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00)

그의 진심 어린 걱정에 감사했다.

어쩌면 그의 그늘에서 커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했다.

그만큼 패션 세계에서 그늘이란 중요한 법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예외다.

새내기 디자이너가 아닌 화려한 경력을 자랑했던 천재 디자이너 김서진이기에 지금의 선택이 옳다.

나는 내가 아는 정보와 디자이너의 능력을 발휘해 정상을 향해 갈 거다.

그런 이유에 확신 찬 목소리로 그에게 답했다.

“더 큰물에서 놀겠습니다. 막내 디자이너가 아닌 오너 디자이너로.”

“…….”

약간은 건방질지 모르지만, 디자이너로서의 최종 목적이나 다름없는 포부였다.

나는 말을 뱉고 나서 한은샘을 응시했다.

그런데 그가 내 눈을 피해 잠시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실망하셨나?’

그의 심정을 나도 읽지 못했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던 한은샘이 눈을 뜨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너 디자이너라…….”

내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그가 자신의 책상으로 몸을 옮겼다.

책상의 서랍을 열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뭐지?’

그리고 한은샘이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와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건넸다.

“자 받아라.”

“만년필을 왜?”

“내가 쓰던 거긴 한데 오너라면 꼭 필요할 거다.”

나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전적으로 나를 응원해준다는 의미다.

응원의 작은 선물.

“감사합니다.”

“네 뜻이 그렇다는데 내가 막을 수야 없지. 하지만 일 처리는 깔끔하게 해놓고 가.”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도움 필요하면 연락하고.”

“바로 가는 거 아닙니다. 일 처리 해놓고 가야죠.”

“그렇지. 하하하.”

한은샘은 억지로라도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듯 크게 한 번 웃어 보였다.

그 순간 긴장된 내 마음도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오늘 회식이 마지막 회식이겠네.”

“네.”

그는 씁쓸한 한마디를 남기고 나를 내보냈다.

나는 문을 빠져나오며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 * *

퇴사가 결정된 이후.

회사 내에 나의 공백이 생기지 않게 최선을 다해 일을 처리했다.

내가 만든 가방의 담당자가 박한우로 바뀌었고 장현석이 사라진 뒤로는 선배들의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는 며칠째 화젯거리로 뉴스에 간간이 이름이 올라오는 중이다.

나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장현석의 현재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쌤통이다.”

다행히 신지혜의 능력 덕분인지 브랜드 Han은 큰 피해 없이 언론의 몰매를 비켜 갔다.

나 또한 이 부분을 걱정했는데 다행이라 생각했다.

마지막 정리 파일을 박한우의 메일로 보내고 오늘의 업무를 마무리 지었다.

“이걸로 마지막입니다. 업체들에 담당자 바뀌었다고 말해뒀습니다.”

“벌써. 내일인가?”

“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잘해준 것도 없는데 뭘.”

“아닙니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미…… 아니다. 다들 인사하고 조금 이따 보자.”

박한우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 뱉었던 말을 다시금 집어삼켰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지만, 지금은 듣고 싶지 않다.

괜히 독해진 마음이 다시 약해지게 만들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나는 자리를 이동해.

이때까지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선배들에게 일일이 찾아가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선배님. 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아 그래……. 섭섭한 거 있었으면 풀고. 나가서 더 잘되길 바란다.”

“네. 감사합니다.”

나는 디자인팀을 전체를 돌아다니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그들도 나간다는 나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홀가분하네.”

내가 짐을 정리하고 있던 그때.

신지혜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디자인팀에 들어오는 문 앞에서 나를 조용히 부르고 있다.

“차진혁.”

그녀가 나를 향해 손짓하는 게 보였다.

나는 복도를 빠져나와 그녀의 앞에 마주 섰다.

“안 그래도 인사드리러 갈랬는데.”

“인사는 무슨. 영영 안 볼 사이도 아닌데.”

“무슨?!”

“농담이야. 섭섭하게 정말 안 보게.”

“아니요. 연락만 주십시오. 바로 달려 나오겠습니다.”

그녀는 시원한 성격답게 웃는 미소로 나를 보내 주려고 애쓰는 듯했다.

그리고 내 입으로 쉽게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리고, 디자인 로열티는 다음 주중에 네 월급 통장으로 들어갈 거야.”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네 덕에 가방 매출이 몇 배는 올랐는데. 우리가 감사해야지.”

얼마 전 사천 개 이상이 팔려나간 후.

신기하게도 그 배에 해당하는 물량이 다시 예약판매 중이다.

들고 다니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더 유명해졌다.

그로 인해 나에게 떨어지는 로열티 배당액도 엄청나게 상승했다.

현재 가장 낮은 가격의 가방으로 계산했을 때.

예약물량을 제외한다고 해도 4000개에 2%면 7000만 원 이상의 수익이 나에게 떨어진다는 말이다.

“더 중요한 건 이제 시작이라는 거야.”

“들었어요. 해외 바이어들 연락 왔다는 거.”

“그래 뉴욕 에쿼에이션에서도 중국 백화점 쪽에서도 연락이 오고 있어. 너 부자 되겠다.”

“무슨……. 하하하.”

그녀의 말처럼 이 나이대에는 만져볼 수 없는 큰돈이 생길 거다.

한국 시장을 벗어나 중국과 미국에 브랜드 Han이 진출하게 된다면 엄청난 판매량을 올릴 게 분명했다.

열 배, 아니 백 배의 판매량을 갱신할 거라는 계산이 선다.

그만큼 두 나라의 패션문화와 소비인구의 규모가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나기에 가능하다.

“하여튼 잘 가고 연락해. 차진혁 사장님한테 따로 밥을 얻어먹어야지.”

“사장은 무슨…….”

“다 들었으니까. 밥 안 사줄 생각하지 말고.”

“네, 밥은 사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웃는 모습으로 돌아서 나에게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은샘의 사무실로 가서 그와 짧은 인사를 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 * *

빈둥빈둥하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나는 잠시의 휴식이라 생각했다.

“디자인학교에 다시 가는 건? 아니지.”

퇴사하고 내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잠시 가졌다.

디자인 능력과 경험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들이 존재하기에 많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미국에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하…. 고민이네.”

나는 한국에서 시작할 생각을 일찌감치 버렸다.

아직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명품을 만들어 낸다는 인식이 그리 좋지 않다.

유럽과 뉴욕의 패션디자이너들은 아시아권에 대한 편견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시작을 어디서 해야 하는지에 가장 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내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내 방으로 누군가가 찾아왔다.

“출근 안 하냐?”

“…….”

“왜 며칠째 빈둥거리고 있어. 잘 키워준 부모 마음 신경 쓰이게.”

“…….”

“말을 해라 요놈아.”

나는 한참 동안 아버지인 차형만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게……. 저 회사 그만뒀는데요.”

“뭐?! 잘 다니던 회사는 왜 그만둬? 네 엄마 알면 기절할 건데……. 하.”

한은샘의 반응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잘 다니던 회사를 왜 그만뒀냐는 표정이다.

그리고 지금 집안 사정을 생각하면 이런 반응이 당연했다.

“흠……. 뭐랄까. 더 큰물에서 놀고 싶어서요.”

“네 선택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진혁아 세상이 그렇게 쉽게 흘러가는 게 아니다.”

“네, 오래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에요.”

“그렇다면 부모로서 믿어 줘야겠지. 네 엄마한테는 내가 조용히 말하마.”

“부탁드릴게요. 아버지.”

전생에는 부모님이 없었던 나이기에 진심 어린 아버지의 조언에 마음이 뭉클했다.

‘할아버지도 살아계셨다면 날 이렇게 믿어주셨을까?’

문득 차형만의 얼굴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미소가 비치는 듯했다.

“그래서 뭐 할 건데?”

“고민 중이에요.”

아버지의 가죽공방을 이어서 브랜드를 만들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한계에 부딪힐 거라는 생각에 잠시 미뤄둔 상태다.

차진혁의 꿈과 나의 이상이 부딪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근데 보증 쓰신 건 어떻게 되셨어요?”

바쁜 와중에 신경 쓰지 못했던 게 이제야 생각이 났다.

내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버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셨다.

“그건 어떻게 알았냐?”

“그 아침에 어머니가 큰소리 내시는데 제가 모르겠어요.”

차형만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나에게 말을 이었다.

“어른들이 해결할 문제인데 신경 안 써도 된다.”

“아버지. 저 1억 정도 있는데.”

“뭐!? 그 큰돈이 어디서 나서.”

그 순간 아버지가 나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그 큰돈이 어디서 났냐는 눈빛.

그럴 때 있지 않은가.

갑자기 자식이 큰돈을 들고 오면 덜컥 겁부터 난다거나.

기쁨보다는 이 돈의 출처가 궁금하다든지.

아버지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살짝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나쁘게 번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내 대답에도 의심의 눈빛을 떠나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안방에 있던 어머니를 소환했다.

“여보 빨리 와봐.”

“왜 그래요. 아침드라마 보고 있는데.”

“그… 그. 그게.”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말을 더듬어. 설마 또 보증 쓴 거야?”

“아니, 아니.”

“뭐가 아니야.”

어머니는 진실을 말하라며 손바닥으로 아버지 등을 스매시하기 시작했다.

둘이 사이가 다시 좋아진 듯했다.

“정말 아니라니까. 진혁이가 1억을 벌었다잖아.”

“응?”

어머니의 표정이 아까 전 아버지의 표정과 똑같아졌다.

나는 슬며시 어머니에게 통장을 내밀었다.

“여기요. 제가 디자인한 가방에서 나온 로열티에요. 지금 1억인데 다음에 다시 정산되면 더 들어올 거예요.”

“네가 고생해서 번 돈인데. 부모가 돼서 이걸 어떻게 받아.”

어머니는 미안한 마음이 크신 듯 선뜻 통장을 받지 않으셨다.

얼굴에 미안함이 가득했다.

“받으세요. 저는 이제 시작인데요. 아버지 그만 미워하시고요.”

“…….”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어색한지 어머니의 어깨만 연신 두드리고 계신다.

그 순간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시더니 장난스레 아버지의 등을 양손으로 두드리신다.

“당신 때문이잖아. 오늘까지만 원망 좀 들어요.”

“네, 네. 그러겠습니다.”

두 분의 웃는 모습에 내 마음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에게 한 가지 부탁을 전했다.

“아버지.”

“응?!”

“부탁이 있는데요.”

한국 전통 공예품

* * *

차진혁의 꿈을 위해 아버지에게 한가지 언질을 남겨두기로 했다.

“무슨 부탁?”

“가죽공방에서 새로운 사업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예전에도 말했지 않았냐? 싱겁긴.”

“예전에?!”

“그래. 하고 싶은 게 있다고 기회가 되면 공방에서 해보고 싶다고.”

“제가 그랬어요?”

“그래.”

역시 내가 추측했던 차진혁의 꿈의 파편을 아버지에게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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