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00)

한순간 신지혜의 얼굴에 그늘이 사라지고 온화하게 변해갔다.

생각이 다르면 어쩌지라는 고민을 했는가 보다.

나도 그런 그녀에게 웃음으로 화답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사장님.”

“편하게 하세요.”

우리는 긴 밤 동안 많은 대화를 하고 헤어졌다.

* * *

아침부터 공방으로 향했다.

신지혜가 합류한 이후부터 준비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갔다.

오늘부터 아버지 공방을 시작으로 법인등록을 끝냈고 부족한 고가의 생산 기계들을 들여왔다.

기존에 재봉틀이나 기본적인 도구들은 최대한 활용했다.

이제 1단계의 과정이 끝이 났다.

“브랜드 이름 한번 멋지네.”

아버지는 등록증을 보며 웃어 보였다.

“아리알에이엠 캬! 멋지다. 영어도 막 쓰여 있고.”

“그렇게 읽는 거 아니거든요. 아리람이에요.”

순간 얼굴을 붉히며 아버지가 머리를 긁적이신다.

그리고는 빗자루를 들고 밖으로 나가셨다.

그 모습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때 신지혜가 나를 찾아왔다.

“브랜드 로고는 다 만드셨어요?”

어색하네.

그녀는 일을 시작함과 동시에 나에게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편하게 하라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우겨대는 통에 막을 수 없었다.

‘열심히 해야겠네.’

덩달아 나도 큰 원동력이 생겨나고 있었다.

“여기요. 한번 보시겠어요?”

“네.”

내가 가장 신경 쓴 게 로고 디자인이다.

브랜드의 얼굴이 되는 디자인.

처음 가지는 이미지가 로고에서 결정된다 해도 무방하다.

“어때요?”

“좋은데요……. 소름 끼칠 정도로. 그리고 신비해요. 빠져들 거 같아요.”

내 로고 디자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고개를 나에게 돌려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로고 디자인

* * *

내가 만든 로고 디자인은 전각장(塡刻匠) [무형문화재 제24호] 안윤호 선생님의 전각이 새겨졌다.

아리raM의 로고에는 한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무형문화재의 혼이 그대로 배어 있다.

그리고 나무 전각 위에 나전이 촘촘히 박혀 있어 고풍스러움과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임의로 만든 이미지이지만 그 화려함은 처음 보는 사람의 눈도 확 트이게 했다.

“나전이에요.”

“나전칠기?”

“네. 나전에 유약인 옻나무 진액을 바르면 나전칠기가 되는 거죠.”

그녀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벗어놓았던 두꺼운 패딩을 껴입었다.

나는 그녀의 돌발행동에 질문을 이었다.

“어디 가시게요?”

“나전칠기 장인 섭외해야죠.”

신지혜는 로고 디자인을 보고 빨리 실체화된 현물을 보고 싶어 하는 눈치다.

나도 얼마 전 장인이 거주하는 곳을 알게 되어 오늘 가보려던 참이었다.

“같이 가시게요?”

“당연한 소리.”

“같이 가시죠. 사실 소재지는 알아 뒀거든요.”

내가 그녀에게 슬쩍 메모장 한 장을 내밀자.

화들짝 놀란 그녀가 다시 나에게 질문을 토해냈다.

“아니 어디서 이런 대단한 분들을 다 알아 오시는 거예요?”

“아…. 뭐 우연히.”

그녀의 말에 나는 석 달 전 기억을 더듬었다.

현대에 살아가는 대한민국 장인들 기획전이 끝나 가는 시점.

나는 다시 전시장을 방문했다.

혜화장 황의선 선생님을 찾아뵙기 위해.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일에 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안녕하세요.”

“어! 형만이 아들. 여긴 무슨 일로 왔어?”

“선생님이랑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나랑?”

우리는 박물관 앞에 있는 전통찻집으로 몸을 옮겼다.

조금 있으니 따뜻한 꽃향기가 퍼지는 전통 국화차가 나왔다.

그리고 선생님이 먼저 말을 이었다.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건가?”

“그게……. 선생님이 허락하신다면 제가 그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 일이라니?”

“패션과 한국 전통예술품을 접목하는 일이요.”

“오호 그래. 기분 좋은 소리네. 자네같이 유능한 사람이 해준다면야 대환영이지.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나는 조심스레 가방에서 준비한 서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계획과 다른 현실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장인들에 대한 보상, 차후에 이루어질 재단에 대한 큰 그림까지도 설명해 나갔다.

‘떨리네.’

한참 동안 서류를 보고 생각에 잠겨 있던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내가 이걸 본다고 자네의 큰 생각을 다 알지는 못하겠지. 근데 이거 하나만 알아주면 좋겠어.”

“네 말씀하세요.”

“그냥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의 우수한 공예를 알았으면 하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어렵게 생활하는 장인들을 보살펴 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야.”

그의 겸손한 답에 나 또한 뭉클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가슴속이 뜨겁다 못해 열정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자신 있게 답했다.

“꼭 그렇게 되게 만들겠습니다.”

“대답 한번 시원하네.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선생님의 응원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 절로 들었다.

‘식사라도 한번 대접해야지.’

아직도 기쁨에 찬 선생님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로부터 두 달여의 시간이 지난 후.

황의선 선생님께 처음으로 부탁드린 게 바로 전각장 안윤호 선생님과의 만남이다.

안윤호를 처음 만나는 날 나는 실로 놀라고 말았다.

기다란 수염과 긴 장발을 한 채, 나무 지팡이까지 들고 계셨다.

마치 도사 같다는 느낌마저 들게 하는 비주얼의 소유자였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선생님은 무슨. 춥네! 얼른 들어오게.”

“네.”

안윤호 선생님은 내 뜻을 좋게 생각해주셨고 그런 이유에 내 부탁을 흔쾌히 받아주셨다.

분명한 건 황의선 선생님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듯 보였다.

“황 선배가 얼마나 들볶던지 귓구멍이 얼얼해. 큰일 할 사람이라고 도와주라고 난리 치시더라니까.”

“아…. 그러셨군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야 없지. 그래서 내가 뭘 해주면 되겠나?”

“아 이겁니다.”

내가 내민 아리raM이라는 글귀를 받아 든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그리고 조용히 먹을 갈고 큰 붓으로 나무 판에 아리raM 의 글귀를 써 내려갔다.

한 획 한 획이 아름다웠다.

붓끝의 힘은 멈출 줄 모르고 다음 글자를 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획이 그이고 붓을 들어 바닥에 내려두고는 말을 이으셨다.

“내 느낌대로 써 보았는데 괜찮은가?”

“…….”

나는 멍하니 글자만을 바라보았다.

“별로인가?”

“별로요?! 최고입니다.”

“하하하. 기분 좋은 소리를 뻔뻔스럽게 하는구먼. 그럼 이건 선물일세.”

그는 시원한 배포와 베푸는 걸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나는 거부했다.

“저 공짜 싫어합니다. 이건 돈으로 사겠습니다.”

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비한 계약서를 그에게 조심스레 내밀었다.

첫 번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

“선생님 계약서 한번 봐주시겠어요.”

“계약서?!”

“선생님이 쓰신 글에 대한 커미션입니다. 이 글자가 쓰이는 모든 곳에서 수익이 창출될 겁니다. 그리고 전각에 대한 수입도 나눠서 드릴 겁니다.”

“그게 정말인가?”

“네, 선생님의 글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윤호 선생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몇십 년 한길을 파헤쳤지만, 돈이 없어 제자들을 다시 돌려보낸 일도 많았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자신을 원망하고 힘들어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날 선생님 집에 머물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고 함께 미래를 그려나갔다.

“선생님 그리고 부탁이 있습니다. 제자들을 모아주세요.”

양산에 들어가게 되면 엄청난 양이 필요하다.

혼자서 해낼 수 없다는 뜻이다.

내 뜻을 알아들은 것인지 안윤호 선생님도 결의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손을 맞잡아 주셨다.

“고마우이.”

이걸로 후계양성과 경제적 지원, 두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잡은 셈이다.

“사장님 얼른 타세요. 추워요.”

“아, 네.”

나는 생각을 멈추고 신지혜의 차를 타고 메모에 적힌 주소로 향했다.

* * *

경기도 광주. 한적한 시골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는 마을을 지키는 커다란 나무 앞에서 멈추어 섰다.

“주소가 잘못됐나?”

우리는 마을을 몇 번이나 돌았다.

그런데 적힌 주소는 어딜 가도 보이지 않았다.

“목마르네요. 음료수나 한잔하시죠.”

“그래요. 배도 출출하네요.”

우리는 목도 축일 겸 주소도 물어볼 의중으로 동네 어귀의 슈퍼마켓에 들렀다.

“누구 없으세요.”

내가 슈퍼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막걸리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아무도 없나.”

“뭐 사시려고?”

그때 가림막이 젖히며 뽀글뽀글한 머리를 한 풍채가 좋으신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가림막 뒤편에는 두 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다.

동네 어른들의 모임 장소로 보였다.

마치 도시의 커피숍 같은 느낌이랄까?

“안녕하세요. 음료수 계산 좀 해주세요.”

“2000원.”

“여기요. 그리고 혹시 집 주소 좀 물어보려는데.”

“주소만 보고 어찌 찾아.”

“그럼 혹시 이 동네에 나전칠기 하시는 분 아세요?”

“아 신 영감님 말하는 건가?”

“네 신영길 장인님.”

“응 맞아. 영감님 집이면 저 산 뒤편에 있어. 저쪽 길로 쭉 올라가면 돼. 근데 이제 그 일 안 할 건데.”

“네?!”

“그니까…. 아 아니다. 남 아픈 일 내가 말해서 뭐해. 찾아가 봐.”

“네 감사합니다.”

나는 꺼림칙한 마음을 가지고 슈퍼를 빠져나와 신지혜와 함께 장인의 집을 찾아 나섰다.

장인이 사는 집은 산길로 이루어져 차가 진입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아이고 힘들어라. 사장님 저기인 거 같은데요.”

“그러네요. 가보죠.”

우리는 대문 앞에 멈추어 집 안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계세요? 신영길 장인님. 계세요.”

아무리 불러도 아무 기척이 없다.

넓은 초원이라 그런지 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어디 가신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우리가 고민하며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산어귀에서 노인 한 분이 서서히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누구쇼!”

“안녕하세요. 혹시 신영길 장인이신가요.”

“그런 사람 없소. 가시오.”

노인이 우리를 무시하고 스쳐 지나쳤다.

“술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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