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느낌이다.”
한하율의 응원에 용기가 생긴 것인지.
두근거리던 심장 소리도 점점 멎어 들었다.
나는 멈추지 않고 무대의 메인 스테이지를 향해 걸어 나갔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그런데 내 등장과 함께 주위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대형 룸의 공기가 서서히 변해갔다.
서울패션위크 3.
* * *
웅성거리는 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힌다.
― 누구야?
― 신인 모델이야?
― 비주얼 장난 아닌데. 어디 소속이야?
― 한하율 기획사 아니야? 비율 장난 아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카메라 셔터의 플래시가 무대 조명을 덮어씌울 정도로 터져 나왔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런웨이에 오로지 집중했다.
‘집중하자.’
나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메인 스테이지에 도착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거리.
나는 그곳에서 포켓에 손을 집어넣고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어색해…….’
나는 최대한 자신감 있게 옷의 포인트가 되는 부분을 보여주었다.
그 순간.
바닥에 설치되어있던 제트 팬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한 바람이 나를 향해 날아들자.
바람에 휘날리는 무언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걸어 나올 당시에는 바닥에 늘어진 느낌만 들어 망토 정도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실크노방?!”
실크노방은 주로 옷의 안감에 사용하는 비치는 형태의 원단이다.
화려한 연출을 위해 준비한 이벤트성 퍼포먼스인 듯했다.
‘아까 결착한 게 이거구나.’
바람이 더욱 강하게 치솟아 오르자.
실크노방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긴 런웨이 무대를 전체를 수놓으며 휘날리니 화려한 연출이 이어졌다.
나는 오랫동안 무대의 중심에 멈추어 자세를 취했다.
‘이제 어떻게 해?’
내가 잠시 고민하던 사이.
여러 대의 제트 팬의 위치가 조금씩 움직였다.
그러자 공중을 수 놓던 실크노방이 회오리치며 내 몸 전체를 휘감듯이 다가왔다.
순간 복부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실크노방이 내 몸에 휘감겼다.
연출의 연속.
“와!”
새로운 반전에 모두의 감탄 목소리가 다시 대형 룸에 울려 퍼졌다.
나는 몸을 돌려 무대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조명.”
일제히 천장에 달려있던 조명이 나를 향해 비추기 시작했다.
나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 다시 한번 일어난 것이다.
휘감겨 있던 화이트 실크노방과 붉은 재킷이 합쳐지며 분홍색 꽃이 피어났다.
‘봄을 입혔네. 정말 인정이다.’
브랜드 Han의 의류디자이너들이 결정한 콘셉트와 디자인에 최선을 다했다는 결과였다.
끝없이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고 수백 명의 박수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나는 의류디자이너들의 노고를 기리며 더욱 당당히 런웨이를 마무리했다.
‘잘한 거겠지?’
나는 무대를 마무리하고 대기실로 이동했다.
그때 박한우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수고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나에게 내밀었다.
“이거 봐라.”
“네. 뭘?”
“너 벌써 인터넷에 올라왔어. 이러다 디자이너 그만두고 모델 되는 거 아니야?”
“설마요.”
“스타 돼도 나 몰라라 하지 마라.”
나는 박한우의 휴대전화를 받아 화면을 응시했다.
― 브랜드 Han에 등장한 최강 비주얼 신인 모델.
― 화려한 의상도 어둡게 만든 모델의 등장.
― 브랜드 Han의 디자이너? 모델?
인터넷 뉴스 하단에 있는 실시간 대화창도 난리가 났다.
― 누구야 아이돌이야?
― 모델이겠지 아이돌들 키 다 작은데 무슨.
― 완전 내 신랑감이야.
― 얼굴 장난 아니다. 이름 뭐야?
― 인기 모델 될 거 같은데. 완전 대박이다.
― 와 개 존잘.
추측성 글과 내 얼굴을 평가한 내용이 댓글 형식으로 계속해서 올라왔다.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별거 아닌 거 같은데.”
“뭐가 별것 아니야. 이 정도 관심이면 큰 이슈야.”
“전 아니에요. 저는 디자이너인데요.”
나는 휴대전화를 건네주고 아무렇지 않은 듯 탈의실로 들어왔다.
잠시의 관심일 뿐 패션위크가 끝이 나면 사라질 관심이라 생각했다.
* * *
화려했던 메인 의상들의 컬렉션이 끝이 나고 이제 가방을 소개할 시간이다.
김경희의 회계 비리 사건이 밝혀지고 자연스럽게 내 디자인이 선택되었다.
그로 인해 일은 많아졌지만, 기분이 좋았다.
“금속 장식 업체부터 알아봐야겠네.”
가방을 만드는 과정은 복잡하다. 디자인만 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품평회를 거쳐 가방에 들어가는 금속 장식부터 실, 가죽, 가방 안에 들어가는 부자재까지.
디자이너가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롯이 디자이너의 책임이기에.
한 치도 실수하면 안 된다.
“일정은 괜찮겠어?”
“네 문제 없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네.”
한은샘은 수시로 나를 찾아와 상황을 확인했다.
1년 차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랜 세월의 경험을 가진 또 다른 인격체다.
하나도 문제 될 게 없었다.
주위에 시선도 곱지 않았기에 나는 더 부지런히 컬렉션 날짜보다 빠르게 가방을 생산 일정까지 끌어올렸다.
“이제 시작인가.”
나는 선반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생각 이상으로 가방이 잘 만들어졌다.
봄의 화사함이 가방에서 묻어났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브랜드 Han의 단아함과 어우러졌다.
그때 한은샘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정말 잘 나왔네. 고생했어.”
“별말씀을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1년 차에 이 정도 퀄리티라니…….”
“…….”
“생산 물량은?”
“고객들 구매 예약에 맞춰서 바로 나올 겁니다. 총괄 디렉터님과 이야기 끝냈습니다.”
“좋아.”
한참이나 한은샘은 그곳에서 가방을 보며 혼잣말로 연신 감탄사를 뿜어냈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차 혼자서 모든 걸 해냈다는 거에 놀라워하는 눈치다.
1년 차가 아닌 오랜 경력을 가진 디자이너도 하기 힘든 일을 내가 해냈다.
가방의 퀄리티는 시간이 걸리는 만큼이나 좋아진다.
왜냐하면, 부자재를 선택하는 데 많이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일정한 가죽의 평면에 부자재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 단단함, 볼륨감, 느낌까지 많은 요소가 변한다.
이 모든 게 가방디자이너의 영향력이라 볼 수 있다.
“마지막까지 잘하자.”
한은샘은 짧게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 뒤 신지혜의 목소리가 헤드셋을 통해 전달되었다.
“가방컬렉션 바로 들어갑니다. 준비하세요.”
머리와 메이크업을 고치고 나온 모델들에게 차례로 가방을 전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모델들에게 살짝 고개 숙이며 마음에 우러나오는 말을 전했다.
정말 잘되길 바랐다.
차진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처음으로 디자인한 가방이 많은 사람 앞에 서는 순간이었다.
“가볼까.”
나는 모델들과 함께 무대 뒤에 있었다.
관객들의 반응을 바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기에.
그때 다시 헤드셋에서 신지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로 이어서 시작해.”
그녀의 알림에 모델들의 런웨이가 이어졌다.
내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갔다.
오랜 경력을 가지고 많은 경험이 있어도 고객에 반응은 매번 다르기에 긴장되는 순간이다.
가방을 들고 있던 모델들이 하나둘 빠져나갔다.
그때.
한하율이 다시 내 옆에 다가왔다.
“반응은 어때요?”
“네?!”
“저 가방들 다 디자이너님이 하셨다면서요.”
“그걸 어떻게?”
“선생님이 말해주시던데요. 엄청나게 기대하시면서.”
“아 그래요.”
한은샘도 이번 가방 라인에 많은 기대를 비춘듯했다.
회사의 인원이 아닌 외부인에게까지 이 사실을 알렸다는 게 새삼 놀랍게 다가왔다.
“저도 아까 가방 봤는데 너무 이쁘던데요. 그래서 바로 하나 구매하려고 구매창구에 가서 이름 적어뒀어요.”
“감사합니다.”
“제가 웬만한 브랜드 버킷 백은 다 봤는데. 브랜드 Han에서 만든 이번 버킷 백은 엄청 특별해 보여요. 리미티드 한 느낌이 강하더라고요.”
“네…… 뭐.”
한하율의 칭찬이 달콤하게 들린다.
그녀는 탑 모델로 세계 각국의 브랜드의 가방을 봐왔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는 건 분명 좋은 징조다.
그리고 그때 마침.
와아아아!
함성 소리가 내 귀를 뚫고 대기실까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대기실에 있던 브랜드 Han의 직원들도 모두 무대 뒤에 모여들었다.
“뭐야. 무슨 소리야?”
“그게…….”
나는 차마 내 입으로 말을 잊지 못했다.
관객의 환호 소리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카메라 플래시 샤워.
그리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패션잡지 디렉터들까지.
오랜 경험으로 빗대어 본다면 엄청난 성공이다.
마지막 모델이 런웨이를 빠져나오고 잠시의 대기시간이 지나갔다.
대형 홀의 분위기는 아직도 여전히 뜨거웠다.
그리고 바로 피날레 무대가 이어졌다.
“진혁아.”
“네 사장님.”
“일로와.”
“네. 무슨?”
피날레는 브랜드의 수장을 주축으로 모델들이 화려한 의상으로 마지막을 빛내는 순간이다.
그런데 한은샘이 내 손목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같이 나가야지. 가방디자이너로서.”
한은샘이 주축으로 나와 박한우가 양쪽에 위치했다.
그리고 걸어 나갔다.
와아아아아!
짝짝짝!
끝없이 쏟아지는 박수 소리와 함성이 귀를 간지럽힌다.
그리고 한은샘이 마이크를 관객들에게 말을 이었다.
“모두 브랜드 Han의 컬렉션에 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브랜드 Han은 한층 더 도약하기 위해 새로운 아이디어와 디자인으로 이번 컬렉션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남성 의류 시장에도 진출할 생각입니다. 많은 관심 그리고 사랑 부탁드립니다.”
역시나 한은샘은 경영자의 자질이 다분했다.
확실한 광고효과를 한마디 말로 얻어냈다.
사람들의 인식을 한 번에 바꾸었다.
이제부터 브랜드 Han은 여성복에 국한되지 않는 브랜드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돌발 질문에도 그는 잘 대응했다.
“사장님 옆의 분들은 소개 안 해주시나요?”
그때 잡지사의 디렉터로 보이는 기자가 한은샘에게 질문했다.
“아 깜빡했네요. 여러분 이쪽은 브랜드 Han의 의류 전체를 담당하고 있는 박한우 디자이너입니다. 이번 컬렉션의 의류 모두를 최상의 컨디션으로 이끌어준 디자이너죠.”
“그럼 오른쪽에 계시는 분은 모델분이신가요?”
“아. 아닙니다. 마지막 런웨이를 빛내준 차진혁 디자이너입니다. 이번 성공적인 컬렉션 쇼는 이 두 사람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자리에서 모두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습니다.”
피날레 모든 영광이 쏟아지는 자리다.
그곳에서 한은샘은 성과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냉정할 때도 있지만 탐욕스럽지 않았다.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려도 무방하지만 나누어주었다.
그의 마음 씀씀이를 알 수 있었다.
‘나도 하기 힘든 일인데.’
북받쳐오는 감정을 억누르는 그때.
당황스럽게 잡지사 디렉터와 연예부 기자들의 질문이 나에게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