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200)

“전속은 무리입니다. 이중계약이 될 수도 있어요. 아직 계약파기가 안 된 상태라서.”

“저희도 유념하고 있어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하…. 그게 문제가 많아서.”

안현수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만약 온전한 기획사에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다.

인지도는 있지만, 이미지가 구축되어 있지 않은 신인인 장하나를 가방 브랜드의 메인 모델로 써준다는데 누가 이 좋은 기회를 잡지 않겠는가.

하지만 둘의 입장이 지금 어려우니 선뜻 답을 못하는 듯했다.

“저희도 신생브랜드입니다. 그러니 부담 없이 말하세요. 장하나 씨 생각은 어때요?”

한참을 머뭇거리다 장하나가 답했다.

“……저는 좋아요.”

하고 싶지만, 결정을 못 하는 둘을 지켜보니 내가 다 답답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그들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계약금 2억에 2년 메인 모델로 활동해주세요. 그리고 현재 소송 건에 대해 말해주세요. 어떻게 흘러가는지.”

“2억이요?”

보통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고 인지도를 가진 연예인이 받는 금액이다.

하지만 현재 이들의 마음을 한 번에 사로잡을 방법이 돈이라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근데 2년이면 사장님 쪽에서 안 좋은 거 아니신가요?”

“남 걱정할 때입니까?”

안현수는 덩치랑 생긴 외모만 험악할 뿐이지 마음은 여린 사람 같아 보였다.

어떻게 장하나를 데리고 기획사를 나온 것인지 용기가 가상했다.

“사고 안 치는 조건입니다. 우리 브랜드에 피해가 오지 않게만 해주세요.”

“물론입니다. 저희 하나 정말 착합니다.”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현재 진행된 사건에 대해 알려주세요.”

“그게….”

안현수는 생각을 더듬으며 이때까지 있었던 사건을 조목조목 늘어놓았다.

“하나는 처음에 배우를 시키려고 제가 데리고 온 애입니다. 제가 길거리에서 스카우트했고요.”

“근데 왜 인플루언서가 된 거죠? 형태가 아예 다른데.”

“데뷔 전에 인지도를 쌓으려고 시작했습니다.”

인지도를 쌓기에는 개인이 할 수 있는 방법 중 인스타만 한 게 없기는 하다.

문제는 이후부터라며 그가 말을 이었다.

“예상 밖에 하나의 팔로우 수가 급격히 상승했어요. 그러면서 각종 광고가 따라서 들어왔고. 사장은 그게 돈이 되는지 알게 된 거죠. 이후로 하나의 아이디는 소속사로 넘어갔고요.”

“그럼 현재는 아이디를 회사에서 사용하겠네요?”

“그렇죠. 현재는 그래요. 그런데 본인이 아니면 삭제할 수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죠. 소송이 끝나면 돌려받겠지만 기약 없는 싸움이라.”

“그래서 아까 고민하셨구나.”

“네. 괜히 하나를 메인 모델로 쓴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안현수를 다시 봤다.

급한 성격에 능력이 없는 순둥이로만 봤는데 나쁘지 않은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맞아요. 계약 조건에 인스타에 브랜드 DP 광고를 넣을 생각이니까.”

“그렇겠죠.”

“근데 기획사는 왜 나온 거예요?”

“그게….”

안현수는 옆을 쳐다보며 장하나를 바라봤다.

장하나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인에게는 숨기고 싶은 비밀인 듯 보였다.

“혹시 잡지 중에 스팍이라고 알고 계시는가요?”

“스팍요? 저는 잘.”

내가 말을 흘리자.

신지혜가 큰소리를 내며 나섰다.

“스팍이요? 거길 장하나 씨를 쓴다는 거예요? 미친….”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된 거죠. 하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니었어요. 스팍을 가장한 변태 같은 놈들의 개인 촬영이었습니다. 그걸 하나에게 시키려 했어요.”

“할 말이 없네. 근데 당신은 왜 안 말렸어요! 촬영장 가서 이상하면 바로 나왔어야지.”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판단력이 흐려졌습니다. 저도 설마설마했는데. 하나가 의상을 갈아입고 나오는데 그때야 잘못을 깨닫고 하나를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같은 여자로서 치욕스러운 순간인 듯.

신지혜가 안현수를 몰아세웠다.

“배우를 시켜준다고 한 사람이 스팍 촬영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하 당신도 똑같은 사람이야!”

“죄송합니다.”

내가 신지혜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흥분을 좀 가라앉히라는 의미였지만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했다.

‘스팍이 뭐길래. 이러는 거야?’

“디렉터님 스팍이 뭐예요?”

“19세 잡지에요. 맥스 같은 스타들이 나오는 섹시 잡지가 아니라 그냥 완전 포르노 같은 잡지에요.”

“네?! 근데 그것보다 더 심한 게 있어요?”

“그렇다네요. 더러운 새끼들!”

한참 동안 씩씩거리던 신지혜가 안현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계속 말해봐요.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예요?”

“더 있다가는 정말 큰일 생길 거 같아서요. 기획사에서 도망쳤습니다. 그 뒤로는 모두 알고 계신 대로입니다. 아…. 문자로 소송 취하랑 계약파기 조건으로 5억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너무 터무니가 없어서.”

안현수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우리에게 내밀며 문자 내용을 확인시켜 주었다.

“5억?!”

“네 소송이라는 게 짧으면 1년 길게는 3년 정도 시간이 걸리니까. 기획사에서도 귀찮은 일 안 만들려는 거죠. 우리가 모르는 구린 구석도 있는 거 같고.”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

둘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BB 엔터테인먼트는 장하나가 돈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일부러 터무니없는 돈을 요구하고 있다.

‘이걸 어쩐다.’

그때였다.

장하나 3

* * *

우리 앞에 불청객이 다가왔다.

“이게 누구야 은혜도 모르는 것들 아니야!”

“대표님….”

근데 이놈이 어떻게 여기에 올 수 있었을까?

순간 굳어버린 안현수의 얼굴을 봤다.

‘이놈이구나.’

초조했는지 자기 손을 매만지고 있었고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안현수 씨 짓인가요?”

“……제가 경솔했습니다. 송 대표님이 아무 조건 없이 하나 배우 데뷔랑이때까지 일 묻어주신다고 해서 정말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장하나는 무슨 소리냐며 안현수를 바라봤다.

내 옆에 있던 신디렉터도 혀를 차며 그에게 말을 이었다.

“경솔하셨네요.”

“죄송합니다. 근데 저는 하나를 위해서 한 행동이었습니다.”

신지혜는 쓴소리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 사람은 장하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었다.

현재 장하나의 독소조항에 대한 계약파기는 무조건 그녀에게 큰 부담이었을 테고 내가 내민 조건을 못 들은 상태에서 송태섭의 조건에 흔들렸을 거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둔 것일 뿐 나쁜 의도로 보이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매니저 오빠가 제가 걱정돼서 그랬나 봐요.”

장하나는 바닥을 바라보며 우리를 향해 사과했다.

이때까지 이끌어준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이다.

그의 선택을 존중하는 듯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짝다리를 짚고 상황을 주시하는 송명태에게 말을 이었다.

“안녕하세요. 아리raM 대표 차진혁이라고 합니다.”

“아리람? 그건 또 뭐야 신생 기획사야 뭐야.”

“패션 브랜드입니다. 현재 장하나 씨랑 계약하려던 참입니다. 그러니 가던 길 가시죠.”

나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현재 장하나 쪽이 훨씬 불리한 입장에서 상대를 자극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계속 상황을 악화시킨다면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가라고?! 네가 뭔데 가라 마라야! 하나 아직 우리 소속이야. 브랜드계약 못 해 알겠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방법이 있죠.”

“다른 방법?”

“5억 제가 드리겠습니다. 계약파기 하시죠.”

“……그렇게는 못 하지.”

안현수에게 들은 액수를 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송영태는 이를 거부했다.

내가 순순히 준다고 하니 더 큰 욕심이 생긴 듯 눈이 반짝였다.

‘속일 뻔한 새끼네 이런 놈이 이 바닥에서 오래도 버텼네.’

“못 하시면 어쩔 수 없죠. 법적 소송 준비하죠. 그리고 그쪽 회사 먼지 하나 안 나오나 털어보겠습니다.”

나는 또박또박 그의 뇌에 정확히 내 목소리를 박아 넣었다.

나름의 협박이었다.

5억 원이라는 돈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송영태는 나를 잘 모르기에 더 고민할 수밖에 없을 거다.

“빨리 선택하시죠. 우리도 바쁜데.”

“……하 미치겠네.”

머리가 복잡할 거다.

괜히 안 쓰던 머리 굴렸다가 정말 내가 한 말처럼 회사의 치부가 털리면 큰 손해가 날 터였다.

“좋아. 그렇게 하지. 이런 유명하지도 않은 애한테 5억이나 쓰다니 멍청하긴.”

“잔말 말고 계약서 준비해서 이쪽으로 연락 주시죠.”

“그래. 그럼 좋은 시간 보내라고.”

송영태가 빠져나가고 송하나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쩌시려고….”

“걱정하지 마세요. 빌려드린 겁니다. 부담 가지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정말 열심히 할게요.”

“네, 그래 주세요.”

다시 돈을 돌려받을 생각은 없다.

그녀가 해주어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준다면 그보다 더 큰 경제적 이득으로 돌아올 테니까.

안현수는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 안 잊겠습니다. 빌려주신 돈은 최선을 다해 갚겠습니다.”

“네, 뭐 그러세요.”

갑자기 신지혜도 나를 빤히 바라보며 엄지를 스르르 추어올렸다.

“멋있어서요.”

“멋지긴요. 홧김에 질러버렸네요.”

“근데…. 5억 있어요? 이번에 장비랑 가죽 원단값도 상당했는데.”

“빠듯하긴 한데 그 정도는 될 거 같네요.”

사실 5억을 내고도 2억은 더 남을 거 같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보증사건 당시 부모님은 내 통장에서 일부 금액만 빌려 가셨다.

어머니가 내 결혼자금으로 평생을 모아놓은 돈이 있었다.

그 돈과 내 일부 금액을 합쳐 보증 대출을 해결했다.

“미안해 아들. 결혼할 때 주려고 했던 걸 우리가 써버렸네.”

“뭐가 미안해요. 잘된 거죠. 결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이유에 나는 남은 돈 모두를 브랜드 Han에 투자했다.

다행히 주식이 상승하기 전에 주식을 매입했고 차후에 들어온 프리미엄 로열티도 모두 투자했다.

주식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지만, 나에게는 확실한 정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브랜드 Han 총괄 디렉터에게서 미리 알게 된 글로벌 상품권 취득과 중국진출에 대한 소식.

그리고 내 디자인에 대한 확신.

어마어마한 매출을 브랜드 Han에 안겨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 결과 3배 가까이 주식이 상승했다.

‘지금 팔면 아깝긴 한데. 어쩔 수 없지.’

장하나는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제 계약서 작성할까요?”

“네 사장님.”

“자세하게 읽어보시고 수정해야 하는 부분 있으면 말해주세요. 저희 조건은 모두 적혀 있습니다.”

안현수와 장하나는 서류를 꼼꼼하게 읽어 나갔다.

서로서로 귓속말도 서슴지 않았다.

당한 만큼. 보인다고 할까?

하지만 나와 신지혜는 개의치 않았고 여유 있게 기다려 주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항목들이 대부분이었고 장하나에게 최고의 계약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장하나를 대신하여 안현수가 말을 이었다.

“항목에 이상 없습니다. 아니 너무 좋습니다.”

“그럼 사인해 주시겠어요. 장하나 씨.”

장하나는 볼펜을 들고 머뭇거렸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뭐 바꾸고 싶은 거 있어요?”

“네.”

예상외의 답변에 나와 신지혜가 살짝 놀라긴 했지만, 문제가 있다면 바꿔줄 용의가 있었다.

“말씀해 보세요.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그게…. 계약금 부분 수정하고 싶어요.”

“네?!”

장하나의 발언에 신지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리고 높은 억양으로 장하나에게 반문했다.

“설마? 금액이 부족하다는 거예요?”

“아니요.”

장하나는 손바닥을 흔들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게 아니라. 계약금 받지 않을게요. 너무 큰 빚을 진 거 같아서 매니저 오빠랑도 벌써 이야기 끝냈어요.”

“아….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니요. 그렇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뭐.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죠. 그럼 제가 다르게 바꿔드릴게요.”

나는 계약금 대신에 그에 비례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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