라고 아세요?”

“아니요. 제가 텔레비전을 잘 안 보는 편이라.”

“아…. KTB PD 안혜진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명함 한 장을 내밀며 자신의 신원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이거 한번 보시겠어요.”

인스타의 사진.

“저희 디스플레이관이네요.”

“네, 보셔야 할 건 뒤의 가구예요.”

“이게 왜?”

“혹시 실주인이신가요?”

“아니에요. 주인분은 따로 계십니다.”

“혹시 연락처 좀 주실 수 있을까요?”

“동의 없이 드리기가 좀 그런데요.”

그런데 그때 멀리서 할아버지가 천천히 공방 쪽으로 걸어오셨다.

여전히 폐지를 가득 싫은 손수레를 끌면서.

“공방 총각 아침 일찍부터 출근했네.”

인자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셨다.

“할아버지도 일찍 나오셨네요.”

“나야 뭐. 집에 있으면 뭐해. 운동 삼아 돌아보는 거지.”

“근데 할아버지. 이분이 할아버지를 찾아오셨는데.”

나는 할아버지에게 상세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옆에 있던 PD가 공손하게 다가와 말을 이었다.

“설마 이분이세요?”

“네. 이분이 본주인이십니다.”

눈치가 빠른 방송국 PD는 나를 뒤로하고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KTB PD 안혜진이라고 합니다.”

“네, 근데 무슨 일로?”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는 가구 촬영 좀 하고 싶은데요. 실례가 안 된다면 동의 좀 해주십사하고 찾아왔습니다.”

“흠…….”

할아버지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밝은 광채가 좋은 징조를 미리 알게 해주었기에.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인가 뭔가 나는 잘 모르겠고. 조건이 있어.”

“네 말씀하세요. 제 권한 안에서는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이 총각 있잖아.”

“네.”

“이 총각이 시키는 대로 하면 대. 나 같은 늙은이가 뭘 아나. 젊은 사람이 하는 대로 하는 게 나을 거 같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어리둥절하며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그 순간 나에게 눈을 찡긋하시고 다시 손수레를 끌며 늘 향하던 방향으로 사라지셨다.

“차진혁 대표님?”

“네. 일단 어떻게 된 건지부터 들어보죠.”

나와 그녀는 공방 사무실로 들어가 대화를 이어갔다.

“아…. 디스플레이 관을 들르신 분들이 사진을 올렸고 그걸 고가구 감정사가 본 거군요.”

“네. 유명한 감정사분이에요. 예전에 TV프로에도 여러 번 나오셨던 분이라. 바로 국장님한테로 연락했나 봐요. 꼭 자기가 감정해야 한다고.”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대단한 문화재인 건 분명한 듯했다.

“저도 조건이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