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200)

“성격 참 급하시네요. 일단 앉으시죠.”

나는 그의 안내를 받아 그와 마주 보며 소파에 앉았다.

‘소파도 카프스킨에 풀 아닐린이네. 돈지랄!’

직업병이기는 하지만 가죽 소재가 들어간 제품을 보면 등급을 매길 때가 있다.

소파가 가장 큰 예다.

가죽은 평균 15mm의 두께를 가지고 있으며 소파를 제작할 때는 여러 층으로 피할(Skiving)해서 제작한다.

그중 최상위 외피층 풀 아닐린 등급으로 엄청난 고가의 가죽이다.

‘소파 하나에 송아지 10마리는 죽었겠네! 아깝다.’

내가 소파를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자.

송원일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소파에도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아…. 아닙니다. 가죽에 관심이 많은 거죠.”

“제가 똑같은 소파를 대표님 집에 보내드리겠습니다.”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길래 나에게 이렇게 관대한 걸까.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본론만 말씀하시죠. 제가 일이 바빠서 다시 회사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하하 그렇죠. 근데 말입니다.”

그 순간.

송원일의 표정이 일순간에 변했다.

온순한 양의 탈이 어느새 뱀의 가면으로 탈바꿈했다.

구렁이 한 마리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 시간도 금이라서요. 그럼 본론부터 말하죠. 아리raM 회사를 제가 가지고 싶은데. 원하신다면 경영은 차진혁 대표님이 이어 하셔도 무관합니다. 그리고 기존에 데리고 계시던 직원들 고용유지도 약속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 그대롭니다. 제가 대표님이 만든 일 년도 되지 않은 회사를 거액에 산다는 거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려고 여기까지 오라 가라 한 겁니까?”

“말도 안 된다니요. 거래라는 건 말이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거죠.”

송원일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류 봉투 하나와 통장 하나를 내 앞에 내밀었다.

“사인하시면 이 통장은 대표님 것이 됩니다. 이런 거래는 흔하지 않습니다. 1년도 되지 않은 비상장 기업을 아니지 공방을 제가 거액을 들여 산다는 건 엄청난 손해거든요.”

나는 잠시 그의 비위를 맞춰주기로 했다.

이 시꺼먼 속내를 조금 들여다볼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리고 저 계약서에서 내 눈에만 보이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요. 얼마나 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궁금하네요.”

“한번 보시죠.”

나는 그의 말에 통장을 들어 액수를 확인했다.

‘이 새끼 돈이 많기는 많구나.’

경연대회 [의상] 3.

* * *

통장에 정확히 공이 10개 그리고 앞에 숫자 5가 아주 선명하게 찍혀 있다.

“500억이네요.”

“무리 좀 했습니다. 500억 끌어온다고 애 좀 먹었거든요.”

나는 그의 말을 흘려버리고 웃는 얼굴로 봉투를 집어 들었다.

어차피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일은 없겠지만 내용이 궁금했다.

무슨 꿍꿍이로 나에게 이런 제시를 하는지 말이다.

“확인해보시죠. 구미가 당기는 계약서거든요.”

듣기 거북할 정도로 당당한 저 말투가 내 심기를 건드렸다.

“구미가 당길 정도라니 궁금하네요.”

“좋은 거래가 될 겁니다.”

살짝 입꼬리를 올려 보이며 내가 서류봉투를 열려는 순간.

찌릿할 정도의 소름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달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들고 있는 봉투 속 서류에서 검붉은 빛이 흘러나왔다.

‘젠장!’

나는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서류를 꺼내 들었다.

‘스마일 하자. 포커페이스!’

다행인 건 빛이 퍼져 나올 뿐.

불쾌한 영상까지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 더러운 기분만큼은 뼛속까지 기억에 남을 거 같다.

“흠…….”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나는 천천히 서류를 읽어 나갔다.

일단 내가 보기에 독소 조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극히 평범한 M&A 인수합병계약서다.

‘평범한데.’

이런 평범한 계약서에 소름 끼치는 검붉은 빛이 나타났다?’

나는 분명 송원일이 서류에 장난질을 해뒀다고 지레짐작했다.

그리고 이 더러운 기분을 나만 느낄 수 없었기에 받은 만큼 돌려주기로 했다.

“별문제 없네요.”

“그럼 인수합병 계약서 서명만 하시면 되겠네요. 결정은 하셨습니까?”

“아직이요. 그리고 500억은 너무 적어요.”

“네!?”

“아리raM은 최대 3년 뒤면 에르맥스를 뛰어넘는 회사가 될 겁니다.”

“하하하. 차 대표님 지금 저 웃으라고 하는 소리입니까?”

“아니요. 제가 웃기는 데는 재주가 없어서요. 진심인데?”

“제가 아무리 패션 쪽에 무지하다고 해도 그런 소리를 믿으란 말입니까? 지나가는 개새끼도 웃겠습니다.”

“개새끼가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시죠.”

“그럼 한번 물어보죠. 얼마면 파시겠습니까?”

“뭐 80조? 정도 주시면 팔도록 하죠.”

“…….”

“그 정도 능력 없습니까?”

내 말을 들은 송원일의 얼굴이 입체적으로 변했다.

어금니를 강하게 씹어대니 턱이 삐죽 튀어나왔다.

미치지 않고서야 80조라니.

대기업 일 년 기준 순수익 5조가 넘는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데 동네 구멍가게 같은 회사를 운영하는 놈이 처음 제시 금액에 40배를 불렀다.

송원일은 멍하니 내 얼굴만 바라보며 분노가 치밀었는지 입꼬리가 꿈틀꿈틀하기 시작했다.

“저한테 장난이 지나치시네.”

“장난 아닙니다. 에르맥스 현재 순 자산규모 102조입니다. 그럼 당연히 3년 뒤에 에르맥스를 뛰어넘을 회사를 500억에 넘긴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쪽이 장난이 심하신 거 같은데.”

“내가 우습게 보였나 보네 차 대표.”

“그러니까요. 송원일 사장님 정말 웃기는 재주가 있는 거 같습니다. 본받아야겠어요. 내가 없는 재주가 있어서 부럽습니다.”

송원일은 분노를 넘어서 나와 말하는 자체가 시간 낭비라는 걸 한순간에 깨달은 듯 혀를 찼다.

이대로 멈추면 내가 아니지.

이 더러운 기분을 더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주실 거예요. 말 거예요?”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인수합병 하자는 분이 욕까지 하십니까. 이거 상도덕에 어긋나서 못하겠습니다.”

어차피 절대 줄 수 없는 금액이다.

YK어패럴 통으로 팔아도 저 금액을 줄 수 없다.

만약 가능하다 해도 현재의 아리raM을 80조에 어떤 미친놈이 사겠는가.

내가 제시한 80조의 금액은 나와 무형문화재 우리 직원들 모두의 능력을 합친 금액이다.

“하…. 욕한 건 사과드리겠습니다. 차 대표가 이렇게 미친 재주가 있는지 몰랐네요.”

그는 어찌 된 것인지 다시 평정심을 찾았다.

하지만 어차피 오늘 보고 안 볼 사이인지라 나는 한 번 더 약을 올리기로 했다.

“제가 살짝 미치기는 했죠. 송 사장님은 더 미치셨고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 미친!”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별장을 빠져나왔다.

* * *

드디어 한국 오트 쿠튀르의 의상 부문 대회가 시작되었다.

나와 류미리 그리고 다니엘, 아버지까지 모두가 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다니엘은 여전히 설레하며 DDP 전체를 탐방하고 다녔다.

“여기는 올 때마다 새로워.”

“뭐가?”

“여자들이 새로워. 매번 아름다운 여성들이 넘쳐난다.”

“대회나 신경 써줘. 계속 그러면 국물도 없어.”

“왜 이래. 시작도 안 했는데. 내가 또 시작하면 알잖아. 장난 아닌 거.”

“그래, 어련하시게.”

나는 문득 오랜 친구인 바쟐이 생각났다.

바쟐이 자주 나에게 하던 말이었는데 내가 다니엘에게 똑같이 하고 있었다.

‘바쟐 너도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구나.’

새삼스럽게 내 과거를 돌아보게 됐다.

내가 한 번씩 크게 사고 칠 때쯤이면 바쟐은 늘 언제 철들래? 라며 잔소리를 했었는데.

문득 그때가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내 옆에 목석처럼 서 있는 류미리를 보며 내가 말을 이었다.

“미리 씨는 어때요?”

“저는 좀 떨리네요. 카메라 울렁증이 있는데 살짝 걱정도 되고요.”

“하던 대로만 하세요. 카메라야 일에 집중하면 눈에도 안 들어올 테니.”

“네.”

의상 부문은 하루 동안 20가지의 의상을 모두 제작하는 건 아니다.

디자인 시안 20가지를 제출하고 대회장에서는 5가지 메인 의상을 제작.

그 후 디스플레이에 의상을 전시한 후에 2차전을 마무리한다.

그 이후 최종 3팀을 결정하게 되며 서울 패션위크가 끝나는 다음날 바로 컬렉션이 열리게 된다.

우리가 목련 2관 앞에 도착하자.

안내원이 먼저 다가왔다.

“아리raM에서 오셨죠.”

내가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자.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죠. 프로그램도 봤고요. 너무 팬이에요. 시크릿 백 나오면 할부를 해서라도 살려고요.”

“감사합니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세요.”

“네.”

입에 발린 말이라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가 나의 디자인을 알아봐 준다는 건 매우 기쁜 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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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대형 홀에 들어서자.

1차전과 같은 형태로 파티션이 나누어져 있다.

주위는 카메라와 수많은 스태프가 움직였고 파티션 정면에는 심사위원들이 모여있었다.

“갑자기 너무 긴장돼요.”

카메라가 놓여 있는걸 보더니 류미리가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긴장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네.’

“걱정하지 마요. 우리 디자인은 최고니까.”

나와 류미리이 완성한 디자인은 바로 파리에 가져가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퀄리티를 가지고 있다.

오랜 시간 그곳에서 현역으로 일한 내가 장담할 수 있다.

대회 시작 일주일 전.

우리는 20가지 최종 의류 디자인 시안과 메인 의상에 들어갈 원단을 모두 선정했다.

“이 정도면 되겠네요. 한번 보실래요?”

“네. 보여 주세요.”

나는 그녀가 완성한 디자인을 한 번 더 대회의 취지에 맞게 수정했다.

그녀가 할 수 없는 디자인의 범주를 넘어서야 했기에.

수작업인 만큼 불필요한 부분을 정리하고 세세한 부분을 살려야 한다.

현재 그녀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이 부분만큼은 내가 직접 해야 했다.

“제가 생각했던 디자인이에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못 바꾼 부분인데.”

“작은 디테일이 명품을 만드는 거죠.”

“아직 배울 게 태산이네요.”

“금방 배울 겁니다. 그리고 미리 씨가 만든 어깨 부분이 가장 특색이 있으니까 돋보이는 컬러로 바꿨습니다. 괜찮죠?”

“네. 저야 감사하죠.”

아리raM의 오트 쿠튀르 드레스는 동서양의 올드한 아름다움을 퓨전시킨 디자인이다.

하의는 모두 여러 가지 색의 최상급 명주로 만들어진 한복으로 한국적 느낌을 살려 디자인했다.

크로스로 겹겹이 층을 만들어 복고풍의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한 송이의 장미 같은 이미지를 엿볼 수 있다.

“이 드레스는 튤립이 아니라 연꽃잎을 어깨에 올려둔 거 같네요.”

“칭찬이시죠?”

“그럼요. 생각 이상으로 잘해줬어요.”

“사장님 잔소리 덕분이죠. 그날 가봉만 몇 번 수정했잖아요. 질렸어요.”

“가봉으로 틀을 잡아야죠. 어쩔 수 없는 과정입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류미리가 만든 상위 숄더 디자인 덕분인지 평범한 페전트와 플로럴의 느낌이 특별하게 느껴 졌다.

페전트는 유럽의 농가에서 주로 입던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긴 팔 원피스의 한 종류다.

그리고 플로럴은 꽃무늬를 프린트한 원단의 총칭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포인트 하나하나를 찾아서 수정을 거듭했다.

그로써 아리raM만의 오트 쿠튀르 드레스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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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를 통과한 브랜드들이 모였고 2차전이 시작될 시간이 다가왔다.

사회자 전형무가 마이크를 들고 메인 스테이지로 올라왔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고 기다린 한국의 오트 쿠튀르 2차전이 시작될 시간입니다.”

“와아!”

순간 함성이 들리며 브랜드 관계자들이 고개를 돌렸다.

많은 사람이 관람석에 앉아있었다.

들어올 때 사람들이 조금 붐빈다 했더니 관람석을 만들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저번 방송이 잘됐나 보네. 갑자기 관람객까지.”

“내가 아까 돌아다니면서 들은 건데. 잡지랑 바이어, 그리고 잡지사 디렉터 같은 패션업계 사람들 초청한 거 같던데?”

다니엘의 말을 듣고 보니.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우리한테는 나쁜 거 없지. 잡지사 컨택에 해외 진출기회일 수도 있고.”

다니엘과 내가 대화를 이어갈 때쯤.

전형무가 카메라를 보며 진행을 이어갔다.

그렇게 우리는 차례차례 파티션으로 이동해 의상제작에 필요한 도구들을 정리했다.

“미리 씨는 부분 패턴 작업 끝날 때마다 바로바로 저한테 넘겨주세요. 그래야 바로 재단할 수 있습니다.”

“네.”

“그리고 다니엘과 아버지는 치마 바느질 꼼꼼하게 해주셔야 합니다. 일정하지 않으면 느낌도 다르고 모양 이상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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