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200)

“여전히 뚱한 놈이네. 한국까지 와서 얼굴을 봤는데 인사도 안 하냐.”

“엿이나 먹어.”

다니엘은 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돌아서 버렸다.

“다니엘 그러다 형한테 혼난다.”

“형?!”

다니엘은 귀를 막으며 돌아서 버렸고 다니엘에게 형이라 말하는 노랑머리의 외국인이 나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다니엘의 보스야?”

“맞아. 형이라니 무슨?”

“아…. 별거 아니야. 우리 부모님이 다니엘을 입양했거든. 피는 달라도 가족인데 저 자식은 맨날 삐딱선이라.”

다니엘에게 이런 비밀이 있었다니. 새삼 처음 만났을 때.

내 질문에 반응하는 다니엘의 슬퍼 보이는 표정이 떠올랐다.

“하여튼 피는 달라도 내 동생이니 잘 부탁해. 나는 존 커터야 편하게 커터라고 불러.”

“나는 차진혁. 뭐 내가 신세 지고 있는 처지라서.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앱송을 싹쓸이한 거야?”

나는 왜 그들이 앱송을 독점했는지 의아했다.

보통 내부에 들어가는 가죽은 앱송보다 훨씬 부드러운 가죽을 사용하는 게 보편적이다.

내부의 부드러움이 가방의 질과 품질을 바꾸는 경우도 많다.

그때 내 질문에 커터는 표정이 굳으며 답했다.

“경쟁 아닌가? 그런 질문은 실례인 거 같은데.”

그의 말에 동감한다.

지금은 모두가 경쟁상대다.

그때 사회자 전형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곧 시작입니다. 현재 시각 3시 29분 모두 지정된 파티션으로 이동해 주십시오. 준비가 끝나면 시작하겠습니다. 정해진 시간은 3시간입니다.”

“다음에 다시 보자고 보스!”

전형무의 안내에 존 커터는 자리를 떠났다.

주위에 많은 인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말 했어?”

“별말 안 했어. 그냥 너 잘 부탁한다는데.”

“위선자 새끼.”

“위선자? 네 형은 널 엄청 아끼는 거 같던데.”

“…….”

다니엘은 내 말에 침묵으로 답했다.

둘만의 비밀이자.

가족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라는 생각에 나는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침묵하던 다니엘이 말을 이었다.

“진혁. 한국인 입양아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아?”

“흠…….”

어려운 질문이다.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기에 쉽게 말할 수 없다.

내가 다니엘을 지긋이 바라보니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생과 사야. 모두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랬어. 사랑을 받기 위해 몸부림쳤어. 근데 더 무서운 건 저놈이야. 부모님 앞에서는 챙겨주는 척 사랑하는 동생으로 대하다가 돌아서면 나를 괴롭혔거든.”

“…….”

“근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왜인지 알아.”

“…….”

“두 번은 버림받고 싶지 않았거든. 그리고 나는 저놈을 피해서 미국에서 멀리 떨어진 피렌체로 향한 거야.”

“하. 복잡하네.”

“그렇지 저놈은 분명 미친놈이야. 항상 내 뒤를 따라다녀.”

복잡한 사연을 듣고 나니 다니엘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일단은 집중하자.”

“그래. 미안해.”

“괜찮아.”

예선전의 시작.

나와 다니엘은 가죽을 펼쳐 각자가 맡은 가방에 맞게 재단을 하기 시작했다.

정교하게 물결을 그리듯 구두칼을 그어갔다.

다행히 큰 실수 없이 완벽하고 깔끔하게 재단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가방에 사용할 부자재를 하나하나 순서대로 정리해갔다.

“아버지 바로 타공 치시고 바느질 시작해 주세요.”

“오냐.”

우리는 문제 없이 가방을 제작해 나갔다.

* * *

5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평가는 디자인 최종 시안, 가방의 완성도, 가방의 선호도, 활용도를 주로 볼 예정이다.

이렇게 정한 이유는 얼마나 정확하게 최종 시안을 만들 수 있는지.

고객들이 이 가방을 선호하고 사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지.

명품이라는 이름 아래 내구성을 갖추었는지를 판단하려는 듯 보였다.

그들은 디자인 시안 자체도 평가 대상이기에 가방이 완성되기 전에 점수와 순위를 매겨야 했다.

“선생님 브랜드 아리raM 가방 디자인 한번 보시겠어요.”

“아 벌써 봤어. 재밌는 디자인이긴 한데 평가하기가 좀 모호하던데.”

“역시 선생님 생각도 그러시죠. 흠…. 시안이 가방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거 같은데.”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근데 평가 기준이 있으니 점수를 매길 수밖에.”

“하.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선생님 잠시만요.”

디자이너 김선영은 한숨을 내리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페이퍼 한 장을 들고 중간에 앉아있는 협회장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세요?”

“그게요. 이 가방 시안으로만 평가하기가 좀 모호한 거 같은데. 가방 완성되면 평가하는 게 어떨까 해서요.”

“한번 보죠.”

협회장 안철호는 디자이너 김선영이 들고 온 시안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왜 하필 아리raM이야’

“그냥 규정대로 하시죠. 교수님이 무슨 생각이신지는 알겠는데. 괜히 또 말 나옵니다.”

“그놈의 규정은.”

“그놈의 규정이라니요. 말 가리세요. 혹시 아리raM 디자이너가 제자였습니까?”

“예전에 제자이긴 하죠. 근데 지금 질문은 심사위원으로서 드리는 겁니다. 엮지 마시죠.”

디자이너 김선영.

초대 패션 시장을 이끌어간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한국 최초로 개인 디자이너로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사람으로 현재 한국대 패션디자인학과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럼 심사위원의 권한으로 일시 정지 요청합니다. 디자이너의 설명을 듣고 평가하죠.”

“하…….”

안철호는 얼굴을 구기며 생각에 잠겼다.

심사위원 모두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그녀의 의견을 무시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 같지만 쉽게 대할 수 없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안철호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렇게 하시죠.”

“감사합니다.”

김선영은 사회자에게 다가가 작은 메모장을 건넸다.

* * *

“여러분 심사위원들에 특별한 요청으로 일시적으로 타임 스톱하겠습니다. 모두 진행 중인 작업을 멈춰주시고 손을 위로 올려 주세요.”

전형무의 말에 모두 작업을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 뭐야?!

― 하씨.

― 뭔데 갑자기 타임스톱이야!

― 재봉 중에 멈추라고 지랄이야.

파티션 사이에서 가죽공들이 불만을 쏟아냈다.

나도 마찬가지로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좋은 리듬과 흐름으로 작업속도가 올라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작업을 중지시킨 게 살짝 짜증이 났다.

그때. 한 여성이 마이크를 잡고 특이사항을 전달했다.

“디자이너들만 앞으로 나와주세요.”

그렇게 20명의 디자이너가 심사위원 앞으로 모여들었다.

가방을 제작하고 있던 디자이너들은 총 4명 남짓.

다른 디자이너들은 심사위원 뒤편에서 슬금슬금 다가왔다.

모두가 모이자 단발머리에 웨이브를 탄 중년의 여성이 마이크를 잡고 디자이너들에게 말을 이었다.

“모두 디자인에 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심사 중에 필요한 사항이니 최대한 자세하게 해주세요.”

모두 당황한 눈치다.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일인 듯 보였다.

‘뭐 이게 어렵다고.’

“아리raM 차진혁입니다.”

내 소개와 함께 설명을 시작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저는 클러치 느낌의 핸드백을 구상했습니다. 최종 시안을 보시면 가방의 앞부분을 말아서 여닫게 디자인했고 손잡이를 과감하게 없앴습니다.”

“그건 알겠는데. 포인트가 하나도 안 보이는데 의도한 겁니까 아니면 이게 다예요?”

“아리raM의 시크릿 백은 말 그대로 비밀스러운 걸 숨기고 싶은 여성을 표현한 가방입니다. 화려한 모습인 로고와 자개 공예를 나만 알 수 있게 숨겼고 깔끔하고 단아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가죽만을 외부로 노출했습니다.”

“와…….”

“하지만 원할 때는 이 비밀스러운 부분을 공개한다는 의미에서 여닫을 때마다 가장 화려한 부분이 나타납니다. 숨기고 있지만, 비밀스러운 그 공간에 최고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좋은 디자인 설명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설명이 끝이 나고 19명의 디자이너는 심사위원이 호명한 순서에 따라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중 말도 안 되는 설명을 이어가는 디자이너도 있었고 디자인한 가방에 대한 소견이 전혀 없는 사람도 존재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간혹 이런 방식이 고객에게 먹히긴 하지만 곧 없어질 거다.

한 번 쓰고 버리는 디자인에 불과하다.

‘한심하네.’

“예선전 속행하겠습니다. 모두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주세요.”

심사위원의 지시에 따라 모두 자신의 자리로 이동했고 전형무의 사회로 다시 예선전이 이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우리는 대부분 공정을 마무리해나갔다.

그런데 시간이 촉박한 건 매한가지다.

그때 다니엘이 가장 먼저 자신이 맡은 가방을 완성해 냈다.

“[마이 시크릿] 다 됐어.”

“고생했어. 바로 아버지 도와드려.”

“응.”

마이 시크릿 백은 40㎝의 핸드백보다 큰 크기의 헤비한 가방이다.

구조 자체가 간단한 가방으로 제작 시간이 많이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개 디자인을 숨겨야 하기에 소요시간이 증가했다.

그리고 현재 내가 만드는 메인 시크릿 백이 가장 복잡한 구조로 되어있었다.

“복잡하네. 하….”

그런 이유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있다.

나와 다니엘은 숨 쉴 틈도 없이 바느질에 집중했다.

“10분.”

“[러브 시크릿] 거의 다 돼 가.”

“나도.”

셋은 모든 기량을 쏟아냈다.

정신없이 바느질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덧 종료 시각이 다가왔다.

잘못하다가는 시간을 초과할지도 모르는 상황.

그때 사회자의 목소리가 우리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5분!”

집중하자.

나는 더욱 속도를 올렸다.

이제 마감 작업만 하면 가방이 완성된다.

1분!

마지막 화룡점정.

장인이 만든 로고를 가방이 덮는 앞부분에 부착했다.

“다 했다.”

내가 먼저 가방을 완성하고 전시 테이블에 메인 시크릿 백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아버지와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아직이야? 다니엘!”

“다 됐어. 조용히 해! 집중 안 돼.”

그 순간 전형무의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10초 남았습니다. 9, 8, 7, 6….”

“끝! 끝났어!”

마지막 5초를 남겨놓고 다니엘이 다급히 가방을 들고 전시대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가방을 올려두고 크게 외쳤다.

“세이브다.”

“고생했어. 아버지도 고생하셨고요.”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3가지의 시크릿 백 시리즈를 바라보았다.

메인 시크릿 백, 러브 시크릿, 마이 시크릿.

여성이 숨기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표현한 메인 시크릿 백과 사랑 그리고 나 자신까지 숨기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마음을 녹여낸 가방이 완성되었다.

“모두 장내에서 나가 주십시오. 1차 예선은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결과는 2주 후 발표될 예정이며 현재 올려진 가방 상태 그대로 메인 1관 앞에 전시될 예정입니다.”

1차 예선은 방송을 통한 ARS, 패션위크 기간 관람객 오프라인 투표, 그리고 심사위원 투표로 나누어져 있다.

“끝이네. 가자.”

사회자의 설명이 끝이 나고 관계자들을 제외한 디자이너와 가죽공들은 2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얼마 뒤.

아리raM에 축복 같은 일이 벌어졌다.

경연대회 [가방] 3.

* * *

대회를 치르는 공간에서 나는 신비한 힘에 이끌려 어디론가 향했다.

커다란 세트장.

그 뒤편에서 은은하고 따뜻한 공기가 느껴졌다.

“불안하게 또 이러네.”

점점 신비한 힘에 의지하는 내 모습에 불쾌한 감정이 자라났다.

의지라기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한 궁금증과 불안감이 공존했다.

나는 천천히 무대 뒤편으로 이동했다.

복잡한 전선들이 꼬여 있었고 세트를 설치하다 만 나무 합판들이 널브러져 있을 뿐.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잘못짚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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