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200)

신지혜의 말에 나는 이들의 의중을 지레짐작할 수 있었다.

‘오트 쿠튀르 가입이 목적인 거 같네.’

오트 쿠튀르의 까다로운 가입조건.

파리 소재의 디자이너작업실이 있어야 하고 20명 이상의 팀원들이 존재해야 한다.

매년 총괄 디자이너가 제작한 맞춤복을 75점 이상 컬렉션에 올려야 한다.

‘나쁘지 않다. 아니 너무 좋은 조건이야.’

정말 탐나는 상품 파리진출 지원.

오트 쿠튀르 가입조건에 맞춘 지원이라면 엄청난 돈을 지원한다는 소리다.

나라에서 밀어준다는 건 확실한 명분과 가치관을 가질 수 있다.

나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정말 명품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일지도 몰랐다.

“여러 패션 기업 브랜드와 경합해야 할 겁니다. 저는 안 했으면 해요.”

“이유는요?”

우리같이 상장하지 않은 브랜드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이지만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지도 모른다.

명품도 여러 급이 나뉘고 우리는 프리미엄 브랜드로 자리 잡으려 노력 중이다.

한데 그보다 낮은 급의 브랜드에 밀리게 된다면 위험한 늪에 빠져들 게 뻔하다.

신지혜는 리스크를 줄이고 싶은 듯 보였다.

“리스크요.”

“역시….”

내 예상처럼 그녀는 위험한 리스크를 조목조목 나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내 의견은 다르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다.

도박 없이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참여해야겠어요. 위험한 만큼 성과가 있을 거예요.”

“…….”

“문제없죠?”

“네 그럼요. 사장님 믿고 일하는 건데요.”

“감사합니다.”

* * *

나는 올해 1월 말에 파리에서 열린 오트 쿠튀르에 대한 디자인을 세부적으로 확인했다.

“뭐야?!”

샤네르의 컬렉션을 보다 새롭게 고용된 디자이너의 인터뷰를 발견했다.

그런데 다음 장을 넘기니 버젓이 내 디자인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작년까지 내가 준비한 샤네르의 오트 쿠튀르 디자인이 다른 디자이너의 이름으로 컬렉션에 올랐다.

“내가 없으니까 장난질을 쳐?!”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그런데 샤네르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 같다.

“그러고 보니. 화낼 게 아니지. 내 잘못이 큰 건가….”

이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1년에 2회 그러니 75종 이상 맞춤복을 컬렉션에 선보여야 하는데 내가 갑자기 죽어버렸으니 브랜드 입장에서도 당황스러웠을 거다.

시기상 새롭게 고용된 총괄 디자이너가 디자인할 시간도 부족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건가. 아니 이름은 내 이름으로 해도 되잖아. 이것들이!”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긴 한데 짜증이 났다.

나는 화면에 비치는 샤네르의 정보를 전체선택해 휴지통으로 삭제해버렸다.

계속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지 않다.

“다올은 여전하네. 디자인 돌려막기냐.”

내가 한참 자료를 보는 그때.

DDP 회의에 참석했던 신지혜가 사무실로 복귀했다.

“잘 다녀왔어요? 회의는 어땠어요.”

“뭐 그냥저냥. 근데 같은 그룹의 브랜드가 대거 참여했더라고요. 그 외에는 개인 디자이너들이고.”

“그래요. 뭐 이상한 건 아니니.”

“그렇죠. 일단 일정표부터 확인하세요.”

신지혜는 바쁜 나를 대신해 한국 오트 쿠튀르 패션 대회.

대회 참여 브랜드 회의에 다녀왔다.

“일정이 빡빡하네요.”

“서울 패션위크가 끝나는 3월 마지막 주예요. 1차는 가방 디자인&제작 그리고 1차를 통과한 브랜드만 2차 의류 디자인&제작 그리고 마지막 컬렉션이에요.”

“이 조건은 뭐죠? 컬렉션 장소는 브랜드가 정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심사하기 힘들 텐데.”

“최종 컬렉션 브랜드 3팀. 심사위원들은 영상으로 심사 할거래요. 국민투표도 할 예정이라고요.”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전국에 아리raM을 알릴 좋은 기회다.

“준비 기간 2달. 그것도 가방 디자인 3가지랑 맞춤복 20가지라.”

“다른 브랜드 관계자들도 놀라는 눈치긴 한데. 사장님 이건 정말 제가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의류 디자인도 그렇고 오트 쿠튀르는 다 손바느질일 텐데 시간이….”

“걱정하지 마세요. 둘 다 제가 할 겁니다. 2달이면 충분해요.”

“정말이요?!”

“네, 뭐 제가 리스트 작성해줄 테니 장비만 넣어주세요.”

“장비라….”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작업실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현재 공방은 이동하는 곳을 제외하고 공간이 없다.

다니엘의 부탁으로 가죽용 재봉틀도 들어가 있었고 밀려드는 주문 탓에 여러 가지 가죽이 산처럼 쌓여 있는 신세였다.

“공방이 아니라 이제 공장을 알아봐야겠는데요.”

“하…. 알아볼게요. 건물을 알아봐야 할 거 같은데.”

“일단은 건물로 알아봐 주세요. 금액이 부족하면 법인대출도 생각해주세요.”

“하…. 네. 할 게 정말 태산이네요.”

“그러니까 직원 구하라니까.”

나는 1달이 넘어가는 시점에 신지혜에게 직원을 구하라 일러두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감감무소식이다.

“구하고는 있는 거예요?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시려고. 광고랑 잡지사 미팅에 장하나 씨 관리, 재고, 전산 또 뭐야. 혼자 다 가능한 게 신기하네요.”

“그러게요. 일복이 터져서.”

처음 시작할 때야 혼자서 모든 게 가능했겠지만 단 두 달 사이에 많은 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녀의 본업은 총괄디렉터다.

컬렉션과 매장, 영업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하는데 회사를 위해 다른 일에 에너지를 소비했다.

“마음에 드는 애들이 없어요.”

“적당하면 뽑아서 가르치면 되죠.”

“일단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직은 괜찮아요.”

“이런 거 보면 미련하시다니까.”

“욕심이에요. 그래서 오늘 장하나 씨는 모델 엔터테인먼트 소개했어요. 제가 매번 관리하기 힘들기도 하고.”

“어딜?!”

“사장님도 아시는 데에요. HH 에이전시라고 하율이 언니가 운영하는 곳인데.”

“아……. 그분.”

“아시죠. 그 까칠 마녀.”

“까칠 마녀요? 엄청 다정하던데.”

“여우라서 그래요. 저한테는 까칠해요.”

“그렇구나. 장하나 씨는 그래서 계약한대요?”

“네 내일이나 계약한다고 하네요. 그쪽에서도 환영하는 분위기더라고요. 하율이 언니 쪽도 사정 다 알아서 저희 계약조건 다 받아들이고 계약하기로 했어요.”

“잘됐네요.”

대한민국 탑 모델 한하율.

회사 소속의 모델을 챙기는 모습을 보며 정말 감동했기에 그녀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거 같다.

“컬렉션 하기 전에 직원들 다 구할게요. 장소를 저희가 정하는 거면 무대 콘셉트와 콘티도 브랜드에 맡기는 거 같아서요.”

“네 최대한 편의 봐 드릴 테니까. 빨리 구하세요.”

나는 신지혜에게 몇 가지 사항을 전달하고 공방으로 몸을 돌렸다.

“아버지 저랑 커피 한잔해요.”

“응?! 무슨 일이냐? 요것만 해놓고 한잔하자.”

다니엘도 귀를 쫑긋하더니 서서히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넌 일해야지.”

“이 악덕 사장 놈!”

“농땡이 직원이. 너 아까 점심 먹는다고 두 시간 동안 사라진 거 누가 모를 줄 아냐.”

“여기 없었는데 어떻게 알았어.”

“비밀이야.”

“그놈의 비밀은….”

사실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었다.

시간이 지났는데 다니엘이 안 나타난다고 걱정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놈은 분명히 이 앞에 카페에서 죽치고 나를 피해 다녔을 것이다.

근래 물량이 너무 밀려 혹독하게 일을 시킨 부작용인 듯 자주 사라지곤 했다.

미안한 마음에 장난을 쳤지만, 다니엘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기분이다. 너도 가자.”

“오예! 이 앞에 카페 가자. 아르바이트생 진짜 이쁘더라.”

“오호라 그래서 죽치고 계셨구먼.”

.

.

.

우리 셋은 근처 카페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에게 말을 이었다.

“아버지 공방 이전 어떻게 생각하세요?”

“흠….”

아버지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공방이 좁기는 하지 직원도 더 늘려야 할 테고.”

“네. 지금 기계들로 가득 차서 작업에 효율도 떨어지고 관리가 안 돼요.”

오트 쿠튀르에 출품할 옷들은 내가 직접 하기에 큰 공간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가죽 공정을 증설할 필요가 있었고 차후에 기성복 라인을 구축할 필요가 있기에 미룰 수 없는 상황이다.

“네가 옮겨야겠다면 그렇게 해라. 이 가게야 내가 취미 삼아 들락날락하면 되는 곳이니.”

“네. 가게는 그대로 보존할 거예요. 아버지 개인 사무실로 쓰셔도 돼요.”

다행이다.

아버지가 서운해하실까 봐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무덤덤하게 받아들이셨다.

* * *

1차 예선을 치르려면 새로운 가방 디자인 3가지가 필요하다.

나는 이번에는 예전에 만들어 놓았던 가방 디자인을 사용하기로 했다.

혼자서 의류 디자인까지 해야 하기에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이제 변형만 시키면 되겠는데.”

나는 생각해둔 디자인 세 가지를 그려나갔다.

수만 번 고민 끝에 완성해둔 디자인이기에 기억을 더듬기만 하면 그려내는 건 일도 아니다.

그때 사무실의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네 아리raM이죠.”

“네.”

“여기는 패션위크 담당 부서인데요. 프로젝트 변경사항 때문에 연락드렸어요.”

“네?!”

“정확한 사항은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그럼 먼저 끊겠습니다.”

때마침 점심을 먹고 신지혜와 다니엘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디렉터님 메일 좀 확인해주세요.”

“메일이요?”

“패션위크 담당자한테 전화가 왔거든요. 변경사항 있다고.”

“네 바로 알려드릴게요.”

신지혜는 마시고 있던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두고 컴퓨터로 향했다.

그리고 다니엘이 내 옆으로 다가와 스케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뭐야 벌써 다 한 거야?”

“아직 완성본 아니야.”

“미친 거지 너?! 미친 사람 중에 천재들이 많데.”

“미친놈한테 욕 한번 들어볼래?”

“사양할게. 근데 진짜 이걸 밥 먹고 오는 시간에 다 만들었다고? 3개나!”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신 디렉터. 이쪽으로 와봐. 사장 놈 가방 디자인 벌써 다 만들어가.”

신지혜는 종이 서류 한 장을 들고 놀라면서 뛰어왔다.

“벌써요?”

신지혜는 서류를 확인하지도 않고 내가 스케치한 가방 디자인을 구경하고 있다.

“미친……!”

“맞지. 나만 이런 반응이 아니라니까. 이걸 한 시간도 안 걸려서 만들었다고 누가 믿어.”

안 믿으면 어쩔 거냐.

사실 최소 2달은 걸려서 만든 디자인이다.

깔끔하면서도 트렌디한 가방이다.

내 개인 브랜드로 쓸 가방 디자인이었다.

“그럼 이걸로 제작하실 거예요.”

“아직입니다. 이 가방이 우리 브랜드를 떠올리게 더 수정해야죠.”

“아…. 기대되네요. 아 그리고 여기요. 변경사항.”

신지혜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나에게 전달했다.

나는 천천히 변경된 사항을 읽어 나갔다.

“…젠장!”

“무슨 일이에요?”

경연대회 [가방] 1.

* * *

담배를 물고 연기를 뿜어내며 YK어패럴 송원일 사장이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있다.

상대는 패션디자인협회 안철호 협회장으로 분위기가 썩 좋지 않다.

“아리raM 이 브랜드는 뭔데 갑자기 끼어들어?”

“그러니까….”

“뭔데 이런 쓰레기 같은 브랜드도 참여시켜? 내가 우리 쪽 브랜드랑 추천하는 디자이너들만 집어넣으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사장님. 총감독, 이 새끼가 시키지 않은 일을 해버려서.”

“당신 일하기 싫어? 돈을 받았으면 그 값은 해야 할 거 아니야.”

“면목 없습니다. 갑자기 고문까지 끼어드는 바람에.”

“그게 변명이야?”

“죄송합니다.”

서울시, 패션디자인협회, DDP로 구성된 패션 시장 성장 프로젝트.

이 3개의 기관에서 협회장의 힘이 가장 강하게 작용한다.

서울시 공무원들은 갑작스러운 일에 귀찮아했고 모든 걸 패션디자인 협회에 일임했다.

그리고 DDP는 협회나 마찬가지기에 모든 최종선택은 안철호의 결재가 이루어진다.

“아리raM 뭐 만드는 데야?”

“대한민국의 무형문화재와 협업을 진행하면서 성장해 나가는 가방 회사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아직 작은 규모의 사업체인지라 큰 타격 없을 겁니다.”

“이봐요 안철호 씨. 내가 지금 그걸 걱정해.”

“그럼?”

“이딴 놈들 끼어들면 이겨도 낮게 보일 거 아니야. 정말 만일이지만 우승하면 어쩔 거야?”

“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심사위원평가 비율이 높으니 제가 막을 겁니다.”

현재 송원일은 대외적인 성과가 필요했다.

그런 이유에 서울시가 주최하는 이번 컬렉션에 꽤 큰 금액을 지출하고 있었다.

돈이면 디자이너와 브랜드를 키울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방법을 싫어했다.

장기적인 성과 말고 즉흥적으로 보이는 성과가 필요했기에.

송원일은 YK그룹의 차남으로 경영서열로는 두 번째였지만 실상은 동생 둘에게도 밀려있는 상태다.

“그때 그 사고만 아니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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