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200)

― 저 새끼 미친 거 아니에요?”

― 내 말이. 우리 때는 정말 선배들 눈도 못 마주쳤는데 세상 좋아졌다.

― 분위기 다 망치네. 안 저러던 놈이 갑자기 왜 저래?

‘그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거지.’

1년 차인 나보다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장현석이 먼저인 인간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힘이 있고 입김이 센 장현석의 편을 드는 속물들인 건 확실하다.

나와 박한우는 조용한 계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며 나에게 말을 이었다.

“너 실수한 거야.”

“네?”

“현석이가 사고를 친 건 맞아. 하지만 사장님이 용서하셨는데. 네가 다시 수면 위로 올릴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

“너 때문에 디자인팀 분위기 봐봐. 너만 조용하면 될 일 아니야. 내 말이 틀렸어?

말문이 막혔다.

내가 실수한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박한우만은 알아주길 바랐다.

“그리고 네가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 너도 운이 좋아서 기회가 온 거뿐이야.”

“운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운이라.

화끈한 업무 스타일에 박한우에게 호감이 갔었다.

그런데 믿었던 그가 날 실망시킨다.

밖에 있는 저들과 다를 바 하나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정말 무언가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거 같았다.

운이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선배들이 너보다 못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야 알겠어?”

“…….”

옳고 그름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인간.

순간 나는 결심을 했다.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발을 옮겼다.

이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공기조차 마시고 싶지 않다.

이곳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한 이상.

장현석에게 당한 만큼 돌려주고 떠나기로 결심했다.

“받은 만큼 돌려줄게.”

* * *

결심을 굳혔다.

내 공백으로 생겨나는 문제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일 처리를 해나갔다.

가방 하나를 만드는데 3~4개의 업체가 연결되어 있기에 담당자의 공백이 크게 느껴질 거다.

나로 인해 브랜드에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이유에 더욱 바빠진 경향이 없지 않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를 이 상황까지 몰고 간 장본인에 대한 복수를 준비하고 있다.

“분명 장현석이랑 연관이 있을 거야.”

확실해.

나는 한꺼번에 일어난 이번 일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 발신자 한미나.

― 검은빛의 영상 속에 울고 있던 한미나.

“한미나에게 접근하는 게 우선이야.”

그녀는 신인으로 현재 혼자서 활동하는 프리랜서 모델이다.

“분명 번호가 여기 있을 텐데.”

컬렉션 기간에 유독 많은 모델이 프로필을 전달해 온다.

얼마 전 내가 그 자료를 정리했다.

“여기 있네.”

한은샘에게 보내놓은 파일을 메일함에서 발견했다.

그곳에는 한미나의 프로필도 함께 담겨있을 터였다.

“나이 21살, 고향 의성, 키 174…….”

그녀의 프로필 내용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그리고 경력을 보다 나는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경력이 아예 없네…….”

패션위크 기간 브랜드 Han의 컬렉션에 그녀도 참여했다.

내 눈으로 확인했기에 알고 있는 사실이다.

크게 문제가 될 상황은 아니지만 특별하다고 볼 수 있었다.

“어떻게 섭외된 거지?”

S/S 시즌 모델들은 한은샘이 한하율의 회사에 부탁해 모든 인원을 섭외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프리랜서인 한미나가 어떻게?

“냄새가 나는데.”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든 정황이 문제가 있다는 걸 알려준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여보세요.”

“네, 누구세요.”

“브랜드 Han 차진혁 디자이너입니다. 전화 가능하세요?”

“……무슨 일로?”

“할 말이 있으실 거 같은데.”

살짝 찔러보듯 그녀의 말에 답했다.

분명 영상에서 흘러나왔던 그녀다.

하염없이 울고 있었고 억울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답을 해줄 터였다.

“흑흑흑…….”

수화기 너머로 그녀의 대답이 들려왔다.

천천히 흐느끼다 감정이 복받쳤는지 꺼이꺼이 숨이 넘어갈 듯이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기회가 찾아왔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한미나 씨. 제가 도와드릴게요.”

장현석 2.

* * *

그녀를 안심시키고 약속을 잡았다.

내 말에 용기가 생긴 걸까? 다행히 약속에 응해줬다.

나는 네온사인이 가득한 곳을 피해.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 어귀에 있는 아주 조용한 카페에들어섰다.

어두운 조명이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내가 주위를 살피며 고개를 돌리자.

카페의 맨 끝 구석에서 눈에 띄게 긴 다리에 흰 피부를 가진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차진혁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녀는 내 눈도 쉽게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목소리로만 인사했다.

“많이 우셨나 봐요.”

“아…. 네.”

얼핏 바라본 그녀의 눈이 퉁퉁 부어있다.

‘눈이 퉁퉁 부어도 이쁘네. 모델은 모델인가.’

한미나는 웨이브 탄 짧은 머리에 귀여운 얼굴을 가진 아직 앳된 티가 가득한 어린 모델이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이야기를 못 했네요. 그때 상황 다시 들을 수 있을까요?”

“죄송해요. 제가 감정이 북받쳐서.”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동자를 하늘 위로 치켜세웠다.

‘고민하는구나.’

나는 마치 막내 여동생을 보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 사건의 전말을 나에게 말해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에 앞뒤 두서가 하나도 없다.

‘숨기고 있어.’

내가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자.

어깨가 들썩이며 움츠러들었다.

“숨기지 말고 말해주세요. 제 이름을 걸고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내 이름을건다라.

낯간지러운 발언이다.

하지만 이 어린 모델에게는 작은 불씨가 될 터였다.

컬렉션에서 본 내 입지와 한은샘이 나를 대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충분히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거다.

외부인이 생각하는 나는 한은샘이 가장 아끼는 인물 중 하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제가 해결해드릴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 절 신임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정말이죠. 혹시 피해가 저한테 오지는 않겠죠?”

“네. 비밀스럽게 할 겁니다.”

내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마음을 동요시켜야 했다.

“장현석 디자이너 때문입니까?”

추측이지만, 그가 연관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그 소름 끼치는 현상이 나에게 답을 해주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서 다시 이슬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걸렸구나.’

“그게….”

순간 한미나의 가슴속 높게 쌓여 있던 갈등의 벽이 무너졌다.

참고 있던 말을 한없이 내뱉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내 눈동자가 흔들리고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미친 새끼!”

나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입 밖으로 욕설을 뱉어냈다.

생각한 범위를 벗어났다.

한미나의 입에서 나온 건 장현석의 범죄행위였다.

성폭행! 마약(gamma-Hydroxybutyric acid, 속칭 ‘물뽕’)! 사건은 이랬다.

.

.

.

패션위크 시즌 전.

자신의 프로필을 전하러 왔던 그녀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인물이 장현석이었고.

그 뒤로 그녀에게 사적으로 계속 연락해왔다는 거다.

“처음에는 저도 거부했어요. 그런데 계속 차 한잔하자고 그러시길래 어쩔 수 없이 나갔거든요. 이쪽 업계에 소문 안 좋게 나면 일 못 하잖아요.”

“그래서요?”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어요. 그리고 저를 모델로 쓰고 싶다고 자기가 힘 좀 써보겠다고. 거기에 저도 혹했어요.”

그 뒤로 장현석의 말처럼 브랜드 Han의 컬렉션에 한미나가 모델로 발탁이 되었다.

거기까지는 큰 문제가 아니다.

좋은 모델을 쇼에 올리는 것도 디자이너의 능력이니까.

하지만 비윤리적인 일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

부쩍 친해진 둘은 자주 만나 술까지 마시게 되었다.

“저는 정말 선생님으로만 생각했거든요.”

그녀는 목멘 소리로 자신의 처지를 변호했다.

“정말 믿었어요. 매너도 좋으셨고 몸에 터치도 단 한 번도 한 적도 없었어요.”

“근데? GHB인지는 어떻게 아신 거예요?”

“이상하게 술도 빨리 취하고 기분이 몽롱했어요. 기억도 나지 않고요. 그래서 주위에 물어보니….”

“물뽕[GHB]이라고 들은 거군요.”

“네…. 사실 그 일이 있고 사귀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근데 그 뒤로 제 연락을 받지도 않으세요.”

나는 헛웃음이 났다.

한미나의 나이 21살이다.

장현석의 나이는 38살.

말도 안 되는 나이 차이이지 않은가.

가장 큰 문제는 그는 유부남이다.

“어린애를 데리고 개자식이!”

나는 화를 억누르지 못했다.

참고 있자니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라 당장 그에게 달려가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

같은 디자이너로서 수치다.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어린 모델을 겁탈한 것과 진배없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천천히 들으며 질문을 이어갔다.

“미나 씨, 장현석 디자이너 유부남인 건 아세요?”

“그럴 리가. 오피스텔에 혼자 사시던데…….”

내 말을 듣고도 그녀는 믿지 않는다. 아니 부정하고 싶은 거겠지.

생에 첫 남자가 유부남이라니 당연한 반응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녀가 다시 통곡하기 시작했다.

“흑 흑!”

“이거 받으세요.”

나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런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마치 아름다운 여인을 울린 쓰레기라는 눈빛으로.

“어휴 내 팔자야.”

나는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진정되세요?”

“네.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해드리길 원하세요?”

“저 같은 피해자가 안 나오게 그런 놈은 디자이너 평생 못하게 해주세요! 너무 억울해요.”

순간 한미나가 나서 준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나서서 일을 키워준다면 쉽게 장현석을 무너트릴 수 있다.

하지만 한미나의 인생도 함께 무너질 것이다.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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