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200)

“정말 감사합니다.”

그 순간 멀리서 신지혜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잔소리하기 전 표정.

‘안 돼!’

“그런 거 아니에요. 신 디렉터 이건 감동의 눈물이에요.”

“사장님 진짜! 여자들 그만 울려요.”

“진짜 오해라니까요. 미리 씨 말 좀 해봐요.”

류미리는 신지혜를 그윽하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맞아요. 사장님 때문이에요. 흑흑.”

“그거 봐요. 사장님이 울린 거 맞구먼 뭐.”

‘환장하겠네.’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작업실로 이동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잔소리 폭격이 시작될 게 뻔했다.

* * *

무형문화재 제11호 침선장 박선주.

대궐 같은 그녀의 집 안방에서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찌 아비라는 놈이 딸 하나 간수 못 해서 몇 년째 집 밖으로 나다닌단 말이야!”

“어머니, 미리가 애도 아니고 벌써 26살이에요.”

“그걸 말이라고! 아이고 머리야.”

“어머니 이제 미리 가만히 놓아두세요. 하고 싶은 거 하게. 다니는 회사마다 압박 넣으셔서 그만두게 하지 마시고요. 그렇다고 이 집에 안 들어옵니다.”

“그럼 집안의 가업을 누가 이어받으라는 거야? 하나뿐인 아들놈에 하나뿐인 손녀인데. 내 대에서 이 일을 접으라는 말이냐.”

“어머니 제자분들 있지 않습니까. 왜 이런 고집을 피우세요.”

류미리의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말을 남기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어머니, 미리 가만히 두세요.”

“저놈이!”

박선주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책상 위에 놓여있는 디자인 시안을 바라봤다.

“한복의 맥을 이어야지…. 왜 네가 이런 일을 하고 있냐는 말이야. 할미가 그리 부탁을 했건만.”

생각에 잠긴 박선주는 오래전 일을 회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허 바느질을 그렇게 하면 옷감이 상한다고 말했잖아. 다시 해봐.”

“네.”

“한땀 한땀 정성을 다하라고 했잖아. 우리 집안은 왕의 옷을 만들던 집안이야. 그런데 그런 실력으로는 부끄럽지 않겠니.”

“네.”

“또, 또! 다시.”

류미리는 어린 시절부터 바느질을 해왔다.

박선주의 손녀가 아닌 대를 이을 박선주의 제자로 말이다.

박선주는 대를 이어 침선장이 되었고 어느 무형문화재들보다 부유한 삶을 영위했다.

그녀의 한복은 작품으로 치부되며 고위급인사와 귀빈들의 선물로 비싼 값에 거래가 되는 사치품의 일종이다.

그런 이유에 오래전부터 이 일을 하나뿐인 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제자들에게 이 일을 물려주라니 어림도 없지.”

생각을 정리하고 잠시 고민을 하던 박선주는 큰소리로 밖에 있는 한 사람을 불렀다.

“김 비서.”

“네, 선생님.”

“미리 이번에 회사 그만뒀다며 근데 왜 집에 안 들어오는 거야?”

“그게….”

“또 뭐야! 내가 억지로라도 데리고 오라고 했잖아.”

“이번에 아리raM이라는 브랜드에 스카우트 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도 브랜드에 압박을 넣을까요?”

“그 방법으로 되겠어. 그럼 또 다른 데서 헛짓할 텐데. 내가 직접 나서야겠으니 차 대기시켜.”

“네.”

경연대회 [의상] 1.

* * *

경연대회 1차전이 끝난 시점으로부터 3일이 지났다.

우리는 예상 밖의 일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방송이 송출된 후 이어지는 문의 전화에 정신이 뺏길 정도였다.

“전화선을 뽑을 수도 없고…. 하.”

3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있고 울려대는 통에 신지혜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시크릿 백이 출시 안 됐습니다. 차후 계획 중입니다.”

“몇 통째예요? 시크릿 백을 빨리 출시를 해야 하나.”

내가 그녀에게 말을 건네자.

신지혜가 아니라는 의미로 손사래를 쳤다.

“무슨! 온리 원 백 2달 밀렸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물량 출하 일주일 내로 맞췄잖아요.”

“난리에요. 시크릿 백을 못 구하니까 그 화살이 이쪽으로 몰린 거 같아요. 얼마 전에 장하나 씨 온리 원 백 특별 화보 업데이트됐거든요. 그 여파도 무시 못 하고요. 문제가 많아요. 공방 가죽장인분들 더 늘리셔야 할 거 같은데….”

“꾸준히 시험 치러지고 있어요. 기준을 못 넘어서 그렇지.”

“그 기준 좀 낮추면 안 돼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하…. 그렇겠죠. 사장님 고집 누가 말리겠냐마는. 아쉬워서 해본 말이에요.”

신지혜는 걱정이 한가득이다.

예약이 길어지면 이탈하는 고객이 많아진다.

대체상품이 차고 넘치는 현대사회에서 늦어지면 도태된다는 불안감.

“걱정하지 마세요. 고객들은 기다릴 테니까.”

“너무 확신하는 거 아니에요?”

“고객을 믿거든요. 그리고 우리를 믿고요.”

소수의 고객을 놓친다 해도 품질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정해놓은 가이드 라인을 지켜야 했다.

에르맥스의 경우 같은 방식으로 가방을 판매하고 있으며 기다리는 시간은 우리와 비교하면 훨씬 극악무도하다.

최소 몇 달에서 최대는 2년 이상.

하지만 그 시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믿기 때문에.

나에게 최고의 가방을 안겨줄 거라는 믿음과 설렘.

“출장 날짜는 잡으셨죠?”

“네. 빨리 해결하고 와야죠.”

“예방해두는 게 좋을 거 같으니까 부탁드립니다.”

“뭘요.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방송이 유명세를 달리는 순간부터 신지혜를 유럽과 미국으로 보내기로 했다.

디자인 특허 등록.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지적 재산권인 디자인을 지킬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온리 원 백, 시크릿 백 시리즈 그리고 이것까지.”

“생각보다 많네요.”

“생각지도 못했던 의상이 늘어나서.”

최종 도안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의상 파일을 내밀었다.

약간의 변경은 전혀 상관이 없기에 이번 기회에 전부 디자인 특허를 받아놓는 게 좋다.

“파리에 들어가시면 샹젤리제 거리 동향이랑 몽테뉴 거리 신규브랜드 정보도 알아 와주세요.”

“저도 계획은 잡고 있어요.”

명품의 최대 생산지이자 판매지 파리.

김서진의 삶을 살 때는 하루도 빠짐없이 지나치던 거리 샹젤리제.

많은 관광객과 명품소비를 즐기는 전 세계의 고객이 모이는 거리인 만큼 동향과 정보를 얻기 쉽다.

개선문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샹젤리제의 야경은 정말 아름답다.

‘그립네. 샹젤리제라.’

신지혜에게 가는 김에 휴식도 취하며 관광도 하기를 권유했다.

하지만 그녀는 한사코 거절하며 일에 집중하겠다는 말만 내뱉고 있었다.

“좀 쉬다가 오세요. 파리에서 관광도 좀 하시고.”

“소매치기도 많고 저는 별로예요. 프레타 포르테[명품 기성복 패션위크] 기간도 아니라 구경할 것도 없을 텐데요. 빨리 처리하고 최대한 빨리 들어와야죠.”

“네.”

‘가만히 보면 일 중독이라니까.’

패션 외골수인 그녀에게 평범한 관광을 하라고 했던 내가 바보다.

.

.

.

대회에 선보일 드레스 라인 최종디자인 시안 20가지를 류미리에게 내밀었다.

“이대로 나가도 손색이 없겠는데요.”

그녀는 진심으로 나에게 자기 생각을 전달했다.

분명 최고의 디자인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 만든 디자인이니까.

죽기 전 계획 중이었던 브랜드의 런칭 컬렉션에 올랐어야 하는 드레스 라인이었다.

그만큼 완성도와 어떠한 브랜드에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브랜드 이미지가 달라.’

아리raM을 만들며 큰 틀이 깨졌다.

내가 기존에 추구하던 느낌에 정반대되는 브랜드다.

그만큼 어렵고 깊이 또한 아득하다.

“이제 미리 씨의 몫이에요.”

“그게 무슨?”

“제가 못하는 부분을 고쳐 주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 말에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직 시간은 여유로우니 천천히 고민해봐요.”

“네.”

내가 류미리를 고용한 이유.

한국의 전통을 누구보다 현대의 의상에 잘 곁들일 수 있는 디자이너다.

오랜 세월 해외에서 생활한 나는 한국의 문화와 전통에 익숙지 않다.

그런 이유에 쉽게 색을 입히려 든다면 이도 저도 아닌 디자인이 탄생할 거다.

지금부터 문화와 전통을 알아간다면 가능은 하겠지만 시간이 없다.

그런 이유에 나는 최고의 방법과 효율을 선택했다.

류미리와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사무실 문이 세차게 열렸다.

“……할머니.”

류미리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해 버렸다.

“할머니?”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할머니라 칭하는 분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몸을 감싸 안더니 제발 나가자고 부추기는 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다.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나가요!”

류미리의 할머니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그 자리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너 보러 온 거 아니다. 이 손 놓아라. 집에 들어오라고 그리 일렀는데.”

“할머니!”

“내가 여기를 찾아오기 전에 시키는 대로 했어야지.”

그녀는 류미리를 지나쳐 나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차진혁 대표?”

“안녕하십니까. 차진혁입니다.”

“자네는 날 모르겠구먼. 나는 자네를 잘 알고 있는데. 재미있는 일들을 벌이고 있더구먼.”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재미있는 일이라.

“그게 무슨?”

“무형문화재 영감탱이들 데리고 일하고 있잖아.”

“네?!”

나는 안면이 살짝 굳어진 게 느껴졌다.

내가 존경하고 따르는 분들이다.

그런 분들을 영감탱이라고 표현하는 건 매우 불쾌한 일이다.

“친우들이야. 그러니 내 말버릇은 이해해요.”

“친우라니요?”

“내 소개가 늦었지. 박주선이라고 하는데 알고 있나?”

“침선장?”

“그래 내가 침선장이라네. 우리 따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갑자기 아리raM을 찾아온 사람이 무형문화재 제11호 침선장 박주선.

그리고 침선장의 손녀가 류미리.

퍼즐이 맞춰지지 않는다.

“네, 앞에 전통찻집으로 가시죠.”

나는 공손하게 그녀의 말을 받아들였다.

내가 용인하자.

류미리의 표정이 식음을 전폐한 표정으로 변했다.

왠지 이번 한 번만 겪은 상황은 아닌 듯하다.

매번 박주선의 뜻대로 이루어졌거나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간 게 많은 듯했다.

띠링!

박주선과 함께 찻집으로 이동하는 길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신지혜가 벌써 나선장 신영길 어르신에게 보고를 마친 듯했다.

― 그 할망탕구 성격 매우 안 좋음. 조심해라.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고 박주선과 함께 찻집에 들어섰다.

“여기 앉으시죠.”

“그래요. 1차 대회는 잘 봤네.”

“네 감사합니다.”

“이건 사적인 질문이지만 왜 그 영감들이랑 일하게 된 거예요? 당신같이 트렌디한 사람이면한국 전통에는 크게 관심이 없을 텐데.”

매우 사적인 질문이라….

어떤 의미로 물어보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진심으로 답변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제 생각이 바뀐 지도 얼마 안 됐으니까요. 아름다웠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고 한국의 전통을 세계에 알리고 싶습니다.”

“세계라….”

“아시겠지만 명품은 특정 디자이너의 능력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전통이라는 매개체가 필요할 때도 많거든요. 그런 이유에서 선생님들과 함께하게 된 겁니다.”

“이용한다는 거네?”

“…….”

“왜 말을 못 해. 내가 맞춘 건가?”

“이용이 아닙니다. 상생이죠.”

그녀의 말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숨어있다.

뱉어내는 말에 내 목이 단숨에 목을 베어 나갈 거 같았다.

“본론만 말하겠네. 우리 미리 놓아주게.”

“…….”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슨 막장 아침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대사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치 류미리를 소유물인 양 대하는 박주선의 태도가 불쾌하게 느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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