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89화
외전 2-조선의 대학원생 (1)
금천대학.
왕의 과거 군호를 따서 지어진 이 대학은, 설립 직후에는 근본이 없고 유학이 아닌 천한 잡학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의 경시를 받았다.
그러나 왕의 치세를 거치며 나라가 발전하고 각 분야에서 필요한 전문가들의 수요가 폭증하자, 잡학은 더 이상 ‘잡다한 학문’이 아니게 되었다.
금천대학의 명성은 결국 국립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아성마저 누르고 조선의 최고 지성 집합체로 거듭났다.
그런 금천대학의 어느 강의실.
“뭐어?!”
이항복이 입을 떡하니 벌리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들은 말이 사실인지 상대방에게 추궁하듯이 말이다.
그러자 이항복의 맞은편에 있던 이덕형이 답했다.
“학기 끝나고 대학원에 들어갈까 생각 중입니다.”
“허.”
자신이 들은 말이 환청이 아님을 확인한 이항복은 결국 떡하니 벌어진 입을 닫지 못했다.
대학 입학시험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사소한 나이 차는 가볍게 극복하고 친구가 되었다.
그 인연이 길지는 않았으나 이항복과 이덕형의 절친함은 막역지우라는 표현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이따금, 지금처럼 서로를 이해하기 힘든 순간이 있었다.
과거의 두 사람은 금세 차이를 극복하고 다시 가까워졌으나, 이항복은 오늘은 그러기 힘드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에 들어간다니, 왜? 대과 치러서 관리가 되어야지!”
“대과에 급제하더라도 고작 말단이나 될 뿐이잖습니까. 그럴 바에야 교수가 되어 학문의 지평을 넓히고자 합니다.”
“누구나 막 급제했을 때는 밑에서부터 시작하기 마련이야. 그리고 관문에 들어선 선배님들은 모두 조정에서 승승장구하고 계시다는 말을 못 들었나?”
유교 경전만 욀 줄 아는 구세대의 관리들 사이로 떨어진 금천대학 졸업생들은 그야말로 군계일학이었다.
대학에서 실전, 실용 학문을 배워 전문성이 필요한 업무에 즉시 투입될 수 있었으니까.
금천대학 졸업생들은 빠르게 공적과 경력을 쌓을 수 있었고, 동기 급제자들보다 앞서 나갈 수 있었다. 그만큼 승진도 빨랐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모두가 달갑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관은 출신 성분에 따라 알력다툼이 잦다고 들었습니다.”
“경전만 외울 줄 아는 무능력자들 주제에 선민의식이나 갖고서 우리를 무시하는데 당연히 맞서 싸워야지. 누구는 대과 급제 안 하고 관에 들어가나?”
“소모적이라는 겁니다.”
“가만히 당해줄 수만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나라에 대해 봉사하는 것만 생각했다면 출신을 따져 무리를 짓고 싸움을 벌일 수 있겠습니까?”
“저들이 먼저 시작한 일이야. 그리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무능력자들은 사라져 줘야지.”
이항복은 강단 서린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선언했다. 그의 말에 주변에 있던 대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 급제자라면 교양부터 익히지 않고 저질 학문부터 배운다며 구세대 유학자들에게 얼마나 갖은 멸시를 당해왔던가.
그의 말에 주변 대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이덕형만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소란 속에 몸을 던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럴 바에야 학문을 수련하는 것이 낫지요. 한 사람의 깨달음만이 아니라 세상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이덕형이 결의를 보이자 이항복도 부득불 강요할 수는 없었다.
“동생의 의지가 분명하다면 내가 막을 수는 없겠지만, 후회하기 쉬운 결정이라는 건 알아둬. 약관에 입학할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라도 교수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고.”
이덕형은 웃으며 답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그는 겨울 학기가 끝나고 연구실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이덕형은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소원 하나가 실현되기를 절실하게 바라고 있었다.
지저분한 정계와는 별개의 세상에서 유유자적하게 학문을 수양하는 것?
아니었다.
서양 서적에 의존하고 있는 조선 학문의 한계를 타개하고 지평을 넓히는 것?
더더욱 아니었다.
이덕형의 소원이란 과거로 돌아가 형의 조언을 무시하고 대책 없이 대학원을 지망한 자신의 대가리를 후려치는 것이었다.
“젠장…….”
이덕형의 책상에는 논문과 이면지들이 가득했다.
기계학 석사 과정을 밟는 중인 이덕형의 논문 주제는 ‘수력과 풍력을 대체할 반영구적 동력원’이었다.
왕은 한강의 수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했으며 대표적으로는 조지서가 그러했다.
과거에는 종이를 지장(紙匠)들이 무수한 작업을 일일이 거쳐서 한 장씩 만들어냈지만, 지금은 수력이라는 영구적 동력을 이용해 많은 절차를 간소화하고 자동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생산력이 얼마나 늘어났는지는 결과물의 형태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과거에는 한 장씩 만들어낸 종이를 묶어 하나의 책으로 유통했지만, 지금은 종이를 둥글게 말아 만든 원통 하나가 사람보다 덩치가 더 컸다.
가히 혁명적인 발전이었으나 수력에는 결정적인 맹점이 있었다. 바로, 수력(水力)이라는 말 그대로 물이 없는 곳에서는 동력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람도, 물도 없이 반영구적인 동력원을 구상하라니.’
이덕형은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동력을 거의 허공에서 창조하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게 어딜 봐서 석사급 논문인가. 이게 가능하면 신으로 등극할 수도 있었다.
“쩝.”
이덕형은 입맛만 다시고는 책상을 정리했다.
“가게?”
곁의 대학원 선배가 물었다. 그 역시 난도 높은 주제를 맡아서인지 얼굴에 피로가 뚝뚝 묻어났다.
“예. 먼저 가겠습니다.”
“고생했다.”
“선배님도요.”
이덕형은 가방에 논문과 이면지를 포개 넣고는 발을 돌렸다.
* * *
“으, 젠장……. 하는 일은 하나도 없는데 시간 하나는 잘 가는 구나.”
창창한 달밤 아래.
이덕형은 거나하게 만취한 채로 비틀거렸다. 술은 쓰고 인생은 엿 같다. 대학 선배들의 입에 달고 다녔던 말이었다.
과거의 이덕형은 선배들의 잔소리에 속으로 코웃음쳤다.
술은 달고 인생은 살만한데 고생하면 얼마나 고생한다고 엄살이냐, 하고서.
하지만 살아보니 선배들의 말이 맞았다. 과연 술은 썼고 인생은 엿 같았다.
-따닥, 따닥, 따닥…….
순라꾼들의 딱따기 소리가 야밤을 울렸다.
통금은 대학생과 여성들에게는 유화적으로 적용되었지만, 거리에서 대취한 채 빌빌거리며 돌아다녔다간 연행을 피할 수 없었다.
이덕형은 혹시나 순라꾼들이 자신을 발견하지는 않을까 눈치를 보다, 딱따기 소리가 멀어지자 돌담 아래에 늘어졌다.
불과 약관의 나이에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대학에 입학한 이덕형.
학부에서는 손꼽히는 성적을 거두었고 자신이 배우지 못할 것은 없다고 자신했다. 대학원에 가더라도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고 자만했다.
대학원은 지식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창조하는 곳이었다.
학문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천재들이 벽돌을 하나씩 쌓아 올려가며 만든 탑이었다. 그 무형의 탑 꼭대기에 벽돌을 하나 올려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궁색한 처지에 술기운까지 돌자 문득 비참한 심정이 든 이덕형은 두 팔 높이 들어 올리며 절규했다.
“우와아아악! 나 다시 돌아갈래!”
대학원 진학을 결정하기 전으로!
그러자 어둠이 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으셨나?”
“헉!”
이덕형은 기겁하며 물러났다.
“누, 누구요!”
그러자 선비 하나가 어둠을 헤치며 나타났다. 큰 키에 다부진 어깨는 참으로 장군감이나 무관이라도 하면 잘 나갈 듯싶었다. 그리고 초면에도 능글맞은 미소를 보내는 얼굴과 성격도 썩 인상적이었다.
선비가 말했다.
“누구긴, 야밤에 괴성을 지르는 취객 구경하러 온 사람이지.”
이덕형은 한창 인생의 쓴맛을 음미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모르는 사내가 대뜸 난동이나 피우는 취객 나부랭이로 치부하자 은근히 열이 올랐다.
하지만 사내의 덩치가 좋으니 큰 소리는 치지 못했다.
그러다가 면상에 주먹 한 대 꽂히는 순간 내일 아침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는 수가 있었으니까.
이덕형은 그저 퉁명스럽게 따질 뿐이었다.
“날 놀리는 겁니까?”
“쓸데없는 질문을 다 하는군. 자네 꼴 좀 보게. 야밤에 괴성을 지르는 취객. 아주 객관적이고 합당한 평가지.”
“형께서는 재수 없다는 소리 많이 들으시겠습니다. 누구에게 놀림이나 받으려고 이러고 있는 건 아니니, 갈길 마저 보시지요.”
이덕형은 조용히 흥, 하고 덧붙였다.
하지만 사내는 능글맞은 미소만큼이나 능청스러운 사람이었다.
“신세 한탄 좋아하나? 내가 곧 술을 한 잔 걸치려는데 안주가 필요했거든.”
“남의 불행을 안주 삼으시려고요?”
“겸사겸사 불쌍한 사람 회포도 풀게 해줄 겸 해서 말이야.”
이덕형은 잠시 고민했다.
보아하니 사내는 혼자 술 마시기 적적하던 참에 만만한 술상대를 찾은 모양이었고, 자신은 공짜 술은 마다할 생각이 없었다.
요즘 들어 술값이 너무 들어가서…….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형장께서 술상을 앞에 두고도 내내 이렇게 빈정대지만 않는다면 기꺼이 안주거리가 되어 드리지요.”
“좋아. 말은 조금이나마 가려보겠다 의미 없는 약속은 해주지. 따라서 오게.”
사내가 발을 돌리자 이덕형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그를 쫓았다.
딱다기 소리를 피해 골목을 몇 번 돌고 가로지르니 어느새 북촌. 사내는 작은 요새처럼 돌담을 드높게 새운 저택 사이에 멈춰 섰다.
“여길세.”
사내는 평소에도 야밤의 활보를 즐기는 게 분명했다. 대문 앞 계단에 올라서기 무섭게 곧바로 문이 열렸으니까.
“오셨습니까.”
“오늘 특별한 손이 있네. 주안상 둘 가볍게 내오게.”
“알겠습니다.”
이덕형은 사내를 쫓아 대청에 앉았다. 크지 않은 저택에 뜰이 깊게 나 있으니 고즈넉한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들었다.
“북촌에서 살다니, 형장께선 관직이라도 지내는 겁니까?”
“공무라면 지내고 있지.”
“연배를 보아 관문에 들어선 지 오래 안 됐을 것 같은데 요즘 조정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예전처럼 시끄럽지는 않던데요.”
“적어도 난 왕년에 일부러라도 주변을 시끄럽게 만들었지.”
“보통 사고뭉치가 아니신가 봅니다.”
“내가 저지르는 사고는 보통 사고가 아니거든.”
“하하하…….”
사내의 대답은 명쾌하지는 않았으나 익살스러운 면이 있었다. 이덕형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말했다.
“형장의 성격이 나쁜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재밌는 분이셨군요.”
잡담이 오가는 사이 저택 노비들이 주안상을 대령했다. 있는 집의 접대답게 술병에서 흘러나오는 향기부터 범상치 않았다.
분명 꿀꺽꿀꺽 마시고 넘겨버릴 술은 아니겠으나 이미 거나하게 취했겠다, 음미할 것도 없고 이덕형은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이덕형이 잔을 채우자 사내가 물었다.
“공부하는 사람처럼 보이던데.”
“대학원생입니다.”
“어려운 길을 가는군.”
“후우우…….”
이덕형은 말도 말라는 듯 한숨을 픽 쉬었다.
“제가 만일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제 머리통부터 후려칠 겁니다. 무슨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길을 선택했는지.”
“문제라도 있나?”
사내의 물에 이덕형은 잔을 비웠다. 사내가 잔을 채워줄 동안 이덕형이 답했다.
“몸뚱이는 하나고 밤낮은 변하지요. 그리고 과제는 대책이 없습니다.”
“과제?”
“연구실에서 크게 진행 중인 일이 있거든요. 그것에 맞춰서 주제를 정해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덕형은 자신의 주제를 떠올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능한 일인지나 궁금할 정도고요.”
“주제가 무엇이기에.”
“수력이나 풍력 없이 반영구적인 동력원을 확보하는 겁니다.”
“아.”
사내가 그게 별거냐는 듯 반응하자 이덕형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 라니요. 형장께서는 대학의 학문을 접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시나 본데, 이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분명 세간에서는 신으로 추앙받는 성상 전하께서도 해내지 못하실 겁니다.”
이덕형은 단호하게 말했다. 누구를 맞은편에 앉혀두었는지는 추호도 모르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