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디자이너가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김경희는 아직도 분이 삭히지 않았는지 떨리는 손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저예요.”
* * *
한은샘의 지시를 받은 지 이틀이 지났다.
나는 기초 시안을 어떻게 변형시킬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한은샘은 의류디자인에 많이 치중된 디자이너다.
그로 인해 가방 디자인 자체는 세부적으로 만들지 못했다.
기초 스케치 자체가 엉망이다.
“너 혼자 기초까지 다잡으려면 어려울 거니까. 기존에 기초 시안 준거에서 변형시켜봐. 이상하게 만들지 말고.”
나는 이 말에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한은샘이 내민 가방 초안은 버킷 백으로.
입구를 끈으로 쪼이는 형태에 어깨끈으로 편하게 들고 다니는 가방으로 실용성이 뛰어나고 고객층이 광범위하다.
큰 매출을 기대하는 듯 보였다.
많은 브랜드가 만들었고 대중적인 가방 중 하나다.
그만큼 특색을 잡기도 변형을 하기도 쉽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다시 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다시 가서 말해볼까?”
나는 브랜드를 창립하기 위해 많은 디자인을 수도 없이 만들어 두었다.
자료를 데이터화하지 않았지만, 기억 속에 모두 잠들어 있다.
기억 속에서 하나를 가져와 브랜드 Han의 색을 이쁘게 입힌다면 뛰어난 디자인이 나올 게 분명하다.
욕구가 강하게 차오른다.
“아니다. 무리하지 말자.”
현재는 너무 뛰어나도 불안한 입장이다.
하지만 너무 안일한 디자인을 제출할 수도 없었다.
나는 중간 정도의 실력을 보여주기로 결정했다.
“너무 흔해서 변형하기가 쉽지가 않네.”
나는 고민 끝에 시장조사를 선택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답답할 때 나는 밖으로 나가서 생각을 정리한다.
그런 이유에 선임디자이너인 박한우를 찾아갔다.
“저 시장조사 좀 하고 오겠…….”
그때였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아, 아니요. 시장조사 좀 갔다 오겠습니다.”
“갔다 와.”
“네…….”
“왜 멍하니 서 있어. 할 말 있어?”
나는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눈앞에 어둠을 머금은 검붉은 빛을 보았기에.
가방디자인 1.
* * *
박한우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 더미.
그곳에서 소름 끼치는 검붉은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혹시 저 서류.”
“이거? 이익·차익 분석표랑 재고 전산 정리해둔 건데 왜?”
“아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
“싱겁긴 나가봐.”
나는 사무실을 빠져나오며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검붉은 빛이었어…….”
나는 잠시 생각을 내려두었다.
찝찝한 마음은 들었지만,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단 시장조사를 갔다 와서 알아봐야겠어.
“인사동으로 가주세요.”
분명 어두운 빛이 일어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VOKE 잡지도 그랬기에.
“일단은 시장조사부터.”
나는 오랜 외국 생활로 한국문화를 많이 잊어버렸다.
그리고 한국의 소비자가 원하는 디자인을 알아야 했다.
“오호 재미있는 게 많네.”
경복궁 인근의 인사동 쌈지길.
관광명소로 외국인에게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아이템이 많은 곳 중 한 곳이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전통 물품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옛날 생각나네.”
그때 익숙한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도장?”
예전에 보았던 나무 도장이 아닌 돌과 옥의 질감을 가진 도장이 가판대에 즐비했다.
“이쁘다.”
구경 중인 나에게 가게주인이 곁눈질하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아이고 나는 연예인이 우리 가게 놀러 온 지 알았네. 하나 골라.”
“네?!”
입에 발린 말일지도 모르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사장은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하나 골라봐. 요새는 장식용으로도 많이 사.”
“장식용이요?”
“응. 부모님 하나 사다 드려 좋아하실걸.”
나는 문득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을 가족이라 생각하는 두 사람에게 작은 선물을 하고 싶었다.
그게 이 몸의 주인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이기에.
“골라봐.”
“그럼 이걸로 주세요.”
나는 두 개의 화려하고 커다란 도장을 골라 가게주인에게 넘겨주었다.
두 개의 도장은 세트로 만들어져 겹치면 화려한 거북이 문양이 만들어졌다.
“거북이가 장수를 상징하는 거 맞죠?”
“맞아. 부모님 드리려고 그러나 보네?”
“네, 뭐.”
“어이구 효자네. 부모님이 건강부터 생각하고.”
나는 사장의 말에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어색하고 가슴속에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잇지 못했다.
시간이 흐른 후.
도장 가게 사장은 나에게 이쁘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포장비는 서비스야.”
“감사합니다.”
이후에도 한참 동안 인사동을 돌아다녔다.
그렇지만 아직 만족할만한 소재를 찾지 못했다.
“없는 건가. 연관성을 찾으려니 머리가 아프네.”
한참을 고민하며 돌아다닌 나는 인사동 중심권을 벗어났다.
길을 헤매다 좁은 골목을 지나가는 찰나.
골목 어귀에 있는 허름한 액세서리점을 발견했다.
“이런 외진 곳에도 잡화점이 있네.”
나는 그곳으로 발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맑은 종소리가 나를 맞이했다.
마침 종소리를 듣고 가게주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작은 쪽방에서 걸어 나왔다.
“어서 오세요.”
주인은 들어오는 나를 본 후.
짧게 인사를 남기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구경 좀 할게요.”
“그러시구려.”
퀴퀴한 냄새.
오래된 문방구의 향이 내 코끝을 간지럽혔다.
허름한 가게 안에는 인사동 중심가에서 파는 물건들로 가득했다.
“이번에도 허탕인가?”
나는 망연자실하며 가게를 이리저리 구경했다.
그런데 그때.
“와! 이게 다 뭐야.”
벽과 벽 사이로 나누어져 있는 가게 반대편 천장에는 형형색색의 비단들이 매달려 있었다.
“또?!”
순간 밝은 빛무리가 내 눈동자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영상이 흘러나왔다.
전에 보았던 아름다운 여인은 온데간데없었지만 푸른 하늘에 화려한 비단이 펼쳐져 마치 오로라 같은 풍경을 자아냈다.
푸른 하늘과 비단이 합쳐져 풍경 자체가 몽환적이다.
현재의 마음을 표현하자면.
“아름답다.”
나는 영상의 풍경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영상이 사라졌다.
‘아쉽네.’
내 눈앞에 비단으로 만들어진 수백 개의 액세서리가 나타났다.
“저거다!”
복주머니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버킷 백과 많이 닮았어.”
내가 천장을 하염없이 보고 있으니 느닷없이 가게주인이 다가왔다.
“뭐혀?”
“네?!”
“뭐혀냐고!”
그녀는 어머니 보다 조금 더 연배는 많아 보이지만 아주 단아해 보였다.
“구경 중인데요. 너무 이뻐서 정신이 팔렸나 봐요. 근데 저건 복주머니처럼 안 생겼네요?”
내가 가리킨 건.
커다란 가방으로, 비단으로 만들어진 보스턴백이었다.
하지만 형태만 그러하지 위가 훤하니 오픈되어 있었다.
그녀는 내의 질문에 흐뭇한 미소를 띠며 답해주었다.
“저거? 보는 눈이 있구먼. 저것은 내가 만든 것이여. 저것도 줄로 쪼면 복주머니처럼 머리가 쪼이게 되제.”
나는 눈에 들어오는 몇 가지를 더 가리켰다.
“그럼 저것도?”
“저것도 내가 만들었제. 비단으로 손수 다 만든 거여. 왜 하나 사 갈겨?”
“네…… 뭐.”
마지막으로 내가 가리킨 건.
비단으로 만들어진 버킷 백과 아주 흡사한 모양의 복주머니였다.
어깨끈을 만들어 편의성을 올린 점과 입구를 열고 푸는 느낌이 아주 비슷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만든 에코백, 핸드백 느낌의 복주머니도 나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었다.
형태를 변형시키고 좋은 가죽을 겸한다면 고급 여성용 가방으로 전혀 손색이 없었다.
‘재료랑 적절한 금속제를 쓰면 상품성은 차고 넘치겠어.’
나는 그제야 생각을 정리하고 아주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복주머니 두 개를 구매한 후 가게를 빠져나왔다.
“이것도 같이 드려야겠네.”
선물용 도장 두 개와 이쁜 비단으로 만든 복주머니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나는 이제야 한은샘의 시안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완벽한 가방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기대되네.”
* * *
남은 시간 동안 밤을 지새웠다.
다행히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가방 디자인을 완성했다.
“드디어.”
인사동을 갔다 온 후.
여러 아이디어를 혼합해가며 여러 디자인을 만들어나갔다.
“다들 깜짝 놀라겠지?”
나는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목덜미를 주무르며 방을 빠져나왔다.
그 순간 인쇄되어 나오는 시안에서 강한 빛이 번쩍였다.
.
.
.
나는 강하게 밀려드는 갈증에 물병을 꺼내 그대로 들이켰다.
그때 안방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