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00)

“상진아. 어서 말해 이거 보통 일 아니다. 나는 네가 했다고 믿지 않는다 아니 했어도 네가 직접 했을 리가 없어.”

“사장님…….”

한은샘은 김상진 대리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성격이 조용하고 소심할지언정 누구에게 피해를 줄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던 김상진 대리가 입을 열었다.

“저도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두 업체에서 자료가 와서 팀장님한테 승인받고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하려고 했는데.”

김상진은 다시 한번 김경희를 쳐다본 후 말을 이었다.

“현석이가 갑자기 찾아와서 돈 필요하지 않냐고 이번에만 모른 척하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어머니 수술비가 필요해서 잠시 눈이 멀었나 봅니다.”

“계속 말해봐.”

“제가 그래서 현석이 보고 누구 지시냐니까. 김경희 총괄님이 시켰다고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승진도 시켜주고 어머니 수술비도 해결해 준다고 해서…….”

김상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든 시선이 그 자리에 있던 김경희에게 쏠렸다.

김 회장도 몰랐다는 눈치였다.

한은샘과 신지혜, 회계팀장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신지혜가 말을 이었다.

“회장님 이거 범죄입니다. 경찰에 넘겨야 합니다. 액수만 해도 몇십 억은 될 겁니다.”

“…….”

한은샘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김 회장이 먼저 지고 들어오길 기다렸다.

조금 전 상황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어떻게 나오실 겁니까 회장님.’

더는 매출 부진으로 자신의 목을 옭아맬 수 없다.

임시주총을 연다고 해도 자신이 이번 일을 물고 늘어지면 주주들은 한은샘의 손을 들어 줄 거다.

만약 이번 일이 소문이라도 난다면 김 회장은 엄청난 손실과 언론에 몰매를 맞을 각오를 해야 할 터였다.

“없던 일로 하세.”

“너무 쉽게 넘어가는 거 아닙니까? 딸이라서.”

“자네…….”

“더는 경영권 침해하지 마시죠. 그리고 김경희 총괄은 오늘부로 해고입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

김 회장은 김경희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네 밥그릇이 될 텐데 그걸 못 참고 일을 그르치다니.

한숨을 내쉬었다.

“좋… 네! 경영권 침해하지 않겠네. 피해 금액도 지불하지 그러니 이번 일은 없던 거로 하세.”

“알겠습니다. 서류 준비해서 변호사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김경희 총괄 짐은 내가 택배로 다 보내줄 테니까 지금 당장 나가도록 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 회장과 김경희는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한은샘은 둘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지혜야. 나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다.”

“잘하셨어요. 오랜만에 사장님다웠어요.”

“눈물 날 거 같네. 참, 다 늙어서 주책이야.”

“우세요. 저희는 나가볼게요.”

“아…… 그리고 김상진 너도 없던 일로 해라. 그리고 어머니 병원비는 내가 내줄 게 다음에 돈 벌면 갚아라.”

정작 울음이 터진 건 김상진 대리였다.

자신이 행한 일이 부끄러웠고 한은샘의 마음을 몰랐던 게 한스러웠다.

“울긴 왜 울어 나가.”

“감사합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정말.”

“그래.”

한은샘은 오랜 시간 자신에 대한 무력함을 원망했다.

“그때 투자만 받지 않았어도.”

한은샘이 브랜드 Han을 시작할 초창기.

갑자기 찾아온 김 회장에게 투자 건을 제시받았다.

그런데 그게 독약이 될 줄을 몰랐다.

계약서에 공동 경영조건이 적혀있었다.

“그땐 나도 어리숙했지.”

김 회장의 브랜드 Han 지분은 35%

한은샘과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제 주주들을 건드릴 수 없을 테니 당분간은 안심해도 된다.

“이 관계도 지긋지긋하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진혁이 만든 가방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다 잘됐어.”

한은샘은 가방디자인 서류를 들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진혁에게 다가갔다.

“차진혁.”

“예 사장님.”

“잠시 사무실로 와라.”

“네.”

나는 입꼬리가 올라간 한은샘을 보며 걱정했던 일이 잘 풀렸다는걸. 알 수 있었다.

“앉아라.”

“예.”

“흠…….”

한은샘은 쉽게 말을 꺼내지 않고 뜸을 들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나를 놀라게 했다.

“고맙다.”

“네?! 무슨.”

“네가 그 자료들 찾은 거라며 지혜한테 전달받았다. 또 신세 지는구나.”

“신세는 무슨요. 해야 할 일을 한 거뿐인데요.”

“참 신기하단 말이야. 다들 모르고 지나가는걸. 막내인 네가 어떻게 그렇게 잘 찾아내는지.”

그건 제가 신비한 힘이 있어서입니다.

나는 그제야 확신했다.

소름이 돋아나는 어두운 빛은 조금이나마 위험한 걸 인지시켜 준다는 걸.

“좋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쁘지는 않네.”

둘은 한참 동안 묵묵히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그때 한은샘이 적막을 깼다.

“잠시만.”

한은샘은 수화기를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연결했다.

“어어. 총괄 디렉터 바꿔줘.”

무슨 일이야? 나는 통화에 귀를 기울였다.

“진혁이 가방디자인 말이야. 응, 응. 그래 그렇게 해.”

한은샘은 별말 없이 수화기를 끊었다.

나는 내용이 궁금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가방디자인. 네 이름으로 특허 등록될 거다.”

“네?!”

“놀라기는 네가 한 디자인이고 우리는 도와준 게 없는데 당연하잖아. 상이라고 생각해.”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럼 이제 나가봐.”

“감사합니다. 사장님.”

나는 사장실을 빠져나와 자리로 돌아왔다.

그때 옆에 있던 선배가 슬며시 다가와 말을 걸어온다.

“안에서 뭐래? 웃음소리가 밖에도 들리더라.”

“별 이야기 안 했습니다. 그냥 제 디자인 제 이름으로 디자인 특허등록 해주신다고.”

“뭐!”

선배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사무실 전체가 울릴 정도였다.

그 소리의 여파로 주위에 있던 선배 디자이너들의 관심이 한꺼번에 나에게 쏠렸다.

그때 선임디자이너가 소란스러운 상황에 나타났다.

“뭐야? 무슨 일이야?”

“선임님 가방디자인 있지 않습니까. 그걸 진혁이 이름으로 등록한다는데 진짜입니까?”

“나도 처음 듣는 소리인데?”

박한우가 신기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어서 대답해보라는 눈빛.

“사장님이 제 이름으로 등록해주신다고 총괄 디렉터님한테 지시하셨습니다.”

“흠…… 그럴 수 있지. 사장님 성격이면.”

“…….”

“그럼. 디자인 로열티를 받는다는 소리겠고”

“아직 그거까지는 이야기 못 들었습니다.”

“그렇게 될 거야.”

회사에서 벌어진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박한우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당연한 결과라 여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돈 많이 벌겠다. 1년 차에 이런 일이 다 일어나네. 부럽네.”

“그러게. 누구는 몇 년 동안 박봉으로 일하는데. 부러워.”

“빽 있냐? 뭐 이렇게 편파적이야 우리도 똑같이 일하는데.”

선배들의 대화가 불쾌하게 들려왔다.

그럴 것이. 매우 특별한 경우였고 대부분 회사 내에서 벌어진 일을 알 수 없었다.

오해만 커지는 기분이다.

나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선배들의 질문 세례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다들 모여서 막내 괴롭히는 거야?”

“아…. 아닙니다.”

“뭐가 아니야. 내가 다 들었는데. 실력이 없으면 본인을 탓해야지, 안 그래.”

“…….”

“다들 일이나 해. 막내 괴롭히지 말고.”

“네.”

갑자기 나타난 신지혜는 나를 대신해.

모두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서울패션위크 1.

* * *

서울 SPRING & SUMMER 2020 패션위크가 개막했다.

봄과 여름을 알리는 패션쇼로 올해의 트렌드와 각 브랜드의 디자인을 알리는 자리다.

유럽과 뉴욕에서 9월 중순부터 시작해 10월 초에 막을 내린다.

그 후. 서울패션위크가 10월 중순부터 시작하게 된다.

“진혁아, 앞에 가서 커피 좀 사 와.”

“네?! 음료 다 준비되어있는데?”

“잔말 말고 사 와.”

“네…….”

나는 선임디자이너 박한우의 말을 듣고 겉옷을 챙겼다.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뭘 금방 갔다 와. 천천히 와.”

내가 웃어 보이며 몸을 돌리는 그때.

총괄 디렉터의 무전이 헤드셋을 통해 전달되었다.

“리허설 무대 시작 전이야. 다들 스탠바이.”

나는 스탠바이라는 말에 움직이려던 발이 멈추었다.

“차진혁. 빨리 커피 안 사 와!”

박한우가 나를 향해 손사래 치며 소리 질렀다.

얼른 이 지옥을 빠져나가라는 신호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나와 일하는 나에게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을 내어 주는 듯했다.

“매번 감사하네.”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가는 시점이다.

한 달 동안 정말 많은 일이 벌어졌다.

총괄디자이너 김경희가 회사를 나갔고 내 이름으로 가방디자인의 특허가 등록되었다.

순조롭게 회사가 돌아가는 듯했으나 나로 인해 문제가 터져 나왔다.

“저희도 디자인 특허 등록해주십시오.”

“무슨 말 하는 거야! 여기는 회사야. 그건 회사 나가서 네가 직접 디자인 특허 등록해!”

“진혁이는 되고 왜 저희는 안되는데요.”

“개인 디자인을 회사가 산 거야. 개념을 똑바로 알고 말하란 말이야.”

신지혜가 당일에 다녀간 이후.

선배 디자이너들은 더욱 예민해 졌고 박한우에게 항의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내가 생각해도 엄청 파격적인 조건이다.

잠시 그날을 회상한다면.

“진혁아. 네 이름으로 특허 등록되면 우리 쪽에서 로열티를 줘야 할 거 같은데. 어느 정도 생각해?”

“그것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아서요.”

“그럼. 계약 기간 2년에 2% 정도면 어때?”

나는 흠칫 놀라며 신지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2%! 엄청난 혜택이다.

브랜드 Han의 의류는 중·고가 의류에 속한다.

그런 만큼 판매 부수의 2%라면 엄청난 로열티가 보장된다.

그리고 디자인 특허 등록에 드는 비용도 회사 모두 해결해 주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그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원해서 좋네. 그럼 서류 작성하고 다시 연락해줄게.”

그 말을 들은 선배들의 시기와 질투.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는 불공정하다는 이유에 디자이너 몇몇이 계속해서 항의해왔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모든 화살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중 가장 나를 괴롭히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가방 디자이너 장현석.

그는 김상진 대리와 함께 한은샘에게 용서받았다.

자신도 피해자라며 한은샘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고 들었다.

“아직 정신 못 차렸네.”

김경희가 회사를 나가며 또 한 명의 리틀 김경희를 두고 떠난 거 같다.

“두고 보자.”

그는 김경희 옆에서 아주 많은 걸 배운 듯했다.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나를 괴롭히기 위해 사람들을 회유하고 질투심을 부추겼다.

“디자인 프리미엄도 받는 놈이 우리보다 일을 더 많이 해야지.”

“…….”

“왜 말이 없어. 기분 나빠?”

“아닙니다.”

“잘하자. 사장님 배경 믿고 나대지 말고.”

그런 이유에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던 나의 숨통을 트이게 해준 사람이 박한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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