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신데요?”
“그게 대회 주최 측에서 공문이 왔는데 2차전 디스플레이관을 설치하라고 하네요. 실내장식이랑 소품도 저희가 다 준비해야 하고요.”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지혜가 한참 동안 말이 없다.
그렇게 침묵이 흐른 후.
신지혜가 말을 이었다.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예요. 대회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무슨 디스플레이관?”
“저도 당황스럽긴 한데.”
“콘셉트 짜는 데만 빨라도 일주일은 소요되는데. 디스플레이 관을 일주일 안에 꾸미라니…….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리는데 그리고 소품 구하는 것도 일이에요.”
“저도 알죠. 그래서 급한 마음에 연락드린 겁니다.”
“하. 무슨 일이래. 잠시만요 사장님 2시간만 시간 주세요. 그리고 의상 최종 시안 사진 찍어서 메일로 보내주세요.”
“네 부탁드려요.”
잠까지 깨워가며 일을 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 많은 게 걸려있기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내 옆에서 내 말을 듣고 있던 류미리도 나를 빤히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걱정 마요. 잘될 테니까.”
내 한마디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 안 해요. 사장님 믿어요.”
믿음이라.
그녀의 믿음에 꼭 보답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디자인 시안을 들고 작업실로 이동했다.
.
.
.
2시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 줄 몰랐다.
잡다한 일을 하고 가죽 작업실에 가서 지방에 내려갈 가방 자재를 모두 재단하고도 아직 30분이 남았다.
그런데 그때.
인터넷 전화로 신지혜가 전화를 걸어왔다.
“30분 빨리 전화하셨네요.”
“안 바빠요. 바로 받으시네요.”
“디자인도 마무리했고 가방 제작도 현재는 순조로워서요. 얼마 전에 몇 분이 시험에 통과하셔서 5개 공방 늘었어요.”
“그럼 제가 다시 바빠지게 해드릴게요. 사장님 메일 확인 좀 부탁드려요.”
그녀의 말대로 메일함을 확인했다.
“제가 보낸 메일에 PPT 자료 하나 있을 거예요.”
“네. 있어요.”
“열어보시면 의상에 맞는 콘셉트랑 인테리어, 소품 다 적어뒀거든요. 최대한 시간 단축하는 방향으로 한 거예요. 배경은 1900년대예요. 벽지랑 몰딩은 쉽게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네, 업체 번호도 있네요.”
“그쪽으로 전화하면 되는데 문제는 소품이에요. 제가 만든 디스플레이 이미지처럼 표현되려면 정말 그 시대에 만들어졌거나 더 오래된 게 좋기는 해요.”
“그렇긴 한데.”
“소품은 정말 발품 팔고 시간을 들여야 하는 문제인데.”
“주문 제작은 어때요?”
“최소 2주.”
“하…….”
“일단은 급하니까. 풍물시장이나 고가구 전문점 싹 돌아봐요. 그래도 없으면 지방으로 가야죠.”
“일단 알겠어요.”
“고생하세요. 상황 알려주시고요.”
“네.”
나는 바로 신지혜가 알려준 디스플레이 전문가와 함께 목련관으로 이동했다.
“소장님 얼마나 걸리겠어요?”
“뭐 이 정도면 하루도 안 걸려요. 제가 3D 이미지 몇 개 준비해서 보내 드릴게요. 보고 결정하시면 내일 바로 시작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지혜 씨가 얼마나 다급하게 전화 오던지 저도 일하다 와서 일단은 작업장 복귀해야 합니다.”
나는 소장님과 함께 DDP를 빠져나와.
인근 고가구 전문점과 소품 가게를 전부 다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4일의 시간을 모두 허비해 버렸다.
“없어! 없다고.”
공방을 들어가며 괴성을 질렀다.
그러자 다니엘과 아버지가 걱정스러운지 말을 이었다.
“아직도야?”
“밤에 한 바퀴 더 돌아보고 진짜 내일은 지방으로 가야겠어.”
“나한테 좋은 방법 있는데.”
“뭐?! 왜 그걸 이제 말해.”
“네가 화낼까 봐.”
“뭔데?”
“종로구 효자로 12 찾아가 봐.”
“거기가 어딘데?”
“찾아가 보면 알지 뭘 물어.”
나는 다니엘의 말을 듣고 바로 공방을 빠져나왔다.
40분을 지옥철을 겪고 왔는데.
눈앞에 경복궁이 보인다.
다니엘이 나에게 고궁박물관 주소를 알려준 것이다.
“다니엘!”
경연대회 [의상] 6.
* * *
나는 1900년대를 배경으로 한 카페 느낌의 디스플레이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 우연한 행운이 찾아왔다.
일렁거리는 광채에 고개를 돌리자.
담벼락과 주택 사이 틈에 작은 창고가 보였다.
“할아버지 저기에 뭐 있어요?”
“어어 옛날에 쓰던 가구랑 고물 주우러 다니면서 모아 놓은 것들인데 왜?”
“한번 볼 수 있을까요?”
“그래. 뭐 보는 거야 대수라고 내다 팔려고 주워왔는데 고물상에서 안 받아줘서 하나하나 쌓이다 보니까. 한가득이야.”
나는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창고 안으로 몸을 비집어 넣었다.
“이놈의 전구가 또 말썽이네.”
고장인지 창고에 연결된 전구가 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 눈에는 뚜렷이 보인다.
단 하나의 고가구에서 피어나는 밝은 빛 덕분에 모여있는 고물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찌직!
“이제 들어오네.”
전구에 불이 들어오자.
나는 빛이 나는 가구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순간 고가구에서 피어오르던 광량이 늘어나며 내 두 눈을 향해 일제히 뿜어져 나왔다.
“흡!”
몸이 서서히 굳어가며 주위에 모든 게 멈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영상에 눈이 떠졌다.
“아버님 이제 가시면 언제 오셔요.”
“짜슥. 기약 없는 싸움인데 언제 오는 걸 물어보면 이 아비가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
“그럼. 저도 함께 데리고 가주셔요.”
“네 나이 10살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험한 길 같이 갈 수 있겠느냐?”
“네.”
“하하하 기특하다. 기특해. 그럼 다음에 오거라. 이번에는 이 아비 혼자 갈 터이니.”
초라한 초가집 앞.
갈색 남방에 물이 다 빠져버린 국방색 바지 하나를 입은 청년과 아직 유치원생 정도의 작은 꼬마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남자의 표정은 미안함이 가득 묻어 있다.
“어머니 잘 모셔야 한다. 알겠니.”
“네 제가 잘 모실 겁니다.”
“한번 안아 보자꾸나. 나라 잃은 서러움 너에게만은 남겨주지 않으려 하니 꿋꿋하게 버티고 버텨야 한다.”
“예 아버님.”
젊은 청년은 아이를 안은 손을 풀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을 빠져나갔다.
대문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탁 트인 공간이었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나는 문득 청년의 얼굴을 어디선가 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이 익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고개를 돌리며 생각을 지웠다.
단 한 번도 영상 속의 인물 중 살아생전 부딪친 적이 없었기에.
그리고 나는 가만히 대문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에게 초점을 옮겨 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가만히 있는 아이의 눈에는 슬픔과 연민, 그리고 강함이 묻어났다.
그 순간 창호가 열리며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는 떠나셨느냐?”
“네 어머니.”
“근데 왜 멍하니 서 있어. 어서 들어오너라. 아직 춥구나.”
그녀의 안색을 보아 큰 병을 앓고 있는 듯했다.
눈 밑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어머니. 왜 저 장은 안 가져다 파십니까. 아버지가 오실 때마다 모두 팔아서 돈을 마련해 가시는데. 저 장만은 그대로 가지고 계시는 게 궁금합니다.”
“우진아. 저건 할머니의 유품이란다. 아버지의 추억이기도 하지. 모든 재산을 정리해 좋은 데 사용했지만, 저것만큼은 팔지 못하셨어. 너도 꼭 저 장만큼은 지켜야 한다.”
“예, 어머니.”
아이의 대답과 함께 흘러나오던 영상이 끝이 났다.
“공방 총각. 뭐 해. 멍하니 서서.”
“닮았어….”
영상 속의 청년과 할아버지의 외모가 겹쳐 보였다.
“아 아니에요. 할아버지 혹시 아버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그건 왜?”
“갑자기 궁금해서요. 독립운동가라고 하셔서.”
“아 김 우 자 진 자 쓰시지.”
김우진 영상 속에 흘러나오던 그 꼬마의 이름과 같았다.
‘그렇다면 이 장이 영상 속의 장이라는 건데.’
나는 먼지가 가득한 가구를 바라보며 할아버지에게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 부탁이 있는데요.”
“뭔데?”
“여기 있는 장이랑 소품 좀 제가 빌릴 수 있을까요?”
“뭐 그렇게 해. 뭐 어려운 거라고 근데 이게 총각한테 도움이 되나?”
“그럼요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되죠. 제가 대여료는 지급할게요.”
“됐어. 됐어 뭔 대여료야 그냥 가져다 써.”
나는 일단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고가구와 소품을 쓰기로 했다.
하지만 분명 할아버지에게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 * *
디스플레이 전시가 마무리되자.
의상을 제작하는 공간 앞에 커튼이 설치되었다.
한순간에 목련관이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우리는 천천히 전시된 의상을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역시 제너락이 가장 인상적이긴 하네요. 준비를 잘했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근데 너무 화려하지 않아요? 특색이 없는 거 같은데……. 저는 차라리 이안섭 하우스가 더 잘했다고 생각이 드는데.”
내가 지켜본바 아리raM과 제너락, 이안섭 하우스가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보였다.
하지만 대중들과 심사위원의 마음을 누가 움직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우리가 제일 멋진 거 같은데?”
류미리와 대화 중 아버지가 말을 이으셨다.
“다른 데는 너무 실용성도 떨어지고 저런 걸 어떻게 입어!”
일반인의 시선과 디자이너의 시선의 차이.
어쩌면 아버지의 의견이 해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일반인에게 오트 쿠튀르란 무엇인가?
일종의 패션쇼일 뿐이다.
그런데 아무리 화려하고 좋은 옷일지언정 입고 다니지 못하면 비싼 쓰레기일 뿐이다.
하지만 아리raM의 드레스는 일상생활에서도 입고 나갈 수 있다.
불편하긴 하겠지만 익숙한 디자인에 부담감이 없다.
“이제 가시죠.”
“피곤하네! 얼른들 들어가자.”
우리는 몇 시간을 일에 집중했다.
그로 인해 쌓인 피로감이 몸을 무겁게 했다.
“아부지 밥은 먹고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다니엘 배가 아주 고팠나 보네.”
“배가 등에 붙은 거 같습니다.”
“그래그래 고기 먹자 오늘은 아부지가 쏠게.”
“예쓰!”
누가 누구 아들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둘을 바라보며 미소를 가득 머금었다.
“미리 씨도 같이 가시죠.”
“저는…….”
그녀의 바라보는 시선이 멀리에서 느껴졌다.
내가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침선장 박주선이 이곳을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몸을 돌려 인사를 건넸다.
“미리 씨는 여기 좀 더 있다가 오세요. 이야기 빨리 끝나면 저한테 전화 주세요.”
“네 사장님.”
나는 류미리를 뒤로하고 다니엘과 아버지의 뒤를 따라 DDP를 빠져나왔다.
* * *
짙은 구름이 하늘 가득 끼어 날씨가 썩 좋지 않다.
한국과 비슷한 기후의 뉴욕인데도 더 쌀쌀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아가씨. 회장님이 뵙고 싶어 하십니다.”
“하…….”
“아가씨!”
“제가 여기 있는지는 어떻게 아신 거예요. 조용히 입국했는데.”
“로열패밀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게 비서실이 하는 일입니다.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고요.”
“로열패밀리? 제가 그 패밀리에 들어가는 사람입니까?”
“아가씨…….”
“아버지한테는 도망쳤다고 하세요. 저 어차피 내일이면 파리로 떠날 거니까.”
신지혜는 웨스턴 호텔 디럭스룸에서 서류를 정리 중이었다.
그런데 주문한 룸서비스와 함께 낯선 인물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켈링그룹 회장 직속으로 근무하는 비서실의 팀장이 나타난 거다.
“아저씨 빼고는 저 로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없고 저는 패밀리도 아니고요.”
“아가씨 계속 이러시면 강제로 데리고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
신지혜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짜며 바닥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괴로워하고 있다.
“가요 가! 마지막이에요. 정말 그리고 제 뒷조사 그만 하세요.”
“제 업무가….”
“그만하라고요!”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놈의 아가씨는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