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성폭행 피해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사회다.
이 어린 나이에 짊어지고 가기에는 너무 큰 일이고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생각을 지웠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네.’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내 마음이 다 울컥한다.
여동생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일까.
마스카라가 번져 검은 눈물이 흘러내렸고 하염없이 장현석을 혼내 달라고 말하고 있다.
“네 그렇게 해드릴게요.”
참 순진한 여자다. 아니 어리숙했다.
어린 나이에 모델이라는 꿈을 가지고 서울에 왔을 텐데 처음 만난 놈이 이런 쓰레기였으니.
나는 장현석에게 겁탈당한 장소인 오피스텔 주소를 받은 후 그녀와 헤어졌다.
“일이 커지네.”
내가 돌아서며 자리를 떠나려 할 때.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디자이너님.”
한미나가 가던 길을 멈추고 헐레벌떡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세요?”
“아, 이건 도움이 될지 모르겠는데 저 말고도 더 있을지 모르겠어요. 모델 커뮤니티에 저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장현석 디자이너 이야기가요?”
“그건 아니지만, 강남 오피스텔 이야기가 있던 게 마음에 걸려서요”
“네 제가 알아볼게요.”
“부탁드릴게요.”
한미나의 말에 나는 확신했다.
그가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약자를 상대로 오랫동안 이런 짓을 해왔다는걸.
“장현석…. 넌 끝이야.”
* * *
어김없이 바쁜 일상을 보내는 중이다.
“빨리 끝내야 하는데.”
나는 며칠 동안 증거를 잡기 위해 퇴근 이후.
한미나가 알려준 강남에 있는 오피스텔 앞으로 매일 향했다.
‘꼬리를 잡아야 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해 가며 많은 날을 보냈다.
“오늘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약속이 있어서요.”
“어디 가? 오늘 소주 한잔하자고 했잖아.”
박한우가 그런 장현석을 향해 핀잔을 주고 있다.
하지만 장현석은 웃으며 겉옷을 챙겼다.
‘그때 이후로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장현석은 박한우보다 절대 먼저 퇴근하지 않는다.
김경희가 그렇게 되고 라인을 다시 구축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는 상태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오늘인가?”
그렇다면 나도 회사를 나가야 한다.
다행히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밀린 업무는 없는 상태.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른다.
나도 윗옷을 챙겨 박한우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총괄님.”
“왜 너도 가게?”
“저도 약속이 좀 있어서.”
“그래 가봐. 소주 한잔하랬더니 다 가버리네.”
“죄송합니다. 제가 다음에 삼겹살에 소주 쏘겠습니다.”
“그래 기억할게.”
썩 내켜 하지 않는 말투.
하지만 박한우는 나를 억지로 막지 못했다.
아침부터 살인적인 업무량을 모두 소화했다는 걸.
그도 알고 있다.
‘네가 사람이면 나 막으면 안 되지.’
나는 빠르게 회사를 빠져나와.
주위를 살폈다.
“오피스텔로 바로 갔으려나?”
나는 운동화의 끈은 단단히 동여매고 전력으로 오피스텔이 있는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만일이지만, 오피스텔에 들어간 걸 확인하지 못하면 낭패다.
“아이고 힘들어라.”
10분쯤 전력으로 뛰었을까.
눈앞에 오피스텔이 보이기 시작했다.
만약 장현석이 차를 몰고 온다면 막히는 걸 계산해 30분, 걸어온다면 최소 20분의 거리일 거다.
나는 그가 나타나기를 잠시 기다렸다.
그런데 예상 시간이 되었지만, 장현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바로 오는 건 아닌가 보네.”
그렇다면 플랜B 잠복근무.
나는 오피스텔이 훤히 보이는 2층 상가건물 옥상으로 올라왔다.
며칠 전에 알아둔 장소로 아주 훤히 오피스텔 입구와 주차장 출입구가 보였다.
“내가 정말 별짓을 다 하네.”
만약 내 예상대로 한미나와 같은 패턴으로 사건이 벌어진다면 시간이 좀 더 지체될 가능성이 있다.
“현재시간 9시 반.”
나는 3시간 반 동안 한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현재 시계 시침이 10시를 가리키려는 그때.
누군가의 실루엣이 내 눈에 들어왔다.
“장현석?”
장현석이 택시에서 내리고 옆에 같이 있던 여자가 내렸다.
거의 끌려가고 있다 봐도 무방하다.
여자는 장현석보다 훨씬 키가 컸고 줄에 걸린 빨래처럼 몸이 축 처져 인사불성인 상태다.
“딱 걸렸어.”
나는 옥상 난간에서 준비한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잠복에는 카메라지.”
찰칵찰칵!
장현석은 술에 취한 여성을 부축하느라 주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인다.
“아주 질질 끌고 가네 난쟁이 새끼.”
나는 장현석이 오피스텔 입구로 들어가려는 순간.
옥상을 내려와 더욱 가까이 접근했다.
내가 10m 인근으로 접근하는 그때.
장현석이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피는 게 아닌가.
“아씨! 들킬 뻔했네.”
장현석은 한참 동안 두리번대더니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여보세요.”
나는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경찰서죠. 신고하려고요.”
“말씀하시겠어요.”
“강남에 스카이오피스텔인데. 어떤 남자가 술 취한 여자를 강제로 끌고 올라가네요. 빨리 좀 와주세요.”
“네?! 근처에 순찰 중인 순찰차 보내겠습니다. 신고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제가 감사하죠.’
그리고 나는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저씨의 원빈!
“한 발 더 남았다.”
나는 다이어리에 적힌 직원 가족들의 번호를 확인했다.
“다이어리에 번호가 많다 했더니 이럴 때 도움이 되네.”
브랜드 Han은 경조사, 생일, 기념일까지 회사에서 일일이 챙겨주는 좋은 복지를 가지고 있다.
그걸 막내인 내가 관리했기에.
당연히 장현석의 부인 번호가 나에게 있었다.
“누구세요?”
“아 형수님 장현석 디자이너님 후배입니다.”
“네 무슨 일로.”
“아 제가 팀장님 집 앞까지 모셔다드렸는데요, 잘 들어갔나 해서요.”
“무슨? 집에 안 들어왔는데.”
“혹시 집이 강남에 있는 스카이오피스텔 아닌가요?”
“……어디라고요?”
“강남에 스카이오피스텔이요.”
“아닌데……. 거기 어디죠?”
“주소 불러드릴까요?”
“네….”
나는 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주소를 알려주었다.
“이제 시작이지.”
장현석 3.
* * *
경찰이 출동하고 나는 오피스텔 밑에서 장현석의 부인을 기다렸다.
“빨리 와야 할 텐데.”
그녀에게 장현석의 민낯을 낱낱이 확인시켜 줘야 했다.
그때 마침 모범택시 한 대가 오피스텔 앞에 정차했다.
검은색 원피스에 검정 킬힐을 신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한 여성이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당당한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혹시?”
“브랜드 Han?”
“네, 차진혁 디자이너입니다.”
“아……. 낯이 익네요.”
“네.”
인터넷으로 날 본듯했다.
그렇다면 신원을 굳이 파헤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내 예측처럼 더는 나에 관해 묻지 않는다.
중요한 건 내가 아니니까.
“어딨어요. 그 사람!”
그녀의 목소리에서 작은 떨림을 감지했다.
화를 억누르고 있지만, 목소리 자체에서 분노가 차올라있었다.
“802호입니다. 같이 올라가시죠.”
“그래요.”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 버튼을 눌렀다.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숨이 막혀왔다.
띵!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그녀가 도도하게 복도를 걸어 나갔다.
장현석의 방은 복도식인 오피스텔 맨 마지막에 있었다.
“넌 끝났어.”
최소 이혼.
그리고 경찰이 현재의 사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냐에 따라 구속이다.
나는 빠르게 그녀의 뒤를 따라 방으로 향했다.
“이 개자식아!”
도도하게 걸어가던 장현석의 부인이 욕 한마디를 남기고 주저앉아 버렸다.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오피스텔로 들어가서 머리를 다 뜯어버릴 거 같던 그녀의 기세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듯했다.
“여보…….”
내가 그녀의 뒤에 서자.
장현석이 나에게 욕을 뱉어낸다.
“차진혁. 이 개새끼! 네 짓이지!”
나는 아무 감정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바지를 벗고 속옷 바람으로 있는 장현석에게 작은 동정심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눈 버렸네.”
현재 내 눈에 보이는 건.
먼저 출동한 지구대의 경찰 두 분과 바지를 벗고 있는 장현석 그리고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속옷 바람의 한 여성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현석의 변명이 정말 웃기게 들려왔다.
“경찰관님 그냥 이 여자는 취한 거예요, 취한 거. 절대 납치하거나 술 취해서 강제로 데리고 온 게 아니고요. 합의해서 온 겁니다.”
“신고가 들어와서 조사해야 합니다. 타의건 자의건 여성분이 일어나야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겁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로 안 했다고 경찰이면 다야!”
“조사해보면 알겠죠.”
“닥쳐 너희가 뭔데! 날 조사한다고 난리야!”
경찰관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장현석을 응시했다.
“공무집행 방해 추가 당하고 싶으세요? 말 가려서 하세요.”
“…….”
경찰관 중 선임으로 보이는 사람이 무거운 말투로 그를 훈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