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00)

“심각하네. 재고가 소진이 안 되고 있을 줄이야.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하…….”

몇 개월 전 성과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수익 표의 숫자가 어느새 마이너스를 향해가고 있다는 건 회사 재정의 위기가 찾아왔다는 증거다.

“젠장! 뭐가 문제야. 재고가 왜 쌓이냐고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브랜드 Han은 시즌을 마무리할 때마다 아웃렛과 홈쇼핑으로 재고 소진해 왔다.

그래야만 새로운 시즌을 준비할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긴다.

기획, 물량, 광고, 업체까지 엄청난 돈이 들어가기에 유통의 순환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6개월 동안 재고가 쌓여만 갔다.

“뭐가 문제였을까?”

한은샘은 팔꿈치를 책상에 걸치고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F/W 시즌의 매출 부진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재고가 쌓였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때 전화벨이 울려 퍼졌다.

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한은샘의 표정이 한순간 굳어졌다.

“전화 바꿨습니다.”

“한 사장.”

“네…… 무슨 일로?”

“이익차입분석표!”

김 회장은 긴말 필요 없이 단도직입적이었다.

“죄송합니다. 곧 회복될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나랑 장난하나? 내가 바보인지 알아? 당장 임시주총 열 테니. 알고 있게.”

“회장님…….”

현재를 기점으로 정기 주주총회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임시주총이 연다는 건 경영악화로 인해 자신을 CEO 자리에서 쫓아낸다는 이야기다.

김 회장의 엄포에 한은샘의 심경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미치겠네.’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만든 브랜드가 한순간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지켜야 한다. 내 회사야.’

“회장님.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달만 시간을 주십시오. 곧 S/S 시즌 시작입니다. 이후에도 성과가 없으면 회장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내가 손해 본 게 얼마라 생각하나?”

늙은 여우 같은 영감!

손해라니 얼마 전 배당금으로 가져간 돈 만해도 얼마인데.

“부탁드립니다. 한 달이면 복구 가능합니다.”

김 회장은 아무 말을 내뱉지 않았다.

마치 한은샘을 간 보는 느낌이다.

“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거야.”

“감사합니다. 회장님.”

뚜 뚜 뚜!

“하…….”

한은샘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회를 얻었다기보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과 매한가지.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만든 자신을 원망했다.

“일단 원인부터 찾아야 해.”

성장을 하던 회사가 갑자기 매출이 급격히 떨어졌다.

웃긴 일은 한은샘은 이런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숨기지 않고서야…….’

한은샘이 깊은 고민에 잠겨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들어와.”

“사장님 10분 뒤에 최종디자인 회의 시작합니다.”

“그래 바로 갈게.”

* * *

S/S 시즌 서울패션위크 컬렉션에 올라갈 디자인 최종회의가 시작됐다.

나는 회의실에 들어와 테이블 중간자리에 앉았다.

그때 한은샘이 총괄디자이너에게 지시했다.

“의류디자인 최종안 점검부터 하자. 총괄디자이너님 발표하시죠.”

“제가 왜요? 선임디자이너 시키세요.”

“그걸 말이라고…….”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사장에게 저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위아래도 없네… 미친년인가?’

그녀의 당당함과 싹수없는 말투는 마치 한은샘을 아래로 둔 듯 보였다.

총괄디자이너의 행동은 불만 가득한 어린아이 같았고 총괄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있었다.

‘나 혼자서 총괄디자이너네.’

디자인 파트를 지휘하는 총괄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디자인하는 오랜 과정 속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걸 토대로 완벽한 디자인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팀원의 고충을 해결하고, 단합을 만들어 가는 존재다.

‘왜?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 집에 가서 편하게 쉬지.’

내 눈에는 총괄디자이너가 무능력한 욕심 많은 사람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 * *

“시즌의 키워드로 [화려함] [봄] [바람]으로 정하였습니다. 의류 파트는 사장님의 스케치를 기반으로 상품성을 극대화한 최종안 50가지를 결정했습니다. 책상 위에 자료를 참조해 주시죠.”

‘수준 한번 볼까.’

나는 의류디자인 시안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 순간 맑고 깨끗한 밝은 빛이 메인 의류디자인 서류에서 서서히 뿜어져 나왔다.

‘몸이…….’

아까와는 다르다.

몸이 서서히 굳어가더니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멈춘 거 같이 느껴졌다.

“윽!”

그리고 뿜어져 나오던 빛이 내 눈동자를 집어삼켰다.

순간 내 눈앞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뭐야!’

지금 현상을 말로 표현한다면 마치 프로젝트의 빛을 눈으로 직접 주입되는 느낌이다.

그때 내 눈앞에 화려한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암흑 같은 어두운 속을 빠져나와.

우두커니 쏟아있는 원형 단상에 올라섰다.

이후 강한 스포트라이트가 그녀에게 쏟아졌다.

‘저기서 뭐 하는 거야? 저기…….’

그녀는 내 부름에 대답한 걸까?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매혹적인 얼굴로 나에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입고 있던 드레스의 치마를 이리저리 흔들며 진혁에게 한껏 멋을 부렸다.

나는 넋을 놓고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신비한 현상에 어안이 벙벙했다.

마침내 영상이 끝나고 빔이 꺼지듯 눈앞에 있던 그녀의 모습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영상까지 흘러나오네…… 미친.’

영상이 사라짐과 동시에 의류디자인 서류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도 서서히 사라졌다.

‘최종 메인 의류디자인.’

영상 속의 그녀가 입고 있던 드레스는 50가지 디자인 중 가장 메인이 되는 디자인으로 브랜드 Han에서 심혈을 기울인 작품 중 하나다.

나는 그 외에 49가지 디자인도 빠르게 확인했지만, 빛은 일어나지는 않았다.

‘조건이 있다는 건가.’

검붉은 빛과 밝은 빛 그리고 영상이 왜 흘러나오는지 알 수 없는 상황.

그리고 눈앞에 생전 처음 보는 여자.

‘누굴까? 그 여자는.’

처음 본 것 같지 않은 익숙함과 편안함을 주는 여자다.

나는 갑작스럽게 생긴 이 능력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일들에 불안한 마음도 상당 부분 차지했다.

.

.

.

“화려한 색상과 일정한 패턴을 사용해. 화사함을 강조했으며 소매 부분에 꽃봉오리를 연상시키는 퍼프 소매를 채택했습니다. 그리고 봄바람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레이스를 포인트로 주어 여성스러움을 살린 드레스를 만들었습니다.”

“그만, 이 정도면 되겠다. 의류디자인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자 다른 의견들 있어?”

“없습니다. 좋은데요.”

“그럼 가방 디자인도 이어서 하자.”

그때 총괄디자이너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뜬금없이 회의실 정면으로 걸어 나갔다.

“가방 디자인은 제가 하죠.”

한은샘은 마음대로 하는 그녀의 행동에 어이없어 말문이 막혔다.

“하…… 그렇게 하세요.”

모두는 테이블 위에 놓인 가방 디자인 최종안을 확인했다.

“시작하겠습니다.”

그녀는 뻔뻔스럽게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사장님 시안을 받아보고 너무 평범한 소재라는 생각에 많은 변화를 주었습니다.”

“…….”

“이후 트랜드함을 주기 위해 디자인을 변경했고 고급스러운 부분을 살리기 위해 가죽의 소재를 카프 스킨 [송아지 가죽]을 채택했습니다.”

총괄디자이너의 프레젠테이션은 매끄러웠지만 듣고 있는 최종승인자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깎아내리는 듯한 언행의 연속이었기에.

듣고 있는 모두의 인상을 구기게 했다.

‘좋은 디자인이네. 상품성도 뚜렷하고 고급스러워. 근데?’

총괄디자이너가 내민 가방 디자인은 돈이 될만한 디자인이다.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다.

‘어디서 본 거 같기도 하고…….’

가장 꺼림칙한 이유를 들자면 내 눈에 익다는 점이다.

‘잘못 집었나?’

나는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현재 느낌을 표현하자면 고구마를 물 없이 먹은 것처럼 답답했다.

‘답답해.’

내 안목으로 보아 메인 드레스보다 훨씬 더 좋은 디자인이 분명했다.

그때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나는 가슴속에 속 주머니를 힐끔 보았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프레젠테이션을 끝이 나고 한은샘은 아무 말 없이 디자인을 몇 번 더 확인했다.

“나쁘지 않은데. 모두 어때?”

“가방 디자인도 좋은데요.”

“그런가?”

총괄디자이너는 모두의 반응을 확인하고 웃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호응해 줄 수 없다.

“그럼 이대로 생산 시작할게요.”

“그렇게 하시죠. 근데 [카프 스킨]이면 가격대가 상당히 높을 텐데 가격 생각은 해봤어요?”

“기존 가격보다 조금 더 높게 책정할 생각인데 문제 있나요.”

“아닙니다. 그대로 진행하시죠”

둘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가슴이 답답했다.

현재 막내라는 조건에 쉽게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다.

‘곤란하게 됐네.’

이대로 생산이 들어간다면 브랜드에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게 뻔하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결심했다.

그리고 품에서 잡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저…….”

그 순간 디자인팀 인원과 MD팀 인원의 눈이 잡지에 쏠렸다.

“뭐야?”

“갑자기 웬 VOKE 잡지?!”

“설마…….”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선임디자이너가 잡지를 유심히 보더니 놀라며 잡지를 집어 들었다.

“사장님. 이거 한번 보셔야 할 거 같은데요.”

“뭔데? 그래.”

“그게…….”

한은샘은 선임디자이너가 내미는 잡지를 받아 한참은 쉼 없이 넘겼다.

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잡지를 총괄디자이너 앞에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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