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군!! 우현 선수 나와!!!”내가 왜 이순신이죠? 287화
103. 랑데부 포인트 (2)
이순신은 내장을 끊어내는 마음으로 절규했다.
“격군! 우현 선수!! 나와!!!”
명령이 떨어지자 저판 계단에서 격군들이 우르르 나왔다.
그들은 갑판의 상황을 확인하더니, 자신의 임무를 알았다는 듯 쓰러진 동료들에게서 당파를 회수해 빈자리를 메웠다.
굳이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었지만.
이순신은 새삼스럽게 외쳤다.
“격군들은 당파를 인계받아 도선하는 왜구를 쳐 죽여라!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불필요한 명령이었다. 개방된 저판으로의 계단을 통해 격군들은 이순신의 절규 섞인 명령을 이미 들었으니까.
다들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다음은 누구 차례가 될까 하고.
우리가 다 죽기 전에 왜구들은 물리칠 수 있을까, 하고.
그런데도 괜히 했던 말을 또 하는 이유는 부하들에게 죽으라는 명령을 내려야만 하는 자로서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이겠지.
‘…….’
이순신은 눈을 질끈 감고서 잡념을 떨치고는 다시 전장을 마주했다.
‘회전이 느려지는구나.’
피와 죽음, 총연이 산 사람과 죽은 사람과 뒤엉켜 한데 돌던 갑판의 광기 어린 회전도 기세가 한풀 꺾였다.
격군이 절반으로 줄어서다.
그럼에도 남은 절반은 어떻게든 배를 돌려 도선을 시도하는 세키부네와 왜구들을 떨쳐내고자 끝까지 애쓰고 있었다.
결의는 가상했으나 그들이 자신의 팔과 체력을 혹사하게 둘 수는 없었다. 한계까지 몰아붙일 정도로 지친 상태에서는 왜구들을 당해낼 수 없으니까.
이순신은 저 갑판이 보이는 계단 안쪽을 향해 외쳤다.
“함선 정지!”
제자리 회전은 그만하면 됐다.
노가 움직이지 않자 선박은 금세 멈췄다. 다닥다닥 들러붙는 세키부네와의 연이은 충돌음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적들의 기세가 한층 날카로워지고, 고함과 비명도 한층 더해졌다.
“올라왔다!”
당파를 들고서 저항하던 격군 하나가 난간 너머로 떨어지더니, 그 자리에서 왜구 하나가 기어 올라왔다.
놈이 난간을 장악하고 있는 한, 다른 왜구들도 방해 받지 않고 갑판에 올라서가 된다. 이순신은 환도를 뽑으며 외쳤다.
“격군! 좌현 선수! 나와!”
갑판 아래에서는 격군들이 한 치의 미련도 없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쿵쿵 울려댔고.
이순신은 갑판이 점령당하는 최악의 상황을 막아내기 위해 적에게로 달려들었다.
“놈들을 판옥선 위에 살려두지 마라!”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왜구에게 달려든 이순신은 벼락처럼 환도를 내질렀다. 왜구는 단창을 들어 방해했으나.
-콰직!
필사의 일격은 고작 창대가 막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창대가 두 토막이 나자 왜구는 허망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 얼굴 깊숙이 환도가 처박혔다. 이순신은 즉사한 왜구를 걷어차 환도를 뽑아내고는 막 난간을 기어오르던 왜구의 손을 찍었다.
“어딜 감히 대조선의 군선을 범하려 하느냐!”
“크악!”
이순신은 환도를 거두어 반대편 손까지 찍었다.
환도는 도끼처럼 난간 깊숙이 박혔고 갑판에 오르려던 왜구는 손가락 몇 개만 남겨두고서 시커먼 바다에 처박혔다.
“격군들은 당파를 챙겨 도선하는 왜구들을 물리쳐라! 무기가 없다면 주먹으로 내려치고, 손이 잘린다면 들이받아서라도 막아라!”
이순신은 전장에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다.
자리를 굳건히 지키기는 어렵게 된 이상, 이대로 돌아가서 전장만을 돌아보기는 힘들었다.
전멸을 각오해야 했고 이순신 역시 죽기 전에 최대한 많은 왜구를 길동무로 삼기로 했다.
그는 중과부적으로 밀리는 곳마다 뛰어들어 왜구들을 베어냈다. 찌르고 찍고 쳐냈다. 얼굴과 갑주가 시커먼 피로 물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버텼을까.
오직 하나의 왜구를 더 베어 죽이는 것만 생각하고서 갑판을 전전하기를 한참.
“수사 영감!”
무관 하나가 곁에서 불렀다.
“뭔가!”
“우리가 이긴 듯합니다.”
무관이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순신은 찌를 듯한 긴장의 끈을 조금 풀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구들의 공성이 와해되고 있었다.
몸을 숨기지도 못하고 화살과 총탄에 맞아 죽을 것을 각오하고 저항하던 수군들도 이제는 난간에서 두어 걸음 물러나서 거칠게 호흡을 다스렸다.
이따금 올라오려는 자들은 협공을 당해 어김없이 텀벙, 하는 물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적들의 발작적인 고함과 외침도 없었다.
불안 가득한 웅성거림만이 있을 뿐.
“그래…… 우리가 이겼구나.”
이순신은 난간에서 시선을 떼고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왜구 하나 없이 갑판이 텅 빈 세키부네들. 박살나고 부서진 적선들. 그 사이를 무기력하게 떠다니는 왜구의 시신과 잔해들.
놈들은 수상에서 필사적인 공성을 펼쳤으나 조선군은 더욱 필사적이었다.
맞고 베이고 찔리면서 하나라도 더 죽였다. 죽어서는 적을 끌어안고 뛰어내렸다. 왜구들도 그 각오에 질린 것이다.
갑판에는 격군들이 계속 충원되니 무력감마저 느꼈으리라.
그리고 한 번 기세가 꺾인 공성은 반드시 실패로 귀결되게 마련이었다.
시야 저 너머에서 뱃전마다 단 등불이 하나씩 멀어지고 있었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병력 일부가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등불을 단 채로 도망가는 건 피아의 승패를 가르기 아주 좋은 짓거리였다.
“봐라! 적들이 도망간다!”
“와아아!”
“우리가 이겼다!”
정신없이 싸우던 수군들이 승기를 알리는 소식에 해방감마저 묻어나는 환호를 터뜨렸다.
반대로 동요하던 왜구들은 조선군의 환호에 주변이 한산해졌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패잔병이 되어 더 저항하지도 못하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순신은 겁도 없이 선수로 나아가 왜병들에게 외쳤다.
“항복하고 싶은 자들은 몸을 웅크려라! 그렇지 않은 자는 대가리에 총알을 박아 항전 의사를 존중해 주겠다!”
그 쩌렁쩌렁한 선언에 우군에게 버림받은 왜병들은 구더기처럼 몸을 말아 적극적으로 항복 의사를 표현했다.
부관이 권했다.
“우군의 피해가 큽니다. 승전에 대한 기쁨도 금방 식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놈들을 살려주지 말고 차라리…….”
포로들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여 분풀이를 하고 본보기로 만들어버리는 편이 낫다는 제안이었다.
이순신은 고개를 돌려 갑판을 둘러보았다.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더 많았고, 산 자 중에서도 다치지 않은 자보다 다친 자가 더 않았다. 그래도 다들 내색하는 이 하나 없었다.
분명 그럴 기운도 없어서이기 때문이겠지.
이순신이 말했다.
“지금은 피를 더 볼 때가 아니네.”
불필요한 피를 보고 싶지 않아서만이 아니었다.
병사 대부분이 명나라 원정을 막 다녀온 상태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1대 100이라는 초유의 해전을 치렀다.
그뿐인가.
계획적인 전투가 아닌 급작스럽게 벌어진 혈전이기까지 했다. 정신적, 신체적 피로도 모두 극에 달한 상태다.
다들 눈 뜬 채로 죽기 일보 직전.
이순신은 병사들의 진을 더 빼고 싶지 않았다.
“다들 돌아가면서 쉬게 하게. 특히 수병들. 군관들은 돌아가면 내가 자잘한 공훈들까지 다 올릴 테니까 귀환까지 참는다. 왜구들이 수상한 수작을 부리지 않도록 잘 감시하면서.”
어차피 격군 손실이 너무 커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는 잔해와 빈 세키부네 사이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어야 했다.
병사들이 그제야 늘어져서 쉴 동안.
이순신은 갑판의 시신들을 업어 선미로 향했다.
양쪽 모두의 휴식에 방해되지 않도록.
망망대해에서 불빛 하나 보고 찾아온 지원군들의 등장은 한 박자 늦을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합류한 선단장과 선장들이 죄를 청했으나 이순신은 모든 논공행상과 치죄는 전부 뒤로 미루기로 하고, 병력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귀환부터 서둘렀다.
대승을 거두었으니.
며칠 정도는 다들 눈치 보지 않고 쉬어도 괜찮겠지.
이순신 역시 수영에 도착해서는 전과 보고를 서두르지 않고, 제장과 수병들을 모두 쉬게 한 뒤 조정에 승전과 함께 왜추의 침입을 알렸다.
* * *
혼슈 원정이 마무리되자 조정은 구주좌수사 이순신을 도성으로 불러들였다.
이번 원정에서 최대의 공을 세운 사람이라면 단연 이순신이었으니까.
왜추는 명 원정으로 변경이 취약해진 틈을 타 수로를 이용해 대대적인 침공을 시도했으나, 이순신은 단 네 척의 판옥선으로 저지해 냈다.
고작 네 척의 배를 이기지 못해 패퇴한 왜추는 수많은 인명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전의마저 상실해 버렸다.
선단 하나를 이기지 못하는데 어떻게 조선 전체를 이겨 먹는단 말이냐.
때마침 명나라의 항복 소식도 전해져, 구주의 선발대는 발을 옮기는 대로 왜구들의 항복을 받으며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이따금 저항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들은 조선군의 우월한 화력 앞에서 성과 함께 숯덩이로 전락했으며 반면교사가 되어 왜구들이 앞다투어 항복하게 만들었다.
이제, 이미 세간의 평이 높았던 이순신은 백 배나 많은 적선을 칠흑의 망망대해 위에서 기필코 저지하여 패퇴시키고 전세를 크게 전환한 공으로 전설의 반열에 올라섰다.
대신들은 혼슈의 총책임자로 이순신을 내정했다.
일개 수사가 갑자기 떠안기에는 방대한 관할이자 위치였으나, 이순신은 능력만 아니라 충성 또한 검증된 인사였다.
분명 그라면 다른 마음을 먹지 않고 점령지 안정에 집중하며, 아직 복속되지 않은 왜추들을 마저 정복하는데 필요한 기반을 훌륭히 닦아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날 밤.
이순신은 왕의 집무실을 찾았다.
“전하.”
집무실에서 왕은 술상을 낀 채 유난히 피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원정이 수행될 동안에도 왕은 바쁘게 지냈다.
방대한 영역의 점령지를 다스리려면 무수히 많은 관리를 새로 선발해야 했고, 인사권을 가진 기관들이 일순 필요 이상의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왕은 그 과정에서 부정이 일어나기를 원치 않았다.
이미 많았던 일감이 더 늘어났으니 당연히 피곤할 수밖에 없었고, 그 기색이 밖으로 흐르는 것마저 갈무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순신은 자신이 괜히 찾아왔나 싶었으나 왕은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신하들이 나에게 자리를 청할 때는 대체로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아니더군. 그건 그대고 마찬가지겠지…….”
이순신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송구하옵니다.”
“사직할 생각인가?”
“그러하옵니다.”
“더 남아서 군공을 세우지 않고?”
“혼슈의 정토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동북면의 군소한 영주들만 남았을 뿐이니 적임자는 신이 아니어도 많을 줄로 아옵니다.”
왕은 대답 대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서 왜추의 수급으로 만든 황금 해골을 쓸어내렸다.
언젠가 왕은 폐사군에서 반란을 일으킨 여진족 수괴 양목탑올의 수급을 술잔으로 만들려다 만류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대신 왜추의 수급의 술잔이 되었다.
원수라곤 하나 그의 원래 형상을 잘 알고 있었던 이순신은 영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촛대의 초가 반 토막이 되었다.
왕은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경이 무관으로서의 자질을 더욱 펼쳐주기를 바라지만, 붙잡기에는 너무 미안하군. 군문을 나서서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대해로 나가 세상을 보고자 하옵니다. 신하의 신분으로서 이 땅에 남아 전하를 모셔야 하거늘, 그렇지 못하는 신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경이라면 마땅히 경이 원하는 삶을 쟁취할 자격이 있다. 다만 외지에서 너무 고생하지는 않을까 우려스럽다.”
“심려 끼치지 않도록 하겠사옵니다.”
“음.”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다시 볼 수 있겠는가?”
“송구하오나 감히 기약하기 어렵사옵니다.”
“그래, 대양을 떠도는 사람이 어떻게 기일을 잡고서 돌아올 것을 확약하겠는가.”
문득 왕의 인상이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피로하기만 한 인상이었다면 지금은 불상처럼 오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잔을 채우고는 이순신에게 건넸다.
이순신은 고개를 돌려 조용히 잔을 비우고는 다시 바쳤다.
술잔을 거둔 왕이 말했다.
“내가 경을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으니, 헛소리에 불과한 나의 이실직고를 받아달라.”
헛소리인 이실직고라니 무슨 뜻이란 말인가.
이순신은 의아했으나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고개만 숙였다.
“경은 모르겠지. 내가 경을 얼마나 의식했으며, 경처럼 되고자 노력했는지를. 비록 뒤를 쫓지는 못하였으나, 그 이상을 추구한 끝에 이 자리까지 이르고 말았다는 것을.”
“…….”
“나는 이따금 고민했네, 영웅의 자리를 내가 차지해 버린 아닌가 하고. 주제에 넘은 일을 벌이는 건 아닌가 하고. 하지만 모조리 기우였어. 영웅은 상황이 달라지더라도 영웅의 면모를 증명해 내지. 그 자질은 처음부터 내가 뺏거나 대체할 수 없었던 것이었네.”
“…….”
“이제 나는 나의 숙명을 완수하였고 어쩌면 경 역시 비슷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허무함을 동반하는 법이니, 나 역시 미련은 정리하고서 그대처럼 영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삶을 살아가고 싶지만…… 아쉽게도 나는 너무 깊게 빠졌군.”
“…….”
“나는 경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만, 경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네. 이 이순신은 이순신의 삶을 잘 이행했나?”
이순신은 문득 왕의 성명이 자신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역시 이순신이었다. 그가 그의 삶을 잘 이행했냐니.
수수께끼 같은 질문이었다.
이름은 같아도 한자는 다르지 않은가.
“신이 미욱하여 전하께서 하교하신 바는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성상 전하의 치세는 이 나라에 둘도 없을 홍복이옵니다.”
“나는 경에게 어떤 사람이었나.”
“목숨을 바쳐 모셔야 할 군주이옵니다.”
“인간으로서는?”
“난해한 분이시옵니다.”
“아. 언제까지고 그럴 테지. 모두에게 말이야. 이 이순신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구나…….”
“전하?”
왕의 마지막 말에 의아함을 느낀 이순신이 조심스럽게 용안을 살폈으나,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가 멍했다.
그러나 채 의문을 느끼기 전에 이순신은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숙면하라. 내가 했던 헛소리들은 전부 잊고.”
왕은 밖을 향해 말했다.
“구주좌수사가 취해 쓰러졌다. 그를 거처로 보내주어라.”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상선과 젊은 내시들이 들어섰다.
젊은 내시들은 좌우에서 이순신을 부축하고는 먼저 나섰으며, 상선은 왕을 향해 꾸벅 예를 표하고는 물러나 문을 닫았다.
왕은 자신의 잔을 채웠다가 비웠다. 그리고 몽롱함을 느끼며 어좌에 늘어졌다.
“이제는 정말로 조선의 왕만 남았구나.”
문서를 작성하거나 말을 함에 있어 왕의 함자를 함부로 쓰지 않는 예의를 피휘라고 한다.
조선의 왕은 신하와 민간의 불편함을 우려해 자신의 이름을 거의 쓰이지 않는 한자로 개명하곤 했다.
지금의 왕의 함자는 자주 쓰이는 한자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그동안 개명하지 않았다.
과거 신하들은 몇 번 조심스럽게 개명을 권하곤 했으나, 군주에게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이름을 갈아달라 청하는 것은 지극한 무례.
왕에게 의향이 없음을 알게 된 신하들은 피휘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방법은 많으니까.
그러나 최근, 왕은 돌연 자신의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신하들은 의아했다.
왕의 치세가 오래되어 다들 피휘에는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그리고 뒤늦게 개명하더라도 의미가 있을지 미지수였다.
조선 역사에 있어 지금 왕의 이름은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이었으니까.
그러나 왕은 성지를 거두지 않았다.
의정 대신들에게 새 이름을 올리라고 했다.
바라는 자는 없었으나 신하 된 자들이니 까라면 까는 수밖에.
그들은 몰랐다.
왕이 숙명을 완수했다는 것을.
그리고 더 이상 이순신으로 남을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을.
왕은 자신이 가장 선망하던 사람과 우연히 같은 이름을 타고났고, 사소한 착각으로 원대한 품을 꾸었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만들듯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역사를 거스르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이제 그가 아는 역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미련이 없지는 않으나.
돌아가기에는 너무나도 멀리 와버렸으니.
진짜가 되어버린 새 역사에서
환상에 매이지 않고
이순신도,
누구도 아닌,
‘조선의 군주’
그 자체가 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