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냐고! 왜!”
마음을 진정하려 노력해도 진정되지 않는다.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웠고 여러 감정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다.
.
.
.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최대한 감정을 추슬렀다.
마지막으로 내린 결론은 지난 일을 모두 인정하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다.
가장 짜증이 나는 건 현재 나에게 허락된 건.
이 몸 하나뿐이라는 거다.
“다 끝났어…….”
나는 망연자실하며 멍하니 자리에 앉아 사색에 잠겼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다시 시작하면? 물론 가능해.”
마음속으로 수천 번 질문하고 답했다.
그렇게라도 나를 다독였다.
그렇지만 가슴 속 허탈감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가는 인물.
“차진혁.”
차진혁의 이름이 머릿속에 되뇌는 순간부터 정신이 팔린 듯 방안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이 모든 원인이 차진혁에게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차지했다.
한참 동안 방을 뒤진 후.
잠겨있던 책상 서랍에서 명함 한 장과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브랜드 Han
[의류 디자이너 ― 차진혁]
“패션 디자이너? 하필…….”
나는 명함을 책상 위에 내려두고 다이어리를 펼쳤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차진혁을 알아가려 노력했다.
“쓸데없는 내용뿐이잖아! 쓸데없는 번호는 왜 이리 많아.”
그때 다이어리에 적혀있는 일기와 생각의 메모를 발견했다.
일기 초반부를 읽어 보면.
차진혁은 아버지의 가죽공방을 함께 운영하기 위해 한국대 패션 디자인학과에 진학했다고 적혀있었다.
“한국대 패션 디자인학과라…….”
오랜 디자이너 생활을 하며 두어 번 들어본 학교다.
한국 제일의 대학.
특히 디자인 분야에서 뛰어났다.
“가죽공방을 운영하려고 한국대에 갔다고?”
현실과 매치가 되지 않는 내용에 의아한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노력 한번 가상하네. 공방이야 high school만 졸업하면 되는 거 아냐?”
나는 의구심을 내려두고 다시 일기를 읽어나갔다.
일기의 초반부와 중반부는 디자인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상당히 돋보인다.
그런데 후반부에 들어서며 일기 내용이 차츰 부정적으로 흘러갔다.
너무 급작스러운 전개다.
“알다가도 모를 놈이네. 질렸나?”
내 짧은 생각으로 짐작해 본다면 직장 내 여러 상황이 차진혁을 괴롭힌 듯 보였다.
사회초년생의 모습이 글로 절실히 드러나 있기도 했다.
“1년 동안 뭘 바라는 거야.”
다이어리의 끝은 회사생활 1년 동안의 기록.
아쉽지만 내가 왜 이곳이 있는지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재미없는 놈이네. 쉽게 판단하고 포기하고 더 노력했어야지!”
나는 일기 내용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누구나 막내 생활을 겪는다.
그리고 꿈을 위해서 발전해 나아가야 한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이어리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김서진 디자이너처럼.
“……미친놈.”
* * *
생각과 고민을 털어내고 차진혁을 알아가는 데 모든 시간을 소비했다.
“뭐가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니냐. 대체 뭐 하는 놈인지.”
나는 차진혁의 직장에서 그를 조금 더 알아가기 위해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들. 빨리 일어났네.”
“네…….”
“밥 차려 놨으니까 먹고 가.”
고개를 돌리니 후각을 자극하는 된장찌개와 몇 가지 반찬이 차려져 있다.
순간 군침이 입안 가득 맴돌았지만 멍하니 지켜만 볼 뿐.
쉽게 식탁에 앉지 못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먹어야 하는 밥상을 꿰찬 느낌이 들어서다.
‘아직 어색하네.’
어머니가 현관문을 나서자.
아버지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부스스한 머리에 잠옷 바람으로 진혁에게 말을 이었다.
“벌써 출근하는 거야?”
“네. 일이 있어서.”
“출근 조심히 해라.”
“……네.”
차진혁의 아버지는 짧은 아침 인사를 남기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나쁘지 않네.”
나는 왠지 이들의 아침 인사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기뻤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런 아침 인사를 받아본 적이 얼마 만인가.
‘행복해도 되는 건가…….’
괜스레 상황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어색한 마음을 자신에게도 숨기고 싶었기에.
“나가볼까.”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천재 디자이너 김서진이 아닌 브랜드 Han의 막내 디자이너 차진혁으로.
‘나는 이제 차진혁이다.’
나는 문을 나서는 순간.
김서진을 버렸다.
* * *
중소규모의 개인 브랜드인 만큼 한 사람에게 배당된 업무량이 상당하다.
“끔찍하네.”
그나마 다행인 건 죽기 전 매번 반복해오던 일들이기에 빠르게 업무처리를 해나갈 수 있었단 점이다.
나는 바쁜 와중에 회사의 내부 사정과 세부적인 분위기를 알아나갔다.
‘분위기도 그리 나쁘지 않은 거 같고.’
나는 양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모두 바삐 움직였고, 열정적이다.
그때.
“진혁아 이거 의류 가봉 좀 해둬.”
“네.”
나는 한 선배가 전해준 디자인 초안을 받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반대편에서.
“진혁아 바빠?”
“아니요.”
“그럼 이 서류 복사 좀 해서 선임디자이너 사무실에 가져다 둬.”
나는 출근과 동시에 여러 사람에게 끊임없는 러브 콜을 받았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나쁘게 말해서 동네북이었고 좋게 말해서 막내다.
“차진혁.”
‘일하고 있잖아. 그만 불러!’
그때 또 다른 사람이 나를 불렀다.
‘부르지 마. 못 들은 척할 거야.’
“진혁아!”
“네.”
“자, 서류에 적힌 원단 샘플 좀 찾아와.”
“네.”
신기하게 내 머리는 그들을 거부했지만,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이래서 버릇이 무섭다고 하나 보다.
“그래 얼마나 더 시키나 보자.”
솔직히 반복적인 일에 재미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다시 그때 그 시절로 돌아온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달까?
‘옛날 생각나네.’
나는 맡겨진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 나갔다.
한참 동안 작업이 이어졌고 마무리를 하려는 순간.
선임디자이너가 회의 소식을 전해왔다.
“모두 집중! 패션쇼 최종 디자인 회의 있으니까. 30분 뒤에 회의실로 모여.”
“네.”
“오케이.”
브랜드 Han은 7명의 디자이너와 10명의 MD(기획, 영업, 마케팅), 5명의 회계팀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가 곧 시작되는 S/S 시즌 서울패션위크 준비에 바빠 보였다.
회의내용을 모두에게 전달한 선임디자이너가 멀뚱히 서 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바쁘냐?”
“아니요. 일 다 끝냈습니다.”
“그래? 그럼 부탁 하나만 하자. 자료실 가서 S/S 가방 디자인 잡지랑 스크랩해둔 거. 2년 치 가져와.”
“네 알겠습니다.”
“찾아서 내 자리 위에 올려둬.”
“네.”
‘천하의 김서진이 막내 생활이라니.’
차진혁이 된 서진은 이 상황이 웃길 수밖에 없었다.
샤네르 총괄디자이너가 브랜드 Han의 막내라니.
“재미있는 상황이야.”
* * *
진혁은 지하에 있는 자료실로 이동해. 최신 잡지와 스크랩 정보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때 불편하게 널브러진 잡지들을 발견했다.
“왜 제자리에 안 두는 거야. 어휴.”
잘 정리되어있는 잡지들과 다르게 책장 뒤편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잡지 한 권.
“귀찮게 하네.”
나는 손을 책장 뒤로 비집어 넣어 잡지를 집어 들었다.
“VOKE?”
그때였다.
막내란.
* * *
잡지를 들어 올리는 순간.
잡지에서 어둠을 가득 머금은 검붉은 빛이 서서히 피어올랐다.
놀란 나는 들고 있던 잡지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전신에 소름이 끼쳐 왔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잠시 후.
잡지에서 피어나던 검붉은 빛이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잡지를 바닥에서 주워들었다.
“2000년 다올의 새들 백?”
명품 다올의 새들 백.
2000년에 제작된 가방으로 다올에서 디자인한 가방이다.
얼핏 보기에도 아주 특색이 뚜렷한 훌륭한 가방이다.
“왜 이 잡지에서만?”
* * *
한은샘은 브랜드 Han의 이익 차이 분석표와 재고 전산을 확인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