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들도 같이 가실 거죠?”
“언제 물어보나 했네.”
신영길 선생님이 섭섭하다는 말투로 장난스레 말씀하셨다.
젊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자기네들이 끼여도 되나 싶어 눈치를 보셨나 보다.
그렇게 나와 신지혜는 선생님들을 모시고 공방을 빠져나왔다.
“진혁아. 이 앞에 전집 죽이는데 알지. 거기로 가자.”
“네.”
신설동에 유명한 20년 전통의 전 전문점.
오늘도 가게를 마치고 몰려든 사람들이 붐볐다.
“선생님 여기로 앉으세요.”
우리는 테이블 두 개를 연결해 선생님들을 안내했다.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왔다.
“혹시. 저 기억하세요?”
“누구시죠?”
커다란 키에 낯설지 않은 여성이다.
그녀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는 순간.
그제야 누군지 알아봤다.
“장하나 씨?”
“맞아요. 기억하시네요.”
“네, 제가 그때는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별말씀을요. 연락이 없으셔서 저도 잊고 있었는데요.”
둘이 대화를 이어나가는 그때.
아버지와 가죽장인 다섯 분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셨다.
아버지가 발 빠르게 내 옆으로 다가와.
“뭐야 누구야?”
장하나를 빤히 쳐다보신다.
“나는 합격이다.”
“무슨 합격이요?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버지와 나의 대화를 들은 장하나는 입을 막으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아버지와 주위 어른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장하나라고 합니다.”
모두 손뼉을 치며 그녀와 나에게 한마디씩 건네신다.
“아따 이쁘다. 진혁이 여자친구인가 보고만.”
“그러게 형만이 집은 미인이랑 결혼하는 운명을 타고났나 봐.”
“선남선녀여.”
나는 모두에게 실례라며 손사래 쳤다.
“죄송합니다. 어른들이 장난이 심하시죠.”
“아니에요. 화기애애하고 좋은데요.”
그때 무표정하게 있던 신지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갑자기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불안하게 왜 이래?’
“사장님 장하나 씨 어떻게 아세요?”
“뭐 어쩌다 보니.”
“하여튼 장하나 씨 제가 뽑은 섭외 리스트1순위예요.”
나는 동그란 눈으로 신지혜의 얼굴을 쳐다보며 위아래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기회 잡으라는 말이다.
쉽게 만날 수 없는 인스타의 유명 인플루언서다.
한 번의 게시물에서 파생되는 광고효과가 엄청나다.
“그럼 재미있게 놀다 가세요.”
“잠시만요 장하나 씨. 그때 세탁비 대신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나요?”
“네. 무슨 부탁이신데요?”
“장하나 씨 번호 주실 수 있으세요?”
“네?!”
무턱대고 번호라니 질문이 이상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도 썩 나쁘지 않다.
볼이 살짝 붉어지더니 뒤편에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른다.
“나쁜 의도 아니니 번호 좀 주세요.”
“나쁘게 생각 안 했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번호는 드릴게요.”
그녀는 예전과 다르게 명함 대신 자신의 번호를 나에게 전해 주었다.
그녀가 돌아가고 나도 자리에 앉았다.
“다니엘.”
“응?!”
현재 내가 가장 궁금한 사항은 다니엘의 실력이다.
황의선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내 옆에 둘 수는 없다.
같이 일했으면 하는 눈치인듯하지만 선택권은 나에게 있었다.
“다니엘. 에르맥스 장인 학교 몇 등급으로 졸업했어?”
“Mr. 차, 그런 것도 알아.”
“뭐 어느 정도는 알지.”
완전히 꿰뚫고 있다.
에르맥스 장인 학교에서 4년을 살다시피 한 나였다.
그리고 모든 클래스를 통달했기에 학교 내에서 모르는 인물도 없다.
만약 그가 나에게 조그마한 거짓말이라도 한다면 아리raM에서 함께 일할 수 없을 거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기대에 부풀었다.
내가 원하는 답변이 나온다면 큰 보배를 얻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가죽장인 다니엘
* * *
“나? A 클래스 졸업했어.”
“A 클래스?!”
“응. 나 S 클래스 시험가능자였는데 시험만 쳤으면 바로 에르맥스 장인으로 스카우트였을걸.”
에르맥스 장인 학교는 S, A, B, C까지 4가지 등급으로 학생의 실력을 구분했다.
전체 학생의 60%가 C 클래스였고 3번의 시험 이후 등급을 올리지 못하면 학교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전체 학생의 30%가 B 클래스다.
B 클래스만 되어도 웬만한 명품회사의 가죽공으로 취직할 수 있다.
그다음으로 A 클래스. 에르맥스의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등급이다.
전체 학생 수의 10% 남짓.
이 중 엘리트 코스를 모두 완주한 학생에게 S 클래스의 시험 권한이 주어진다.
그 수는 3%도 채 되지 않는다.
보통 한 학년의 수가 100명도 채 되지 않는 에르맥스 장인 학교에서 3%라면 엄청난 실력자라 할 수 있다.
엘리트 코스 3% 안에 들었다면 졸업 이후 언제든지 S 클래스 시험을 응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나는 그의 말을 모두 믿지 않았다.
‘진실을 알 방법이 한 가지 더 있긴 하지.’
“그렇다면 파올로 교수도 알고 있겠네.”
“윽 그 미친 영감탱이. 넌 어떻게 아는 거야!”
“들었어….”
나는 다니엘의 표정을 보는 순간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파올로. A 클래스 엘리트 코스 마지막에 듣는 수업의 교수 이름이다.
내가 다니던 시절 15년째 재직 중이었고 평생 그곳에 남을 거라고 매번 말했던 인물.
그리고 다니엘 말대로 그는 미친 영감이다.
뭐 좋게 말하면 괴짜지만.
손꼽히는 무두질 장인으로 파올로는 동물의 원피를 가공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그는 매번 말을 안 듣는 학생에게 가죽을 절단하는 칼을 들이밀며.
“내가 아직 못 만들어 본 가죽은 인간 가죽뿐이야!”
라는 말을 남발하던 인물이다.
정말 살인을 저지르고 인간 가죽을 만들 거 같은 인간이었다.
갑자기 그를 생각하니 소름이 돋아났다.
지금 생각해 봐도 파올로의 눈빛은 진짜였다.
모든 학생이 그의 눈을 보면 무서워하고 소름 끼쳐 했다.
생각조차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순간 다니엘도 나와 비슷하게 몸을 부르르 떤다.
“Mr. 차, 근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야. 등급체계도 그렇고 파올로는 에르맥스 학교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인물인데.”
“친한 친구한테 들었어.”
그 친한 친구가 내 과거이지만 말이다.
다니엘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의심이 섞여 있는 듯했다.
“진짜야. 나는 이탈리아 근처도 안 가봤어.”
“정말?! 그런데 이탈리아어를 그렇게 잘 구사한다고.”
“뭐 공부한 거지.”
다니엘은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해왔다.
그리고 내가 계속 둘러대니 그도 포기했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여튼 잘 부탁해.”
“뭐야 나 그럼 이제부터 아리raM에 취직된 거야?”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런데 황의선 선생님이 왜 널 이곳으로 보낸 거야?”
“나는 가방이 좋아. 가방을 만드는 장인으로 살아갈 거니까. 이제 내 분야로 돌아와야지.”
“축하해.”
“뭘?”
“이제 쉴 틈 없이 네가 좋아하는 가죽을 만질 테니까.”
나는 다니엘에게 가방공예의 전권을 맡겨볼 생각이다.
아버지도 계시지만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마냥 손을 떼지는 않을 테지만 디자인 구상에 더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어쩌면 황의선 선생님의 큰 배려라고 생각했다.
모두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한 잔 두 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나를 향해 무형문화재 세 분이 손을 흔드신다.
“네 선생님.”
“내 잔한 잔 받아야지.”
“네. 그럼요.”
황의선 선생님은 나에게 막걸리 한 잔을 따르며 고맙다는 말을 하염없이 남겼다.
“윤호한테도 영길이 영감한테도 들었네. 고맙네! 고마워.”
“제가 감사하죠.”
“다음에도 필요한 사람 있으면 말해. 꼭 도와줄 테니까.”
“네.”
나는 막걸리를 들이켜고 세 분께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술기운이 올라와 찬 바람을 쐬고 싶었다.
밖에 나와 가게 한쪽에 잠시 앉아있으니 내 옆으로 신지혜가 다가왔다.
“이제 산 하나 넘었네요.”
“그러게요. 디렉터님 덕분에 여기까지 빨리 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려요.”
“무슨, 사장님이 다 하신 거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미래를 그려나가는 상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신지혜가 중요한 사항이라며 나에게 통보하듯 말을 이었다.
“잡지사 인터뷰해야 할 거예요.”
“잡지사요?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닐 텐데.”
“작은 잡지사예요. 월간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부록 형태로 주마다 발행하는 곳인데 생각보다 영향력이 있더라고요.”
“아 그래요. 근데 제가 인터뷰해도 되겠어요? 메인 모델이 구해지면 그분이 하시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사장님은 너무 자신을 과소평가하시네요. 인스타 확인 안 하셨어요? 팔로우 수가 점점 늘어나던데. 해외로 사진이 퍼져 나갔나 보던데요.”
“네?! 아…….”
“싫으시면 인터뷰 거부하고요. 얼굴 알려지는 거 정말 싫어하신다니까.”
“디자이너가 얼굴 팔려서 좋을 게 없죠.”
“사장님. 요즘은 그렇지도 않아요. 그러니 제가 시킨 대로 해주세요.”
신지혜의 말에 나는 쉽게 거부할 수 없었다.
브랜드 Han 때 그녀의 포스를 몸이 기억하는 걸까?
뭐든 그녀는 옳은 말만 하기에 나는 이번만큼은 시키는 대로 이행하기로 했다.
“그럼 최소 2주 뒤에 하죠. 가방 디자인도 아직 미완성 상태고 가방이 완성돼야 할 거 같거든요. 잡지에 실리는 촬영 콘티도 저희가 짜게 해주면 좋고요.”
“네, 그렇게 전달할게요.”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가고 있다.
장하나를 오늘 만난 일도 그렇고, 생각지도 못했던 다니엘이 아리raM에 온 것도 말이다.
밝고 어두운 빛이 내 눈에 나타난 그날 이후부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점점 좋은 길로 향해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이제 들어갈까요?”
“네. 그래요.”
그렇게 우리의 첫 번째 시작이 막을 올렸다.
* * *
다니엘은 한시도 공방을 떠나지 못했다.
그는 수시로 바뀌는 내 디자인에 맞는 가죽과 패턴을 만들고 있었다.
공방을 빠져나갈 때도 가죽 시장을 이리저리 둘러 보는 게 다였다.
아버지의 공방이 대한민국 가죽의 최대 판매처인 신설동에 있었기에 훨씬 수월한 편이었다.
“이 부분이 가죽이 구겨져. 디자인 변경해야 할 거 같은데.”
“일단 봐야 할 거 같은데. 최종 디자인이 아니긴 하지만 함부로 바꿨다가는 디자인 전체가 무너질 거야.”
현재 내가 만든 가방 디자인은 핸드백이다.
모든 사람이 부담 없이 들고 다닐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뒷면과 옆면은 부드러운 가죽을 이용해 착용감을 올려주기 위해 애를 썼고 가장 중요한 전면부에는 단단한 가죽을 덧대어 자개를 박아넣었다.
전면부 1/3가량이 자개로 이루어진 게 화려하면서 고급스러움을 한층 올린 디자인이다.
우리 둘은 밤낮으로 최상의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옆면부 안 구겨지려면 훨씬 더 부드러워야 할 거 같아.”
“하…. 가죽을 더 깎아보면 어때?”
“구멍 내고 싶어?”
내 욕심이 과했나.
다니엘이 인상을 구기며 나를 꾸짖는다.
나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런데 구겨짐 현상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다니엘, 최종 디자인 내일이면 나올 거야. 내일 다시 해보자.”
“디자인 수정하면서 이 부분 신경 써. 나 일단 퇴근한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라고. 또 이태원 가서 술 퍼먹지 말고.”
“윽…. 잔소리꾼.”
다니엘을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면서 옷을 챙겨 입고 공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한참 동안 가방 시안을 보며 문제가 되는 부분을 어떻게 바꿔야 좋을지 생각했다.
“골치 아프네.”
그때였다.
“사장님 퇴근 안 하세요?”
“디자인 수정 조금만 하고요. 내일은 최종 디자인 시안 완성될 겁니다. 아침에 회의해야 할 거 같아요.”
“네. 그리고 인터뷰 잡았어요. 3주 뒤로.”
“맞다 인터뷰!”
나는 가방 디자인과 가죽 선별에 정신이 팔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장하나 씨한테는 연락했어요?”
“……아직이요.”
“빨리 좀 부탁드립니다. 제발!”
오늘 날 잡았네.
다니엘도 신지혜도 나를 들들 볶는구나.
“바쁘신데. 이거 참고하세요. 제가 백화점, 시장, 동대문, 해외 신상 브랜드랑 가방 조사한 거예요. 지금은 제가 해드릴 건 이거뿐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