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왔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다니엘의 손을 부여잡더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신다.
나와 다니엘도 너무 당황스러웠다.
“할망구야. 우리 손주 놈이야 손주 놈.”
“손주? 그게 뭔데.”
“에휴…….”
할아버지는 당황한 다니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할망구가 노망이 나서 그러니 네가 이해해라.”
“네 그럼요.”
할아버지는 나와 다니엘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허름했지만, 온기가 남아있어 훈훈한 느낌이 가득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바닥에 눕히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래 산다.”
“네.”
“…….”
“…….”
오랜 세월이 지나 몇십 년 만에 만난 사이인지라 어색함이 감돌았다.
그때 할아버지가 다니엘의 손을 다시 맞잡더니 말을 이었다.
“미안허다. 이 할애비가 다 잘못혔다.”
“다 지나간 일인걸요.”
다니엘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 생각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네 아버지 갑자기 죽어븐지고 네 어머니도 암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는데 네가 얼마나 울던지. 나도 그때는 가족들 책임져야 한께. 잠시 일하러 갔다 왔더니만 네 엄마가 널 어디로 보내버렸다고 그게 서로한테 행복한 거라고 나한테 그러더라. 그 뒤로 네 엄마 죽고 나도 다 잊아뿌고 살았다. 미안허다.”
항상 궁금했던 마지막 기억의 앞부분.
다니엘은 자신이 원망했던 마음과 미움으로 가득했던 과거를 회상했다.
“하…. 안 울려고 했는데.”
그런 모습에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다니엘에게 건넸다.
다니엘 어머니는 다니엘이 좋아하는 왕방울 사탕 한 주먹을 쥐여주며 보육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뒤돌아본 그의 눈에 하염없이 울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
지금 생각해보면 흙빛에 푸석푸석한 피부에 안색이 좋지 않던 어머니의 얼굴.
“내가 그때 널 찾았어야 했는디. 미안허다.”
할아버지는 계속 자신을 자책하고 계셨다.
다니엘은 그런 할아버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누워 계시던 할머니가 다가와 질문했다.
“이 총각은 누군디? 오빠 손을 잡고 있어?”
“이 할망구가 우리 손자라고.”
“아……. 우리 손자. 미경이 아들. 우리 손자 현우.”
그 순간 할머니가 양팔을 벌리며 다니엘을 확 끌어안으셨다.
“잘 왔다. 우리 손자.”
경연대회 [가방] 4.
* * *
다니엘에게 3일 휴가를 주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게 했다.
전주에서 복귀한 다니엘의 얼굴이 확연하게 밝아졌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랄까?
“현. 농땡이 부리지 말고 일해.”
“누가 누구보고.”
신기하게 왕 농땡이 다니엘이 일에 집중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예전처럼 갑자기 사라지는 법도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매번 가족들의 행방을 찾으러 나갔던 모양이다.
‘말을 하지 미안하게.’
내일이면 F/W 서울 패션위크 일정의 중간을 돌파하는 날이다.
그리고 오늘 밤 9시에 케이블에 특별기획으로 편성된 [패션업계를 짊어질 브랜드]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오트 쿠튀르 예선이 방영된다.
“다들 인상 좀 펴요. 잘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모두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기대와 긴장감이 공존하는 듯하다.
신지혜도 아침부터 설레발치며 마음을 들뜨게 하는데 크게 공조했다.
“1등 오로지 1등!”
“네, 네 그래야죠.”
“사장님 자신감 있게 큰소리로 1등 한번 외쳐봅시다.”
“1등! 1등!”
“1등!”
내가 외치자 옆에서 있던 다니엘도 크게 외치고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모두에게 미안하지만 일단 밀려있는 일에 집중해야 했기에 나는 찬물을 끼얹었다.
“다들 이제 일합시다. 신 디렉터님 매출 현황이랑 총판매량 데이터, 그리고 가죽 재고 정보, 가죽 소진데이터 가져와 주세요.”
“네. 김빠지네요.”
“그럼 김빠졌으니. 하나 더 부탁할게요. 로열티 관련 서류도 부탁해요.”
모든 전산 데이터를 신지혜에게 맡겨둔 상태지만 내가 모르는 게 있어서는 안 된다.
데이터를 이용해 고객의 성향과 판매금과 소비된 재료, 로열티로 나간 금액을 모두 계산해 손익을 계산해두어야 한다.
“아 사장님 그리고. 신영 백화점에서 기획전 제의가 들어왔어요. 그리고 대형 할인점에서도 들어오긴 했는데.”
“조건이 어떻게 되죠?”
“백화점은 기획전이라 순 매출의 30%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쁘지 않네요. 기획전이면 매장사용료, 부대시설비 안 나갈 테고 매니저 비용만 저희가 지원하면 되는 건가요?”
“네. 그리고 마트는 매장을 장기적으로 계약하길 원하더라고요. 순 매출의 25%인데. 문제가 조금 있어요. 매장사용료 한 달 700만 원 매니저 인건비, 부대시설비 다 저희 몫이에요.”
“백화점 쪽이랑 회의 잡아주세요. 마트 쪽은 포기하는 게 좋겠어요. 25% 순매출액에 매장료까지 남는 게 없을 거 같아요. 남는다고 해도 마트랑 저희는 이미지가 맞지 않아요.”
“네. 제가 백화점 영업팀이랑 이야기해보고 일정 잡겠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아 그리고 내일 신입사원 3명 올 거예요.”
“드디어 결정하셨나 보네요.”
“네 보면 아실 거예요.”
보면 안다니 뭘 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입사원 채용에 모든 걸 전임했기에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
.
.
어느덧 밤 9시가 되어 우리는 아리raM 사무실에 옹기종기 모여 텔레비전을 켰다.
어머니도 오셨고 나는 모두가 좋아하는 치킨과 맥주를 시켜 준비해 두었다.
“오늘은 제가 쏘겠습니다.”
“오 사장.”
“다니엘 뭐 빠진 거 같지 않냐?”
“님?”
“그래! 이걸 진짜.”
우리가 또 티격태격하고 있자.
옆에 계시던 어머니가 웃으시며 말을 이었다.
“우리 진혁이가 외동아들이라 외로움도 많았는데 신기하게 다니엘이랑 있으면 그런 느낌이 안 들어서 엄마는 좋다.”
“어머니 제가 둘째 아들 하겠습니다.”
“나야 좋지 이렇게 훤칠하고 잘생긴 아들 둘이나 있으면.”
“저는 사장보다 일도 잘합니다. 에르맥스 장인학교 S등급을 지향하는 사람으로….”
그때 신지혜도 뒤질세라.
“어머니 저도요 전 첫째 딸 어떠세요?”
“좋지요. 신 디렉터님 정도면 과분하죠. 과분해 호호호.”
‘얼씨구.’
셋이 웃고 난리가 났다.
그때 사무실의 문이 열리더니 새로운 손님이 등장했다.
“어머니 그럼 저는 며느리 하겠습니다.”
“누구?”
“아리raM 메인모델 장하나라고 합니다.”
“아까 무슨?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그 순간.
내가 나서며 상황을 중재했다.
“농담이야 농담. 다들 그러니까. 장하나 씨도 끼어든 거잖아. 그만하고 프로그램 집중하세요.”
“아, 그런 거야. 좋다 말았네. 아가씨도 앉아서 치킨이랑 먹어요.”
“네 어머니.”
내가 상황을 중재하고 장하나를 바라보니 뭔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뭐 나보고 어쩌라고. 장단 맞춰주길 바란 건가? 어휴.’
.
.
.
프로그램이 시작되자.
모두가 오른쪽 위 끝에 집중했다.
ARS 투표.
완성된 가방의 디자인이 수시로 흘러갔고 프로그램이 시작하는 순간 투표가 진행되었다.
“사장님 저 방 안에 뭐 있는데요?”
“보면 알아요.”
“아 쫌 알려주세요.”
“보면 압니다.”
“하……. 다니엘!”
다니엘은 신지혜에게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그때 장하나가 소리쳤다.
“디자이너들 갑자기 뛰는데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안 가득 쌓인 가죽 더미가 화면에 나타났다.
“와 가죽을 저따위로 쓰다니.”
“그거 아세요. 저기 최고급 가죽들이 하단에 막 구겨져 있었다는 거.”
“…….”
가죽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장하나와 어머니도 얼굴을 찌푸렸다.
“꼭 저렇게 해야 하는 거니?”
“연출이에요. 재미있게 만들어서 방송 내보내야 하니까 PD가 만든 거겠죠.”
“깔끔하게 전시해두고 골라가면 얼마나 좋아.”
제 말이요. 어머니.
“근데 다른 브랜드 가죽공들은 인원이 상당하네요.”
“그렇죠. 개인 디자이너들도 어디서 구했는지 가죽공들을 엄청나게 데리고 왔더라고요.”
그날에는 몰랐지만 다른 시야로 보니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아리raM은 3명, 다른 브랜드의 사람은 최소 7명은 되어 보였다.
그리고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다니엘의 형인 존 커터였다.
화면에 잘 잡히는 흰 피부에 덩치도 산같이 거대했다.
“어…. 이상하다.”
나는 순간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존 커터를 제외한 같은 브랜드의 가죽공들이 정확하게 최고급 앱송이 있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다니엘.”
“나도 보고 있어. 이상하다고 했더니.”
“너희 형은 모르는 거 같은데?”
“알 게 뭐야. 다 같은 놈들이지.”
“저 브랜드 어디야.”
내 말을 듣고 있던 신지혜가 명단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제너락이네요. 1년 차 준명품 브랜드로 나름 유학파 디자이너가 만들었어요. 브랜드 Han에 있을 때 몇 번 부딪친 적도 있고요. YK어패럴에서 작년에 인수한 브랜드에요.”
“YK어패럴이요?”
“네. 아는 곳이에요?”
“아니요. 처음 들어봐요.”
“YK어패럴은 최근에 엄청나게 떠오르고 있어요. 떡잎부터 키워보자는 건지 떠오를 거 같은 브랜드는 다 인수하고 있어요. 만약에 브랜드 몇 개만 크게 성공시키면 패션그룹으로 성장할지도 모르고요.”
“그룹?! 그만큼 성장할 가능성은요.”
“예측 불가죠. 근데 희박한 거 같아요. 저가 브랜드로 시작했기 때문에 이미지가 아직 안 좋아요.”
나는 그제야 싸늘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그날의 상황 그리고 기억들.
서로를 견제하는 듯하지만 다 같은 동질감을 가진 사람들.
“신 디렉터님 죄송한데 부탁 하나만 할게요. 참가 브랜드랑 개인 디자이너들 소속이랑 투자자 좀 알아봐 주세요.”
“네,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개인 디자이너까지 알아보려면 주변 사람도 알아봐야 해서.”
“괜찮습니다.”
‘설마 이렇게 큰 프로젝트에도 장난질 친 건 아니겠지.’
나는 신지혜에게 부탁하면서도 제발 아니길 바랐다.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프로그램에 집중했다.
프로그램의 중반부가 넘어갈 때쯤.
아리raM은 ARS 1등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아직 표 차이는 얼마 나지 않지만, 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우리에게 쏠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장님 1등이에요.”
“오호 1등.”
모두가 환호했다.
들고 있던 치킨 다리를 들어 올리며 다니엘이 소리쳤다.
신지혜와 어머니는 부둥켜안고 소리를 질렀다.
장하나도 내 옆에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근데 은근슬쩍 가까워지는 건 나만 느끼는 건가?
‘내가 예민한가.’
나는 장하나를 피해 냉장고로 가 물 한 잔을 들이켰다.
심장이 마구 뛰어 답답함을 느꼈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지 않았을 텐데.
차진혁의 몸으로 처음 겪어보는 기쁨이기 때문인지 엄청나게 달아올랐다.
‘1등으로 끝내자.’
예선은 10위 안에만 들면 되는 일이지만 1등으로 끝낸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
현재 20개 브랜드의 가방 디자인, 품질에 대한 평가가 전국적으로 방영되는 방송이다. 아리raM의 이미지가 좋은 디자인과 좋은 품질로 자리 잡힐 기회다.
내가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모두 들떠있는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텔레비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아버지와 나 그리고 다니엘이 규칙적이고 간결하게 움직이며 시크릿 백을 만드는 과정이 방영되고 있었다.
“세 분 다 대단하네요.”
“여보….”
아버지는 아름다운 여성들의 이런 반응이 부끄러운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다니엘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우리가 이랬구나.’
우리 셋은 물이 흐르듯 몸을 움직였다.
그때그때 필요한 도구와 가죽, 부자재를 전달해가며 가방을 만들어 갔다.
그 순간.
“와 다니엘! 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