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00)

“한번 보시죠.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하셔야 할 겁니다.”

한순간 그녀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과 다르게 흘러나오는 대답은 놀라웠다.

“이게 왜요?!”

“보면 모릅니까. 총괄이 들고 온 디자인이 이 가방과 다른 게 뭡니까!”

“당연히 다르죠!”

“금속 장식과 소재를 바꾸고 디자인을 약간 변형시켰다고 다른 디자인이 됩니까?”

김경희는 한은샘의 말을 듣고 손을 부르르 떨며 나를 응시했다.

모든 원망을 담은 눈빛을 쏟아 보내는 듯했다.

‘왜 날 꼬나봐 자기가 잘못해놓고.’

나는 김경희를 보며 한심하다는 생각이 가득 차올랐다.

그때 한은샘은 내 이름을 불렀다.

“차진혁.”

“네, 사장님.”

“네가 뭐가 잘못됐는지 말해봐.”

“제가요?!”

“그래 이 잡지 네가 들고 온 거 아니야?”

한은샘은 뻔뻔스러운 김경희의 태도에 누군가 해답을 내주길 원하는 듯.

잡지를 들고 온 나를 지목했다.

예상 밖의 전개였다.

‘하…… 미치겠네. 첫날부터.’

김경희를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카피하는 인간을 경멸하기도 하고.

하지만 자주 부딪히는 게 총괄디자이너이기에 조심스럽다.

“어서 말해봐.”

뜸 들이는 내가 답답했는지 한은샘은 어서 말해보라며 부추기기 시작했다.

에잇 모르겠다.

“그러니까…… 다른 건 모르겠지만 가방 디자인 최종 시안 자체가 저희 브랜드 Han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순간 내 발언에 모두가 깜짝 놀라며 한숨을 내 쉬었다.

조금만 더 참았어야 했다는 저 표정들.

그리고 모두 고래 싸움에 끼어든 나를 안쓰럽게 쳐다본다.

회의장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역시 막내는 숨 막히는구나.’

카피디자인.

* * *

“막내 따위가 여기가 어디라고 건방지게!”

김경희는 어떻게든 상황을 빠져나가려 몸부림쳤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내 옆에 디자인팀 선배가 볼펜으로 연신 내 허벅지를 눌러댄다.

어서 사과하라는 의미인 듯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뱉은 말을 주워 담을 만한 성격도 아닌데 무슨.

‘정말 뻔뻔하네.’

나는 카피디자인에 대해 엄격하고 디자인에 대한 자부심도 강한 편이다.

직급을 막론하고 김경희 같은 카피 디자이너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다.

‘김경희 네가 문제구나.’

그제야 나는 다이어리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문제의 근원이 되는 인간을 찾은 느낌이 확 들었다.

“저는 제 의견을 말씀드린 겁니다. 더 큰 문제는 카피 아닙니까?”

더는 카피에 대해서 묵과할 수 없었다.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안 참지.’

서로 물러설 곳도 없었다.

나는 김경희를 나락으로 떨어트려야 속이 시원할 거만 같아서 속내를 말해버렸다.

카피를 언급하는 순간.

내 말은 파급력이 크게 다가왔다.

김경희의 얼굴 전체가 붉게 달아올라 터져 버리기 일보 직전으로 변했다.

악에 받쳤는지 나를 향해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어린 새끼가 뭘 안다고! 내가 한 디자인이야!”

“총괄님만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 같은데요.”

그때 김경희가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눈을 피한다.

나는 삭막한 분위기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총괄님 가방 디자인 2000년 다올의 새들 백의 이미지를 많이 참조하셨네요. 아닌가요?”

“건방진 새끼! 증거 가져와 내가 카피했다는 증거.”

앞에 뻔히 잡지에 실려있는 자료가 있는데도 뭘 가져오라는 건가?

그때 계속되는 그녀의 뻔뻔한 태도에 참다못한 한은샘이 나 썼다.

“그만하시죠! 밑에 애들한테 안 부끄럽습니까?”

회의실 분위기는 더욱더 고조되어갔다.

김경희는 한참을 식식거리다 더는 말을 잊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 누구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방해꾼도 사라졌으니. 대책 좀 세우자. 진혁아 아까 카피디자인이 우리랑 맞지 않는다고 했던 말 다시 해봐.”

“총괄님이 들고 오신 카피디자인은 마치 억지로 브랜드 Han의 색을 다올의 새들 백에 입힌 듯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럼 네가 다올의 새들 백에 브랜드 Han의 색을 입힌다면 안 불편하다는 거야?”

“네.”

“하하하. 졌다 졌어! 우리 막내 디자이너가 많이 성장했나 보네.”

한은샘의 웃음소리가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아주 멋지던데 잘했어. 디자이너도 소신이 있어야 크게 되는 거야.”

“감사합니다. 사장님.”

* * *

한은샘은 볼펜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침묵을 깨고 한 가지 제시안을 발표했다.

“가방 디자인 새로 해야 한다는 건 모두 알지?”

“…….”

“이 디자인으로 패션쇼 열면 엄청난 이미지 타격을 입을 거다. 평생 이미지 복구 안 돼. 만약이지만 디자인 소송 걸리면 정말 끝장이야.”

한은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브랜드는 이미지 싸움이다.

이미지를 쌓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에 한은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다시 하자.”

순간 의류 파트 디자이너와 MD 부서 직원들까지 난색을 보였다.

시간적 문제가 가장 큰 이유였다.

“사장님! 시간 없는 거 아시잖아요. 카피 부분만 수정하던지 기존 가방 디자인 변형해서 생산하시죠. 미루기에는 리스크가 큽니다.”

“안 돼! 그러면 시장에 파는 가방보다 못해.”

“하지만…….”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MD 부서의 크리에이티브디렉터 소위 총괄 디렉터 신지혜가 나섰다.

패션 회사에서 사장보다 더 힘을 가지는 존재 중 하나다.

기획, 관리, 이벤트, 생산까지 모든 걸 통제하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긴 생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30대 중후반의 나이지만 20대 후반의 미모를 유지하고 있어 아름다웠다.

“사장님. 물량생산 늦어지면 유통도 자동으로 늦어지고 판매율 확 떨어집니다. 저는 반대입니다.”

“그 정도 손해는 감수해야지.”

“손해 범위를 벗어나서 생산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생산 스케줄 조정 안 돼?”

“어려울 거 같습니다. 생산업체는 저희 말고 다른 회사 스케줄까지 합산해서 생산하는데.”

“그렇긴 하지만…….”

총괄 디렉터 신지혜는 한은샘에게 현재의 위험성을 거침없이 알렸다.

“저희 스케줄만 붕 떠 버리면 업체에서 생산거부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끝으로 밀려서 초기물량 안 나옵니다.”

“그 문제는 나도 생각하고 있는 거야. 조금 미룰 수 있잖아?”

“업체에서 그렇게 해줄지…….”

모두가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듯했다.

생산에 있어 디자이너보다 눈이 밝은 사람이다.

한은샘도 그의 의견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솔직히. 사장님 제외하고 가방 디자인하는 사람은 김경희랑 현석이랑, 막내인 진혁이뿐인데. 다시 만든다고 높은 퀄리티 못 만듭니다. 그냥 수정안으로 생산하시죠.”

“10일!”

“네?!”

“10일 정도만 미루자. 너 그 정도 능력은 있잖아”

“하…….”

한은샘은 확고했다.

신지혜도 그를 오래 봐왔기에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MD팀은 무대 기획이랑 모델 정보, 광고 기획 다 내 사무실로 가져와 줘.”

“알겠습니다.”

“선임디자이너는 바로 내 사무실로 오고.”

한은샘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가던 순간.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웃어 보였다.

나는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했다.

‘인정받은 건가?’

나는 모두가 빠져나간 회의실에 홀로 남아 프레젠테이션 정보를 열람했다.

가방 디자인을 세세하게 살펴보기 위해.

현재 머릿속에 의심의 싹터 버렸다.

“분명 의도가 있어…… 교묘하게 카피했어.”

내가 가장 의심되는 부분은.

김경희가 아무리 디자인에 능력이 없다고 가정을 해도.

총괄디자이너의 측근인 가방 파트 디자이너가 이 부분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오랜 경력의 디자이너였으니까.

“예전의 것이니 그럴 수도 있지만…….”

만약 이번 디자인으로 시즌을 시작했다면 한은샘을 골탕 먹이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브랜드 자체를 무너졌거나 사장이 교체되었을 것이다.

다올에서 디자인 소송이 걸어온다면 엄청난 손해배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냄새가 나.”

나는 자료를 한참 동안 살펴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선임디자이너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정리 다 끝났으면 사장실에 얼른 가봐.”

“사장실이요. 저를 왜?”

“나도 모르니까. 바로 가.”

선임디자이너는 바쁜지 짧게 말을 남기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무슨 일이야?”

나는 바로 건물 꼭대기에 있는 사장실로 향했다.

똑똑.

“차진혁입니다.”

“들어와.”

“무슨 일이신지?”

“뭐가 그렇게 급해 앉아.”

한은샘은 커피 한 잔을 타와 내 앞에 내려놓았다.

“너 그 잡지 어떻게 가지고 왔어?”

“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소름 돋는 검붉은 빛이 일렁거려서 들고 왔다고 말하면 미친놈이 될 거 같았다.

“그게 가방 최종안을 미리 확인했는데 익숙한 디자인이라서요.”

“오호 그래. 눈썰미가 있네. 디자이너는 눈이 좋아야지. 하여튼 네 덕에 큰일 넘겼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한은샘은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이번 시즌 가방 디자인 단독으로 해와 봐.”

나는 당황한 듯 표정을 굳혔다.

막내라는 입장에서 쉽게 기쁨을 표현할 수 없었다.

이런 조건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

“혼자서요?”

“그래.”

“총괄님도 있는데 제가 어떻게…….”

“그건 걱정하지 말고 단독으로 디자인 만들어와. 총괄한테 내가 말할 테니. 할 거야 말 거야?”

“하겠습니다.”

“대답 시원해서 좋네. 잘해와. 나는 잘하는 사람 좋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시즌을 시작하는 가방 디자인을 자신에게 맡겼다는 건 한은샘도 총괄디자이너를 믿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 * *

“젠장! 생산까지 끝나는 일이었는데. 차진혁 저 새끼는 어디서 저 잡지를 구해온 거야.”

“저도 잡지 보는 순간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네가 하는 일이 그렇지!”

“그 잡지만 아니었어도.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하. 미치겠네.”

김경희와 가방디자이너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패션쇼가 시작하기 전.

카피 관련 정보를 언론에 뿌렸다면 한은샘을 무너트릴 좋은 기회였다.

생산까지 마친 물건을 팔지 못한다면? 모든 책임을 오롯이 CEO인 한은샘이 떠안기에.

그런데 진혁의 행동으로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계획차질 생기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내 회사가 될 거 조금 땅기려고 한 건데 무슨 상관이야. 한은샘 따위가 뭘 할 수 있는데.”

“그건 그렇지만 사장님 쪽에서 눈치라도 채면…….”

“자기들이 어떻게 알아. 내가 실수로 카피했다고 하면 끝날 일인데 넌 입단속이나 잘해.”

“네…….”

“일단 나가서 일 봐. 우리 둘이 붙어있어서 좋을 거 없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