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미국과 유럽의 명문 학교, 명품 브랜드에서 다시 경력을 쌓을 필요 없다는 걸 이 순간에 깨달았다.
내가 고민했던 이유는.
아버지의 공방에서 시작해 브랜드를 만들 수는 있겠지만.
한국이라는 시장에서 시작해 명품의 반열에 오르기에는 너무 힘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가능해.”
한국이라는 국가의 정통성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나에게 샤네르와 에르맥스 그리고 다올, 루이바통과 같은 탄탄한 역사를 가질 기회가 주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아리raM
* * *
브랜드 Han 한은샘의 사무실.
신지혜가 달려와 결재서류 보류에 대해 항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사무실의 분위기가 다소 무거웠다.
“이번이 기회입니다. 바이어들 반응도 나쁘지 않아요.”
“…….”
“사장님!”
한은샘은 총괄 디렉터인 신지혜의 말을 묵묵히 들어 주고 있다.
하지만 둘의 생각이 너무 다르다.
한은샘은 그런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말을 이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자. 지금 안정적이잖아. 뉴욕 시장에 입점한다고 성공하는 거 아니야. 너도 알잖아. 망해서 나오는 브랜드가 훨씬 많아.”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몰라요. 부탁드립니다. 제 꿈인 거 아시잖아요.”
그녀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부탁했지만 한은샘은 내키지 않는 표정이다.
신지혜의 진심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
한 회사의 재정이 안정권에 들어온다는 건 쉽지 않다.
한은샘은 이번 기회에 더욱 견고한 재정적 철옹성을 쌓고 싶었다.
“바이어 커미션 금액도 너무 터무니없고 입점 점포의 수수료도 너무 과해. 이런 위험을 안고 시장에 뛰어든다는 게 나로서는 반갑지 않다.”
“그건 조절하면….”
“중국 쪽에 더 힘을 실어. 백화점 입점 수수료도 25%면 한국에 있는 백화점보다 훨씬 좋은 조건이야. 그러니 중국 쪽 신경 써.”
“사장님! 중국은 언제든지 도전해 볼 수 있지만, 뉴욕은 달라요.”
“누가 그걸 몰라서 그래!”
참다못한 한은샘이 그녀를 향해 호통치듯 언성을 높였다.
신지혜도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 기회를 놓치면 다시 없을 거 같은 중압감이 밀려왔기에 밀어붙이고 싶었다.
그 기색을 읽은 한은샘이 덧붙였다.
“나는 한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야. 그런 리스크를 가지고 직원들 밥그릇 위험하게 하고 싶지 않아. 더는 거기에 대해 말하지 마.”
“…….”
한은샘의 말이 맞다.
어쩌면 신지혜 본인의 욕심일지 모른다.
복수를 위해 패션 업계에 뛰어들었고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다.
지금 신기루처럼 꿈이 눈앞에 나타났기에 놓치고 싶지 않아 달려왔고 항의했다.
그런데 너무 처참하다.
오아시스가 기다릴 거 같던 그곳에는 황량한 사막만이 존재했다.
‘이곳에는 없는 건가?’
“사장님. 제가 원한 건…….”
“하……. 그만해. 나도 알아 네 과거 그 사정.”
“복수가 아니라 인정받고 싶었어요.”
“현실은 그게 안 된다고!”
신지혜는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이런 하소연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정작 최고 결정자의 마음은 자신과 다른데 말이다.
둘은 한참 동안 말없이 찻잔의 손잡이만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원망스럽냐?”
“아니요. 이해합니다.”
짧은 이야기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그리고 한없이 이어질 거 같던 침묵을 신지혜가 끝을 내려 했다.
마음의 결정을 했다는 듯 표정을 굳힌 그녀가 입고 있던 재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은샘 앞에 무언가를 건넸다.
“저도 제 꿈을 향해서 가겠습니다.”
“신지혜!”
한 층전체에 들릴 정도로 큰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두고 한은샘에게 다시 머리 숙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장실을 나와 버렸다.
“왜 눈물은 나고 지랄이야.”
* * *
전통 공예 기획전에 갔다 온 지 벌써 3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잠까지 아껴 가며 일에 집중했다.
그런 이유에 벌써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토대가 완성되었다.
“가방부터 시작하자.”
최대한 현실적인 계획을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아버지의 가죽공방을 최대한 활용하는 거다.
처음부터 모든 아이템에 손을 댈 수 없는 실정이다.
재정과 인지도가 부족하다.
천재라 해도 잡기 어려운 과제들도 있기에 위험을 줄여야 했다.
“가죽 프레스, 철형, 하……. 장비구매도 해야 하고 할 게 많네.”
필요한 장비 리스트를 작성하는 그때 한동안 조용하던 전화벨이 울려 퍼졌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 올 사람이 없는데.”
발신자 ― 신지혜 총괄 디렉터.
발신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와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앗 밥.”
나는 빠르게 전화를 연결했다.
늦게 받았다가는 성격이 급한 그녀가 잔소리할 게 뻔했다.
“전화 받았습니다.”
“오, 차 사장님.”
“무슨 사장 아니에요.”
그녀의 능청스러운 농담이 싫지 않게 들려왔다.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곧 될 건데 뭐. 근데 밥 안 사?”
“사야죠. 언제 시간 되시는데요?”
“지금!”
“지금요. 회사는?”
“일단 만나서 이야기해.”
.
.
.
그녀와 통화를 종료하고 나는 대충 겉옷과 챙모자를 눌러쓰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이 많은 거리를 갈 때 모자가 필수가 되어 버렸다.
나는 제발 알아보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며 집을 빠져나왔다.
이제는 인터넷에 내 이름이 올라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팬클럽과 인스타에 떠도는 사진이 아직 존재하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
“날씨 좋다. 시원하네.”
며칠 만에 집 밖으로 나왔다.
마치 상쾌한 공기가 나를 반기는 거 같다.
“윽 추워.”
처음과 다르게 상쾌함은 사라지고 추운 기운이 몸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겉옷을 움켜쥐고 목을 감쌌다.
곧 새해가 밝아오기에 동장군이 더욱 힘을 발휘하는 듯했다.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압구정으로 향했다.
“사람 엄청 많네. 조심해야지.”
퇴근 시간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붐볐다.
나는 모자로 얼굴을 더 깊숙이 가렸다.
그리고 그녀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저깄네.”
신지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큰 키를 가지고 있었고 패션 디렉터답게 화려한 의상을 추구했다.
그 덕분에 눈에 확 뜨였다.
내가 천천히 그녀에게 걸어가자.
그녀가 나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며 이름을 불러대기 시작했다.
“여기야. 차진혁 디자이너.”
나는 순간 몸을 날리듯 빨리 달려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뭐 하는 짓이에요. 장난치지 마세요. 정말.”
“느그적 걸어오니까 그러지 빨리빨리 안 다니냐.”
“네, 네.”
그녀의 웃는 모습이 천진난만한 아이 같았다.
현재 나와의 나이 차가 8살은 나지만 친구 같은 느낌이 든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당차게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라 음식점이 밀집된 골목길로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고심 끝에 향한 곳은 오래된 삼겹살집이었다.
“비싼 거 드셔도 되는데?”
“이것도 비싸. 그리고 돈 잘 번다고 막 쓰면 너 망할걸.”
“무슨 그런 악담을. 저는 안 망할 테니. 많이 드세요.”
나는 집게로 고기를 뒤집으며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웃고는 있지만, 얼굴에 약간의 그늘이 져 있었기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그녀가 먼저 나에게 질문을 해온다.
“너 언제 브랜드 런칭할 생각이야?”
뜬금없다.
말이 좋아 브랜드 런칭이지.
작은 공방에서 시작할 생각인데.
“런칭이요. 너무 거창한 거 아니에요?”
“그런가…….”
“뭐가 궁금하신 건데요?”
신지혜가 내 눈치를 보며 뜸을 들인다.
절대 이런 성격이 아닌데 말이다.
왠지 그녀답지 않은 주저함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답은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네 회사에 취직 좀 하자.”
“그게 무슨? 저 이제 시작이에요. 회사까지도 아니고 그냥 공방인데.”
“나도 알고 있거든.”
“브랜드 Han은요? 한 사장님이랑 함께한 세월이 있는데.”
“하…. 그만뒀다.”
오늘 무슨 날인가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한다.
그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괜한 걱정인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신지혜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할 거 없어. 너 안 잡아먹어.”
“걱정은요. 저야 총괄님이 와주시면 최고죠. 근데 진짜 그만둔 거예요. 왜?”
“아…. 그게.”
신지혜의 목표, 한은샘과의 생각의 차이.
한은샘은 브랜드 Han이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해 국내 시장에서 크게 성장하길 원한다.
하지만 신지혜는 아니었다.
야망이 있고 목표와 열정이 가득했다.
“뉴욕, 밀라노. 그게 내 꿈이야.”
“그러셨구나. 그럼 해외명품으로 가시는 게 낫지 않아요? 디렉터님 정도면 명함 내밀만 할 텐데?”
“그렇지. 사실 스카우트 들어온 곳이 있긴 한데 내키지 않아. 계속 네 생각이 나.”
“저요?”
나는 역시라는 생각을 했다.
이번 패션위크의 쇼만 보아도 그녀의 기획력과 연출은 탑 클래스다.
명품에서 이런 능력의 소유자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그녀의 실력, 포용력, 업무능력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해외의 유명 크리에이트 디렉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능력을 갖췄다고 나는 확신했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근데 왜 저예요?”
“젊어. 근데 실력이 노련해. 그리고 관찰력 컬렉션 때 전개도 수정 그건 감각이 뛰어나지 않으면 그렇게 못해. 그리고 디자인 능력. 내가 본 네 나이 때 사람 중에는 최고야.”
“과찬이시네요.”
“그 결과! 내 선택은 너라는 거지.”
사실 그녀의 냉정한 평가와 배포에 놀랐다.
내가 만들 브랜드가 그녀를 스카우트한 브랜드보다 잘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능력도 좋고 감도 좋은 사람이라. 탐나긴 하네.’
나도 신지혜가 탐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명품에서 스카우트될 정도의 인물이라면 고액의 연봉과 커미션을 지급해야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아직 없다.
“근데 저는 디렉터님 연봉 못 맞춰드려요.”
“나 돈 많아.”
신선하네.
부러우면 지는 건데 저 당당함에 약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지혜는 어린 나이에 해외 유학을 갔다 왔고 늘 명품을 두르고 다녔다.
능력도 있지만 그만큼 집에 재력이 뒷받침되고 있다는 걸 증명해주는 듯했다.
“연봉 안 줘도 돼. 그건 다음에 천천히 받을게. 내가 듣고 싶은 건 네 생각이야.”
“무슨 생각이요?”
“어느 위치까지 가고 싶어?”
정말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그녀에게는 가장 중요한 질문인 듯 보였다.
“저야 뭐.”
갑자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제발 나와 같은 길을 가보자는 저 눈빛.
부담스러울 정도지만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답해 줬다.
“세계 최고가 돼야죠!”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