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200)

“감사합니다. 제가 최대한 내일까지는 최종 디자인 만들어 내도록 할게요.”

“네. 그럼 저도 퇴근합니다.”

우리는 2월에 가방을 출시하는 것을 목표로 최대한 달려나가고 있었다.

3월 초에서 중순에 시작하는 서울 패션위크를 피해갈 목적이었다.

인지도가 부족한 우리 브랜드가 패션위크 시즌에 살아남을 확률이 극히 적기 때문이다.

나는 모두가 떠난 공방 한 곳에 남아 끊임없이 스케치해 나가고 있었다.

“하…. 이 부분이 계속 문제가 되네.”

머리가 욱신거린다.

신경을 너무 많이 쓴 영향인 듯했다.

“바람 좀 쐬고 와야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힘을 다해 기지개를 켜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늦은 밤이라 주변 가게들이 모두 닫혀 있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려 주위를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찬 기운이 뼛속까지 느껴질 때쯤.

“춥네! 돌아가야겠어.”

내가 몸을 돌려 전파사 앞을 지나가는 순간.

여러 대의 텔레비전에서 드라마로 보이는 장면이 나타났다.

― 너 같은 건 필요도 없어. 내 인생에서 잘라낼 거야! 꺼져 꺼져버리라고.

“무슨 대사가 이래. 막장 드라마네.”

나는 여자 주인공이 남자주인공에게 날리는 대사를 들으며 찝찝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필요하지 않은 부분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 부분을 잘라내고 다른 거로 바꾸면 돼!”

번득이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빠르게 뛰어 다시 공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정신이 팔린 듯 스케치를 수정해 나갔다.

불량이 계속 만들어지는 부분을 절단하고 그 부분에 잡아줄 스트랩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어두운 공방 전체를 환하게 밝힐 정도의 빛이 흰 종이에서 뿜어져 나왔다.

“왜 안 나타나나 했다. 이번에는 너무 기쁜데.”

매번 꺼려지던 빛이 일어나는 현상이 이번에는 이렇게 반가울지 몰랐다.

내가 가방 디자인 시안을 계속 수정한 이유에 이 부분도 없지 않았다.

두 달 가까이 원하는 디자인을 만들어 냈지만, 빛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쁜 디자인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내 생각이 끝이 날 때쯤.

강하게 뿜어져 나오던 빛이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좋아! 보여줘.”

이번만큼은 원하지 않던 영상까지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브랜드 Han의 드레스룩에서 뿜어져 나왔던 얕은 빛이 의류 매출 2배의 성과를 만들어 냈다.

그렇다면 지금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광량에서 흘러나오는 영상과 그에 상응하는 성과는 나조차도 예측할 수 없을 거다.

“흡.”

순간 몸이 정지되듯 굳어갔다.

찬란한 빛이 내 두 눈동자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어둠의 장막이 걷어지며 영상이 흘러나왔다.

장하나 1

* * *

나는 어두운 밤 백화점 앞에 서 있었다.

그것도 가장 메인이 되는 진열장 앞.

“내 브랜드가.”

거대한 전시장 글라스 위에는 아리raM의 글귀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내가 눈을 지그시 내려보니 메인 전시대에는 내가 디자인한 가방이 놓여 있다.

그것도 내가 생각했던 여러 가지 경우의 형태를 모두 접목한 only one bag이 말이다.

백화점 메인 진열장은 시즌 중 최고로 아름답고 큰 매출을 가져와 줄 메인을 올리는 곳이다.

그런 곳에 아리raM의 only one bag이 전시된 것이 아닌가.

“기분 좋은데.”

내가 기쁜 마음으로 쇼윈도를 뚫어지게 보는 그때.

사람의 모습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염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바라보는 시선은 모두 내가 만든 가방에 쏠려 있다.

가지고 싶다는 욕망과 선망을 담은 시선이 나에게 느껴졌다.

한참 동안 이어진 영상은 내 눈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이 디자인이 아리raM에 성공을 가져다줄 것을.

“이거면 되겠어.”

* * *

강서에 있는 BB 엔터테인먼트의 사무실.

기획사 사장과 매니저 그리고 장하나가 그곳에 있었다.

“장하나 너 연예계 쪽 일 안 하고 싶어? 나한테 밉보여서 연예계 은퇴한 애들이 한둘인 줄 알아!”

“…….”

조폭 출신에 연예 기획사 경력으로 20년이 넘는 BB 엔터테인먼트 송영태 사장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장하나를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장하나의 매니저가 나섰다.

“사장님 이번 거는 좀 심하지 않을까요. 노출이 너무 과한데요. 하나가 연예계 곧 진출하려고 해도 이미지가 너무 싸질 거 같은데….”

“미친 새끼가 실장 달아주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내가 나 혼자 좋다고 그래?”

“사장님 하지만.”

쾅!

송명태 사장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화분을 매니저인 안현수 머리 위로 집어 던졌다.

다행히 비껴갔지만, 안현수의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오빠! 피….”

“괜찮아 살짝 찢어졌나 보다.”

장하나가 손을 벌벌 떨며 안현수의 머리에 손수건을 가져다 댔다.

그때.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찍어! 시발 요새 애새끼들 말을 안 들어 처먹어. 예전에는 사장이 시키면 빨가벗고 춤도 추고 했는데.”

“…….”

“마지막 경고야. 하라면 해.”

송영태는 마지막 경고를 남기고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그 순간.

긴장이 풀린 걸까? 장하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하나야. 다 나 때문에.”

“오빠가 뭘 잘못했다고 미안해요.”

“내가 널 여기에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장하나를 길에서 스카우트해서 BB 엔터테인먼트에 넣은 게 안현수였다.

로드 매니저였던 안현수는 길을 가다 우연히 장하나를 보게 되었고 그녀를 스카우트한 거다.

“전 괜찮아요. 병원부터 가요.”

“하나야.”

“응?”

“계약 파기하자. 이번에는 아예 달라. 그냥 널 도구로 쓰고 버릴 생각이야. 평생 나쁜 쪽으로만 일할지도 몰라. 그러니 계약 파기해.”

“에이 계약 파기는 아무나 해요? 저 괜찮아요.”

“…….”

장하나는 돈이 없다.

그래서 이러는 걸 알고 있었다.

“미안하다.”

“괜찮다니까.”

안현수는 송명태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냥 빛 좋은 말로 장하나를 꼬드겨 심한 노출 화보를 찍게 해.

짧은 시간 큰돈을 벌 생각일 거다.

안현수는 자신이 키우는 아이가 그런 꼴이 되는 걸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힘이 없다.

그게 너무 분했다.

“찍을게요.”

“…….”

.

.

.

다음 날 다시 셋이 사무실에 모였다.

어제와는 다르게 송영태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마냥 좋은 사장 코스프레를 하듯 장하나를 옥이야 금이야 다루고 있었다.

“그래 찍기로 마음먹었다고.”

“네. 찍을게요. 근데 약속 하나만 해주세요. 저 꼭 이번 일 이후에 배우로 데뷔시켜주세요.”

장하나의 말에 송영태의 표정이 시큰둥하게 변했다.

“왜 또 잘나가다 배우 한다는 소리가 나와.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감사합니다. 사장님.”

옆에 있던 안현수는 무표정하게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힘이 없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장하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빠는 왜 이렇게 울상이에요. 저 괜찮아요.”

“아냐 그냥 생각이 많아서.”

안현수는 자신이 느끼는 모든 걸 장하나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송영태가 무서웠고 이 바닥에서 성공을 하기위해 상경한 지 10년째였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다른 일을 하기에는 무리였고 무서웠다.

그래서 장하나에게는 숨기고 숨겼다.

“오빠 제가 대배우 되면 오빠한테 잘할게요. 웃어요. 웃어.”

안현수는 천사 같은 장하나의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그렇게 촬영 날짜가 잡혔다.

* * *

압구정에 있는 스튜디오에 장하나와 안현수가 도착했다.

장하나는 안현수를 안심시키려 아침부터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스튜디오에 차량을 주차하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다.

안현수라고 왜 그녀의 마음을 모를까.

하지만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면서 그녀가 차에서 내리는 걸 기다렸다.

“가자.”

“네.”

스튜디오에 도착한 둘은 예상 밖의 일에 봉착했다.

사진작가로 보이는 남자들이 여러 명이다.

모두 카메라를 들고 있었고 눈빛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안현수는 무슨 일인지 사장에게 연락했다.

“사장님 사진작가도 여러 명이고 분위기가 이상한데.”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스팍 화보 촬영 아니에요?”

“아, 그거? 그건 다른 애가 하기로 했어. 거기서는 하나 개인 화보 찍을 거야.”

“그게 무슨….”

“조용하고 시키는 일이나 해.”

뚝!

안현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스팍 화보보다 더한 일을 송영태가 꾸몄다는 걸.

왜? 무슨 이유에서 이런 짓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름 인지도를 구축하고 있는 아이다.

그런데 쓰레기 버리듯 버린다는 게.

“왜?!”

그때 안현수에게장하나가 천천히 걸어왔다.

“오빠 여기 스팍 찰영장 맞아요?”

안현수는 고민했다.

뭐라고 답해줘야 하는지.

그리고 끝내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응, 맞다네. 여기는 이런 스타일인가 봐.”

“아 그래요….”

그리고 한참 뒤 탈의실에서 나오는 장하나를 보고 안현수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말았다.

노출의 강도가 너무 심했다.

손으로 가리고 있지만, 가슴이 그대로 노출되었고 하의도 입은 듯 만 듯한 의상이다.

“오빠….”

그 순간 장하나의 주위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인간들이 걸어왔다.

안현수는 그제야 자신의 거짓말을 반성했다.

“하나야 이쪽으로 와!”

고함에 장하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뛰어갔다.

장현수는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그녀에게 입히고 도망치듯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둘은 회사 차를 그곳에 남겨두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그사이에 안현수의 전화가 미친 듯이 울렸다.

송영태의 전화였다.

“개자식!”

“오빠 저희 이제 어떻게 해요….”

“내가 아는 기자 있어. 일단 이 일부터 터트리자.”

“……안 돼요.”

“미안 내 생각만 했다.”

“아니에요.”

장하나는 두려웠다.

이미지로 먹고사는 게 이 바닥이고 모델이건 인플루언서건 배우건 이번 사건이 터지면 이때까지의 노력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럼 계약서라도 터트리자.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네…….”

장하나도 수백 번 계약 파기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

계약 기간 6년.

그동안 기획사를 나갈 수 없었다.

기한을 채우지 못하고 나갈 시에 큰 위약금을 물어주어야 한다는 독소조항 때문이다.

아직 수입이 많지 않은 장하나에게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망치고 싶었다.

며칠 동안 송영태의 협박이 이어졌다.

― 내 눈에 보이면 둘 다 죽여버린다.

― 계약 파기해 줄 테니까 5억 가져와. 아니면 바로 소송 걸 테니까 알아서 해. 이것들이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송영태도 소송으로 이어져 긴 시간을 소비하기 싫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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