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88화
외전 1-조선의 국제주의 (1)
어느 날.
영의정 이이는 어좌를 올려다보며 문득 생각했다.
몇 년 전, 왕은 그답지 않게 자상한 말로 황제를 다독여 본국으로 돌려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 이이를 포함한 대신들은 왕이 어쩌면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막 어전에 들어선 왕의 태도를 마주하고는 진짜 왕이구나. 가짜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게 치부하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그때의 일이 요즘 들어 점점 기억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음…….’
왕은 어느 순간부터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과거의 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꼽는다면 기만적, 계획적, 정치적, 비정상, 알 수 없음, 정체불명 등이었다.
금상의 몇 대 전 선대왕 치세부터 관문에 입성하여 여러 왕을 모시고 대신의 위치까지 등극한 노신들조차 감히 왕의 진심과 행보를 조금도 가늠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지금의 그는 수동적, 정적임, 관대함, 일반적인, 통념에 따르는, 합리적인, 예측 가능한, 평범한 등의 단어로 표현될 수 있었다.
신하를 괴롭히지도 않았고 놀리지도 않았으며 몰래 수상한 음모를 꾸미지도, 그래서 대신들을 속이지도 않았다.
“영상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가.”
이이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는 어좌를 향해 살짝 허리를 숙이고는 답했다.
“송구하옵나이다.”
“영의정이 어전에서 집중하지 못하고 잡념에 매몰되어서야 어찌 백관의 모범이 될 수 있겠는가. 만일 중차대한 일이 있어 심기가 안정되지 않는다면, 며칠은 쉬게 해주겠다.”
“아니옵니다. 전하.”
“그렇다면 회의에 집중하라.”
“예.”
이이는 꾸벅 허리를 숙었다.
대신들이 무어라 중얼거리며 말을 나누었지만 이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건 휴가로 해결될 수 있는 고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왕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다.
혹시 그사이에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냐고. 정무를 보기 싫어 내성적인 대역을 앞세우고 뒤에서 따로 일을 벌이는 것은 아니냐고.
그리고 어쩌면, 이이는 왕이 그래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지금의 왕을 대하는 일을 물 한 모금, 소금 한 줌 없이 감자를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는 것처럼 비통하리만치 지루, 아니, 공허했다.
“전하.”
이이는 참다 못해 중간에 끊고 나섰다.
“무슨 일인가.”
“신이 감히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않아 차마 죄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나이다.”
“무엇이?”
“신이 아는 성상 전하께서는 특이하기가 범인의 경계를 능가하셨사옵니다. 하오나 지난 몇 년 동안은 이렇다 할 일 없이 조용히 정무만 다스리시니, 신이 혼란스럽사옵니다.”
“과거의 내가 제신들을 많이도 곤란하게 하였는데 어찌 발전 하나 없이 아직까지도 신하들을 곤란하게 할 수 있겠는가.”
“신하들 몰래 벌인 일은 없으시옵니까?”
“없다.”
“사악한 음모도 없으시옵니까?”
“없네.”
“혹시, 진짜 전하께서는 다른 곳에 계시고 눈앞에 계신 분은 대역이 아니옵니까?!”
이이의 물음에 우의정 이항복이 소리쳤다.
“아니, 영의정 대감! 성상 전하께 도대체 무엇을 물어보시는 겁니까?! 감히 대역이 아니냐니요!”
몇몇 대신들도 찬동했다. 도대체 왕에게,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슨 말들을 하는 것이냐고.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다른 대신들은 나서거나 제지하지 않았고 침묵을 지켰다. 대체로, 과거 왕의 모습을 경험해본 적이 있었던 자들이었다.
그들 역시 최근 왕의 행보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차마 물어볼 용기가 없어 참고만 있던 차였다.
“다들 진정하고 자제하라. 영의정이 과거의 내 모습을 잘 알아서, 요즘 들어 달라진 나에게 적응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
“영의정은 공무로 날이 선 듯하니 사흘의 휴식을 주겠다. 그동안 입궐이나 등청하지 말고 심신을 편안히 하라.”
이이는 눈을 감고서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파격적인 발언으로 어전의 분위기는 영 뒤숭숭했다. 왕의 변화에 혼란을 느끼는 자와, 지금의 온건한 왕의 모습이 익숙한 자들.
두 집단은 서로 맞물리지 못하고 서로의 존재에 불편함을 느꼈다.
이이는 괜한 일을 벌였다는 생각에 후회하며 시간을 죽였다. 다행스럽게도, 누구도 착잡한 심정을 여실히 드러내는 이이를 피곤하게 만들지 않았다.
어전회의가 파하자 이이는 궐문을 나서서 즉시 저택으로 귀환해서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 대신 궐내에서 위사와 내시들이 잘 돌아다니지 않으며 눈에도 거의 띄지 않는 구석에 짱박혔다.
영의정 신분이고 뭐고 없었다.
관복이 더러워지건 체면이 더러워지건 이이에게는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만일 전하께서 대리인을 세우셨다면 필시 교대하는 장면이나, 궁인들의 태도 변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전하께서 단순히 변하셨을 뿐이라면.’
이이는 착잡했지만, 무엇이 진실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전자이기를 원했다. 왕이 여전히 중상모략을 즐기며 신하들을 등치는 것을 좋아하기를 원했다.
지금의 왕은 마치 딴 사람과 같아서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공허하고 지루하고 무의미했다. 나라가 잘 나가면 뭔가.
재미가 없는데.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생기가 없다고 해야겠다.
마치 대학에서 만들어진 최근의 기계들처럼 놈들은 정해진 역할을 무감각한 상태로 반복적으로 수행할 뿐이었다.
지금 왕이 보여주는 모습이 꼭 그러했다.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이이는 그런 왕의 모습이 이상하고 거북했으며 때로는 슬프기까지 했다. 그러니 왕이 수작을 부리면 가장 먼저 뒤통수를 맞을 위치에 있어도, 오히려 왕이 그래주기를 절실하게 바랐다.
‘끙.’
관리들이 퇴궐하면서 경복궁은 순식간에 한산해졌지만, 이이는 섣불리 나오지 않았다.
왕에게 친히 쉬라는 명령과 휴식을 받은 영의정이 동료들과 함께 퇴궐하지 않고 어디 짱박혀 있다가 살살 돌아다니는 모습이 발각되었다간, 당연하지만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이는 인내심을 가지고 짱박혔다.
그리고 무려 해가 다 떨어지고 하늘에 초승달과 은하수가 총총 빛나는 밤이 펼쳐지고 나서야 귀를 활짝 열고사 살금살금 포복전진으로 움직였다.
그야말로 스릴 만점이었다.
현인신 성상 전하의 거처인 궐의 야간은 특별히 경비가 삼엄했으며 영의정이건 뭐건 거수자라면 칼침이나 쇠콩알부터 맞는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아주 목숨 걸고 하는 잠입이었다.
이이는 담장을 끼고서 주변을 돌았다.
이따금 들리는 말로는 왕이 후원의 정자를 자주 방문한다고 했다. 원래 후원의 정자에는 폭약을 다루는 과묵한 사내들이 상시 거주하며 일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게 되었다.
왕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군주로 전락하면서 함께 해산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계속 후원을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
누군가는 성상께서 착잡한 심정을 다스리기 위해서라며 씁쓸해했지만, 이이는 만약 수상한 일이 벌어진다면 당연히 후원 정자에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이는 후원의 맞은편 관목에 대가리만 쏙 내놓고서 달밤 아래의 후원을 주시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 후원의 연못은 밤하늘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마치 거대한 거울을 펼쳐둔 듯 했고 중앙의 섬과 정자는 거처하는 이를 잃고서 쓸쓸하게 있을 뿐이었다.
몽환적인 경관에 이이는 시간이 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인영 하나가 다리를 건너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전하시다!’
왕이 조선의 군주로 즉위하기 전, 호형호제하던 아주 오래전 시절부터 왕과 함께 해온 이이였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키와 형체, 걸음걸이만 보아도 왕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있었다.
뭐, 꼭 이이가 아니어도 왕년에 전장에서 한가락 했던 왕의 건장한 체격은 꽤나 인상적인 특징이었지만…….
‘설마 정자 아래에 비밀 기지라도 지어놓으신 건 아니겠지?’
대역설이 사실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정자는 방치되어 왔고 오직 소수의 내시들만이 이따금 청소를 위해 드나들 뿐.
모두의 시선을 피해 소굴을 만들어 갖은 악마적 모략을 꾸밀 수 있는 궐내의 몇 없는 장소였다.
하지만.
왕은 정자에 들지는 않았다. 대신 섬의 가장자리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 볼 뿐. 이 순간 후원은 장관이 따로 없었으며 그에게도 감성적인 면은 있을 터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로 왕이 대역이 아니라, 단지 성격이 변한 것뿐이라면?
왕은 북방을 평정하고 남방을 평정했다. 그리고 조선이 절대로 능가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되었던 명나라마저 굴복시켰다.
그리고 일일이 셀 수도 없이 많은 공훈을 세웠다. 이이의 귀에는 여전히 목청 좋은 수석 대변인의 끝도 없는 왕의 호칭이 귀에 아른거렸다.
지금은 그녀조차 보이지 않게 된 지 오래.
어쨌거나, 왕은 군주로서 해낼 일은 거의 다 해내버렸다. 더 이상 이룩할 성취도 영광도 없었고 그래서 잔잔하게 가라앉은 것일지도 몰랐다.
‘……후우.’
합리적인 추론에 이이는 인생이 단숨에 묵빛으로 물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상념은 순식간에 깨졌다. 왕이 발을 움직였다. 인영이 흔들리자 이이는 다시 왕에게 집중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왕이.
호수 위를.
걷고 있었다.
‘……!!!’
이이는 턱이 쩍 벌어져서 다시 닫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조선성공회 놈들이 자꾸 멀쩡한 전하를 상대로 신이니 신의 대행자니 같잖은 개소리를 밑도 끝도 없이 해대고, 백성들은 그런 개소리를 진지하게 믿으면서 인군을 신성으로 포장하는 미개함에 이를 간 이이였다.
왕이 동서고금을 통틀어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가장 위대한 존재로 손꼽히는 이유는, 그가 신성이 아니라 인군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신성이라면 왕은 치국의 극의에 다다라서 업적들을 세운 게 아니라, 단지 기적을 발휘해 요령껏 자신을 포장한 것이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니 이이는 왕을 깎아내리는 조선성공회 종자들과 놈들의 개소리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 왔는데.
왕은 호수 위를 걷고 있었다.
‘내가 갈 때가 다 되서 미쳤나?’
이이는 눈이 저리도록 소매로 뻑뻑 비벼댔지면 왕은 조용히 호수 위를 걷고 있었다. 이이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사고가 정지됐다.
왕은 어느 순간 호수 위에 덩그러니 서 있더니.
그대로 천천히 잠기는 게 아닌가.
‘……!’
아무리 위대한 군주라도 호수에 잠겨서는 숨이 막혀 죽을 수밖에 없었다.
터무니없는 광경에 이이는 절망했다.
가장 최악의 경우가 아닌가.
차라리 왕이 변했다고 믿었더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직접 보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이는 서러웠으나 차마 엉엉 소리 내서 울었다간 거수자로 찍힐까봐 주먹을 입에 넣고 눈물만 질질 흘렸다.
-짹짹!
-깍!
-짹!
이이는 눈을 떴다.
‘응?’
새 지저귀는 소리. 그리고 밝은 후원의 전경.
자신도 모르게 잠든 것이 분명했다.
맹한 채로 잠기운을 쫓던 이이는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정시니 번쩍 들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풍광에 사로잡혀 헛것을 본 것이라면 여한이 없겠구나!’
이이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어젯밤 보았던 그 광경이, 어쩌면 사실일지라도 그마저도 몰래 후원에 숨어든 자신을 골리기 위한 연출이었다고 믿고 싶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했다!
이이는 후원의 주변을 살폈다. 평소 통행하는 이가 없고 왕의 방문도 없어서인지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지금이다.’
이이는 단단히 각오하고서 관복을 벗었다. 그리고 흰 저고리에 바지 상태가 되어, 꾸물꾸물 포복으로 나아가 후원의 연못에 몸을 담았다.
새벽의 차갑게 식은 연못 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이는 머리만 살짝 내놓은 채 주변을 계속 주시하면서 왕이 물 위를 걷다가 잠겨서 사라진 곳을 향해 나아갔다.
무슨 장치가 있으리라.
아니, 반드시 무슨 장치가 있어야 했다!
이이는 젖건 춥건 떨리건 개의치 않고 개처럼 팔다리를 휘저으며 연못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래…….’
왕이 걷고 사라진 부분에 길이 있었다. 수면 아래에 잠겨 있어,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진짜 왕다운 짓거리였다.
그리고 왕이 사라진 길의 끝은 뭉툭 튀어나와 넓었다.
이이는 왕이 어떻게 물에 잠기고도 멀쩡했을지 알아내기 위해, 주변을 아주 조심스럽게 살피고는 물 위의 길을 붙잡고 일어나 마치 왕처럼 그 끝에 섰다.
그러자.
-그르르르…….
미미한 마찰음과 함께 바닥이 천천히 꺼지는 게 아닌가.
발판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호수의 물이 가장자리를 타고 조용히 흘러내렸다.
발판이 조용히 바닥에 내려앉자, 이이는 통로를 마주했다. 분명 후원 아래의 지하일 텐데 사물 분간이 가능할 정도로 은은하게 빛이 있었다.
복도를 조심스럽게 살피던 이이는 곧 빛이 거울을 통해 들어온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것도 신세계라면 신세계로다.’
이이는 전율을 느꼈다.
이런 짓거리를 후원에 저지고도 어떻게 들키지 않았으며, 또 개과천선한 것처럼 조용히 살았단 말인가?
이이는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역시 조선의 왕이기에 앞서 중상모략과 음모의 왕이었던 왕 다운 만행이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왕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개과천선한 척을 하면서 문무백관이 저들이 당하는지도 모르는 뒤통수를 갈겨대고 있었다.
정확하게 이이가 바란 대로였다.
그러나 아직 죽기는 일렀다.
복도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궁금했으니까.
하지만.
“영의정.”
뒤편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이이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바들바들 떨면서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과연 왕이 있었다. 그는 최근의 모습과는 달리 과거처럼 한쪽 눈을 반개한 채로 피로함과 한심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예의범절 밥 말아 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마저도 이이에게는 반가웠다.
“저, 전하.”
“관복은 어디다 팔아먹고 푹 젖은 채로 나의 복도에 물을 뚝뚝 흘리고 다니는 건가?”
“소, 송구하옵니다.”
“그새 몰래 봤군.”
“예에…….”
왕은 귀찮게 됐다는 듯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이이는 이왕 이렇게 되어버린 김에 노골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여기서 무슨 일을 꾸미셨사옵니까?”
“아. 알려주면 안 되는데.”
“신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살아서 나가기를 기대하겠사옵니까. 부디 조용히 눈을 감을 터이니 알려만 주시옵소서.”
“하아.”
왕은 한숨을 픽 쉬고는 답했다.
“생화학 무기 연구.”
이이는 입이 쩍 벌어졌다.
아니…….
왕이라는 인간이 자기 궁궐 안에다 비밀기지를 차려놓고 생화학 무기를 연구해?!
이이는 갈수록 도를 넘는 왕의 기발함과 악마적 음모에 만족하면서도 꺼림칙했다. 그리고 그런 꺼림칙함마저도 반가운 기분인 이상한 심정이었다.
“어찌하여 생화학 무기를 연구하시옵니까? 아니, 설마. 혹시 스페인에서 벌어진 일이…….”
재작년 즈음 밀입국한 스페인 상인들이 종친의 무덤을 도굴하려다 실패하고서 잡힌 적이 있었다.
그들은 도를 넘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큰 처벌을 받지 않고 방면됐는데, 그들은 귀환하여 본국에 도착한 직후 역병에 걸렸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전염됐다.
서양에서는 온통 난리가 나서 해상을 봉쇄하고 육상을 봉쇄했으며 에스파냐 반도는 지옥이 되어서 죽어가는 자들로 거리가 가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 서양에서는 이단 취급을 했던 조선성공회의 선교사들이 등장해서 환자들을 구휼했는데 선교사들은 단 한 사람도 병에 걸려 죽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 모습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족과 귀족들이 저들도 살아남고자 앞다투어 개종하면서 조선성공회는 서양 곳곳에 지부가 설립되었고 현재 빠르게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게 전하의 만행이었사옵니까?!”
“그렇게 됐지.”
남일 말하듯 태연한 왕의 태도에 이이는 숨이 막히고 영혼이 빨려나가는, 아주 익숙하고도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됐다니요? 아무리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라지만 수백만 명을 역병으로 죽인다는 게 말이나 되옵니까?”
“언제는 종친의 무덤을 도굴하려 들었으니 살점을 발라내어 죽여야 한다더니.”
“그렇다고 무고한 백성들까지 떼로 죽음에 몰아넣었단 말씀이시옵니까?!”
“서양 각국이 밀입국자를 먼저 단속하지 않은 죄가 있잖은가. 우리가 한두 번 봐준 것도 아니고. 그러다 종친 묘소까지 도굴한 건 그 자체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고, 나아가 도굴을 시도한 이유도 종친의 유해로 아조를 협박하여 불공정한 조건을 강요하기 위함이 아니었겠는가.”
이이는 더 따지지 못하고 다른 질문을 올렸다.
“어찌하여 그동안 개과천선한 것처럼 지내셨사옵니까?”
“내가 계속해서 수상한 사람인 티를 내면, 스페인 역병은 스페인인이 신을 대행하는 조선 왕의 종친 묘소를 도굴하려던 죄로 떨어진 천벌이 아니라, 내가 꾸민 수작인 것처럼 보이거든. 원리를 모른대도 말이야. 그래서야 조선성공회가 서양에 뿌리를 내리기 힘들어지지.”
그러니까 의심을 안 받으려고 지난 몇 년 동안이나 잘도 실수하지 않고 정말로 개심한 척, 멀쩡한 인간인 척을 해왔다는 소리였다.
아마 자기최면 수준이 아니었을까.
왕의 기만술은 드디어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었다.
“와…….”
이이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진짜 어떻게 이런 인간이 있나, 하고.
어쩌면 조선성공회의 말처럼 왕에게는 신성이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창조주의 신성은 아닐 것이요, 남을 철저하게 속이고 예술적으로 등쳐댄 끝에 신적 경지에 이른 기만과 악마적 음모의 신성일 터였다.
“나가세, 여긴 지하라 젖은 몸으로 있으면 고뿔 걸리기 쉬우니.”
“……신은 너무 많은 비밀을 알지 않았사옵니까.”
“뭐, 그래서 죽여달라는 건가?”
“아, 아니옵니다.”
“가세!”
왕이 발을 돌리자 이이는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