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200)

패션업계의 사람들 모두 그녀를 어려워했고 깍듯하게 대했다.

그녀는 현재 패션협회 고문을 겸하고 있었고 아리raM의 장인들과 같은 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針線匠)이신 박주선 선생님이셨다.

모두가 다시 숨을 죽이며 회의를 이어나갔다.

“이번 대회는 한국 패션의 큰 발전에 이바지할 겁니다. 모두 최선을 다해주세요.”

서울시가 큰 예산을 들여서 하는 프로젝트.

국내의 패션 시장 규모는 현재 45조 원이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 그리고 중국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한 수치.

서울시와 패션협회는 이 간격을 줄이기 위해 차세대 브랜드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내놓았다.

* * *

다니엘과 난, 신지혜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듣고 반성했다.

신지혜가 우리에게 돌발적인 행동을 하지 않기로 다짐을 받아내고 일은 일단락됐다.

총괄 크리에이터 디렉터의 고충을 알고 있기에 우리 둘은 군말 없이 잔소리를 받아냈다.

“사장님 생각은 어때요?”

“흠…. 리미티드 에디션 말씀이시죠? 저는 나전칠기 액세서리를 제작하는 게 어떨까 하는데.”

“나쁘지 않기는 한데. 신영길 선생님 쪽도 바쁠 텐데요. 저희 물량 맞추기도 빠듯할 거예요.”

“그건 문제없을 거 같습니다. 선생님이 직계제자분들 합류했다는 소식 들었거든요. 품질은 선생님이 보장하신다고 하시네요.”

“벌써 물어보신 거예요?”

“네.”

“그럼 공지부터 해야겠어요. 지금 난리라 진정시킬 필요가 있을 거 같네요.”

“품목부터 정하시죠.”

“사장님 혹시 여성들이 가장 필요한 아이템이 뭔지 아세요?”

그녀의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야 가방이나 액세서리 일부 사치품이겠죠?”

“땡!”

“그럼?”

“보석함이에요. 자신의 귀중한 액세서리를 아름다운 곳에 보관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그럼.”

“보석함으로 해보는 게 어떨까 하는데.”

남자인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신지혜가 알려주었다.

나는 좋은 아이디어라며 그녀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디자인은 제가 할게요.”

“당연하죠. 사장님 실력이면 분명 아름다운 보석함이 탄생하겠네요.”

“그래야죠. 노력해볼게요.”

“그럼 저는 필요자료랑 보석함 제작 업체 좀 알아볼게요.”

다니엘은 다시 가방 작업으로 돌아갔고 나는 사무실에 앉아 스케치를 시작했다.

기본 뼈대를 만들기 위한 디자인이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흠 보석함 디자인은 처음이네. 아리raM스러운 보석함을 만들어야 하는데.”

나는 보편적인 모형의 보석함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브랜드 이미지가 묻어나게 고객이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순간마다 아리raM을 생각하게 만들고 싶었다.

어느 정도 뼈대 스케치가 마무리될 때쯤.

신지혜가 내 자리로 다가왔다.

“잘돼 가세요?”

“처음 하는 거라 아직 모르겠네요.”

내 말에 신지혜가 두꺼운 서류뭉치를 내게 내밀었다.

“제가 보기에 나쁘지 않은 보석함 추려봤어요. 브랜드별로 추린 거니까 보기 편하실 거예요.”

자료에는 나전칠기로 만들어진 여러 보석함도 포함되어있었다.

“모두 위로 여닫는 방식이네. 흠….”

신지혜가 찾아준 방식은 모두 상단을 여닫는 방식이다.

내가 보기에 너무 평범했다.

외관상으로는 장식 덕분에 아름다울지 모르나 내부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나는 문득 온리 원 백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보석함에 스트랩을 붙이면 어떨까?”

생각이 뇌리에 스치는 순간.

나는 빠르게 손을 움직여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긴 육각 모양의 기본 틀에 뒤에서부터 양쪽으로 스트랩을 그려나갔다.

“스트랩을 고정하려면 고정핀 장식도 필요하겠는데.”

나는 정교하게 그림을 그려나갔다.

보석함 전체를 두른 양쪽 스트랩을 잡아주는 고정핀을 넣었고 스트랩을 잠금 할 수 있는 잠금장치도 금장식을 집어넣어 마무리했다.

“보석함 전체는 옻을 칠해 흑단으로 가면 좋겠는데.”

옻칠로 만들어진 흑단은 깔끔하면서 고급스러움을 자아낼 것이다.

그리고 금장식과 합쳐진다면 정말 아름다울 거 같았다.

나는 외형의 스케치를 모두 마무리해 나갔다.

마지막으로 자와 펜을 들고 정중앙을 일자로 과감하게 그었다.

내가 생각한 아리raM의 보석함은 양쪽으로 잡아당기면 내부 전체가 한 번에 열리는 슬라이드 형식이다.

내부 장식에는 보관함 바닥 전체에 아름다운 자개 공예를 넣을 생각이다.

내가 스케치를 마무리하고 펜을 책상에 내려놓자.

‘또 시작이네.’

그때 마침 옅은 밝은 빛이 은은하게 스케치를 마친 종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눈이 감길 정도의 광량은 아니지만, 이 은은한 빛이 내 마음을 눈 녹이듯 따뜻하게 만들었다.

“완성이다.”

나는 이 은은한 빛이 마음에 들었다.

온리 원 백을 더욱 돋보이게 해 줄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완성된 보석함 디자인을 신지혜에게 들고 갔다.

“다 됐는데 한번 봐주겠어요.”

“벌써요?”

“네.”

신지혜는 내 디자인을 받아들고 화들짝 놀랐다.

“역시 사장님……. 디자인 천재네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진짜 이런 보석함 본적이 없어요. 정말 리미티드하고 고급스럽네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내부도…. 와. 생각지도 못했어요. 이런 디자인이면 업체로는 안될 거 같은데…. 흠 신영길 선생님께 따로 보여드려야겠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오랜만에 선생님도 뵐 겸 같이 갔다 오시죠.”

“네 그래요.”

나는 다니엘에게 양해를 구하고 신지혜와 함께 경기도 광주로 이동했다.

근데 자동차 방향이 달랐다.

“저쪽으로 가야죠.”

“아 아니에요. 작업실은 다른 곳에 계세요.”

신지혜는 선생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다.

“어떻게 아신 거예요. 작업실 다른 데 있는 건?”

“한 번씩 선생님 말동무해드리러 가거든요. 요새는 바빠서 못 오긴 했는데.”

그녀는 적적한 신영길을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아오는 듯했다.

신지혜는 누군가를 위해 화내주고 또 어떤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감사한 마음을 표현해주고 싶었다.

“정말 따뜻하신 분이네요.”

“네?!”

“아니에요. 운전하세요.”

“싱거우시긴.”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이동해 커다란 한옥 앞에 멈춰 섰다.

나와 신지혜가 마당에 들어서자.

자개의 원료가 되는 전복 껍질이 산처럼 쌓여있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종류의 반짝이는 물질들이 한가득 놓여있었다.

“왔는가.”

“예, 선생님 건강하셨죠.”

“그럼. 차 사장이랑 지혜 덕에 항상 건강하지.”

다행히 예전처럼 슬퍼하는 표정이 많이 사그라든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우리는 선생님이 준비한 다과를 즐기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제자분들 이렇게나 많으셨어요.”

“뭐…. 이번 일 있고 한 명 두 명 다시 불렀어. 내가 이놈들 먹여 살릴 자신이 없어서 내친 거지 다들 솜씨 하나는 끝장나.”

“그래 보여요.”

다과를 즐기는 반대편 작업실에는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이 아리raM의 로고와 가방에 들어가는 장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바쁜데 여기까지는 웬일이야 전화로 하지.”

“선생님 저 안 보고 싶었어요?”

“어휴…. 넌 시집이나 좀 가라.”

“또 실없는 소리 하신다.”

“하여튼 여기까지 왜 왔어?”

둘의 대화가 정말 따뜻한 모녀지간 같았다.

그러고 보니.

신지혜의 정보를 나는 잘 알지 못했다.

브랜드 Han 시절 신지혜의 가족에 대한 정보만이 빠져 있었다.

점점 궁금증만 깊어져 갔다.

나는 생각을 잠시 멈추고 신영길의 질문에 답했다.

“저희가 한정판으로 세트 상품을 기획했는데요 한번 봐주시겠어요.”

나는 준비한 도안을 신영길에게 건넸다.

“보자.”

한참을 뚫어지게 보시더니.

“좋네! 이렇게 만들면 된다는 거지?”

“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우리 일인데. 본사가 잘돼야 우리가 잘되는 거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감사하죠. 그리고 수량은 101개로 해주세요.”

“알겠네. 한 달은 걸릴 거 같으니까 완성되면 연락하겠네.”

금장식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든 걸 신영길 선생님이 전담해 주시기로 했다.

무한한 배려로 나는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리raM의 첫 번째 리미티드 에디션 발매일이 되었다.

“현재까지 추첨 인원 2만 명 돌파했어요.”

“수량 101개인데 2만 명이요?”

“리미티드 에디션이고 극소량이라 리셀러들도 붙은 거 같아요.”

“리셀러라…. 좋다고 해야 하나.”

“좋은 거죠. 완전 대성공인데요.”

추첨에 당첨되지 못한 수요자 중 기성품을 구매하는 예도 발생했다.

한정판 출시 덕분에 플라세보 효과를 누리게 되었다.

한정 수량 101개로 특별히 추첨을 통해 구매자를 결정하기로 하였고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아리raM 공방에서 직접 받게 했다.

우리는 찾아주신 고객분들에게 작은 선물로 차기에 출시되는 신상품 우선구매 혜택도 부여하기로 했다.

신지혜의 마케팅 전략이었지만 모두가 동의했다.

나는 아리raM 사무실을 가기 위해 골목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전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뭐야?!”

이른 아침.

조용했던 가죽 시장에 오늘따라 많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한번 코너를 돌아서자.

리미티드 에디션 당첨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분명 10시 이후에 불출한다고 공지했는데.”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공방으로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지금 들어가는 순간.

이 많은 사람이 가게 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거 같았다.

“하…. 조금 있다 와야지.”

그렇게 나는 근처 편의점으로 발을 옮겼다.

뜻밖의 손님.

* * *

리미티드 에디션 판매를 성황리에 마무리했다.

총 판매금액 3억 2천만 원으로 단기간에 엄청난 성과를 냈다.

손실 가죽이었기에 순이익이 높은 점도 긍정적인 부분이다.

“회식 한번 해야겠는데요.”

“좋죠. 장인분들 연락 다 해 주시고 지방에 사시는 분들은 금일봉으로 지급해주세요.”

“네, 사장님.”

모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 주고 있었다.

나도 가방 작업을 위해 사무실을 빠져나오는 그때.

밖에서 모르는 사람들 10명 남짓이 공방 안을 바라보며 기웃거리고 있었다.

“뭐지?”

아리raM을 오픈하는 날로 간판과 현판 모두를 바꾼 상태였고 전시장도 모두 없애버린 상태다.

누군가가 찾아올 일은 드물다.

그리고 저렇게 힐끔힐끔 보고 있으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밖에 모르는 사람들 기웃거리는데 아는 분이세요?”

일단은 아버지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오래 이 자리를 지킨 아버지이기에 손님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찾아올 사람 없는데.”

아버지는 하던 작업을 멈추고 내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셨다.

“누군데 그래…. 어!”

“왜요? 아시는 분들이세요.”

“하….”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남기고 작업 앞치마를 벗으셨다.

“밖에서 뭐 하는 거야. 그냥 들어오지.”

아버지는 걱정이 담긴 혼잣말을 던지고는 공방 문을 활짝 열었다.

밖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그들을 한자리에 모으셨다.

“뭐 한다고 밖에 있어요. 다들 들어와요.”

“그래도 되겠나.”

“그럼요. 어서 들어오세요.”

아버지는 훈훈한 인상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버지 옆에 다가가 조용히 질문했다.

“누구예요?”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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