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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86화 (286/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86화

103. 랑데부 포인트 (1)

“수사 영감.”

이순신이 비몽사몽한 사이 수병 하나가 다가왔다. 젊은 그 수병이었다.

“무슨 일이냐.”

“들리지 않으십니까? 이 소리가…….”

-솨아아.

-솨아아아.

-솨아아아아아…….

바람이 해수면을 스쳐 지나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아니면 해변에 치는 작은 파도.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어느 쪽도 아니었다.

“전부 깨우거라. 조용히.”

“적입니까?”

“노 젓는 소리임은 확실하다.”

이순신은 선미의 기수를 찾았다. 그는 선상의 분위기가 수상해진 것을 감지했는지 잠기운 하나 없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수사 영감.”

“그래. 적인 것 같다. 서둘러 다른 선박에도 알려야 한다.”

기수는 좌우의 판옥선을 바라보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상은 없나.

대낮에서는 색색이었던 깃발도 밤에 보면 시커먼 깃발, 더 시커먼 깃발로 보인다.

그래서 가시성을 높이기 위해 문양과 가장자리의 형태, 작은 깃발 등을 달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알아보기 힘든 건 매한가지였다.

믿을 것은 오직 군기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수의 노련함 뿐.

“전 함선 경계상태.”

“예.”

“북은 치지 않는다.”

“예.”

“그리고 간격을 넓힌다.”

“알겠습니다.”

기수는 시커먼 군기 무더기에서 필요한 깃발을 쏙쏙 집어내 우군이 잘 보이도록 높이 들어 흔들었다.

동료 기수의 반응이 있을 때까지 대장선에서는 연속해서 같은 신호를 보냈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긴장감은 선 사이에서도 전염되었고 다들 늦지 않게 신호를 퍼뜨렸다.

달빛은커녕 별빛마저 보이지 않는 시커먼 하늘. 그 하늘을 향해 시커먼 깃발들이 곳곳에서 요동친다.

갑판 아래는 일반적인 상태와 달리 조용하다. 노 마저 물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들어가서 조용히 나온다.

하지만 잠에서 깬 격군들이 힘을 합쳐서인지 배가 빨라지고, 평저선의 네모난 흘수선이 물살 가르는 소리가 은근히 거슬렸다.

이순신은 속도를 낮추라는 뜻애서 손바닥을 내리고, 기수들은 군기를 휘두른다.

‘이제 적이 어딨는지 보도록 할까.’

이순신은 망원경을 펼쳐 물살 가르는 소리를 추적했다. 완전히 칠흑에 잠긴 바다와 뿌옇게 검은 수평선 사이의 요철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로 적과 마주했구나. 하지만 야간에 구름까지 껴서 시계가 너무 나쁘니 수효를 추측할 수가 없으니 문제로다.’

이순신은 안력을 돋웠다. 어떻게 그게 되는지는 그도 몰랐다.

당장이라도 생사가 칼날 끝에서 오갈 수 있는 상황이었고 어떻게든 적병의 규모를 탐지해야 했을 뿐이다.

구름을 뚫고 간신히 나온 아주 미미한 달빛을 반사하는 투구의 반구형 형태들이 얼핏 보였다.

어떤 것들은 아주 납작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왜병의 투구 형상이었다.

하지만 그게 진짜일까? 어떻게든 적을 탐지해야겠다는 각오가 만들어낸 환상은 아닌가?

이순신은 속에서 흘러나오는 불쾌한 질문들을 억누르면서 투구의 형상을 추적하며 망원경의 시야를 아래로 내렸다.

‘이거,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어떻게 수평선부터 여까지 적들이 펼쳐져 있을 수 있느냐. 그렇게 되면 수효만 얼핏 어림잡아도…….’

-텅!

고뇌의 산통을 깨다 못해 박살 내고 짓이기는 섬찟한 충돌음이 터졌다.

그리고.

왜어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뭐랑 부딪힌 것 같은데?”

“조용해!”

“아니야, 이거 이상해!”

“닥치라니까!”

“우리 편이 아닌 것 같아!”

“뭔데?!”

“만져봐!”

“이거 뭐야!”

“엄청나게 크다!”

“야! 이거 조선 수군 배야!!”

“뭐?!! 조선 수군!”

조선군 선단과 왜 선단에서 합이라도 맞춘 듯 동시에 불이 지펴졌다. 이순신은 전율했다. 적 선단의 규모에. 차마 두려움마저 일 정도로 느꼈던 적의 수효.

어림잡아도!

족히!

수백 척!

놈들은 현측 바로 아래서부터 수평선까지 바글바글 떠 있었다.

“총원 전투 수행하라!”

이순신이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놈들이 아무리 야간에 습격을 시도했다만 부딪힐 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이런 낭패가 있나! 놈들은 단단히 준비한 게 분명했다.

이건 전면적인 침공이었다.

그리고 이따위 짓거리를 할 놈은 혼슈를 통일했다는 왜추, 풍신수길뿐이었다.

-타당!

-타다당!

-탕탕탕!

위아래에서 총성이 난무했고 어스름한 금속성 빛살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이순신이 외쳤다.

“신호시를 쏴라!”

이순신의 명령에 각 함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신호시 전담 궁수들이 동개에 손을 가져갔다. 그와 동시에 이순신은 다시 내질렀다.

“적들이 도선하지 못하게 계속 회전해라! 화포는 적 함대 방향으로 무제한 방포! 일일이 조준하려 들지 마라!”

-삐이이이이…….

-삐이이이이…….

-삐이이이이…….

신호기들이 창공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퍽, 퍼퍽, 하는 미미한 폭음과 함께 새빨갛게 불타올랐다. 그 광경이 익숙하지 않은 왜병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시뻘건 수천 개의 얼굴이 하늘을 바라보는 광경은 더없이 몽환적이고 더없이 소름 끼쳤다. 그리고 수천 개의 얼굴이 일제히 조선군 선단으로 향했다.

-텅!

-탕!

판옥선들이 어지러이 빙글빙글 돌았고, 다닥다닥 붙어 도선을 시도하던 세키부네들이 판옥선 선체와 노에 맞아 튕겨 나갔다.

현측에 달라붙으려던 몇 놈이 급작스러운 거리 변경에 잘 못 뛰어내려 새카만 바다에 풍덩 빠졌다.

몇몇 녀석들은 살아남아 아무 배에라도 올라타려 했으나, 몰려들던 세키부네들이 다시 쿵쿵 부딪치며 깨지고 밀려나며 소란이 벌어지니 한 번 바다에 빠진 자들은 거의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

그리고 모두 새카만 칠흑 속에 잠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떻게든 올라타라! 이것도 공성과 다를 바 하나도 없다!”

사무라이의 독전에 아시가루들이 발작적으로 몸을 내던졌다. 검이 있으면 검으로, 단도가 있으면 단도로, 그마저도 없으면 손톱으로.

놈들은 현측에 단단히 붙들린 채 차근차근 기어 올라갔다.

그들을 맞아주는 것은 뾰족한 두 개의 날카로운 꼬챙이였다.

“헉!”

아시가루는 자신의 종말을 직감했다. 과연 그렇게 되었다.

-콱!

면상에 당파의 꼬챙이날이 박히자 아시가루는 직감대로 종말을 맞았다.

그리고 바로 아래에서 뒤따라 올라오던 동료 몇과 무너져 내렸다. 여러 사람이 바다에 처박혔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아시가루들이 얼마나 많이 빠르게 소모되건, 왜병들의 기세는 조금도 죽지 않았다. 그들은 구렁텅이에서 필사적으로 기어 나오려는 자들처럼 현측을 타고 올라왔다.

“신호시를 날렸고 포성까지 울리기 시작했으니, 각지에서 몰리기 시작할 거다. 그때까지만 버텨라!”

이순신이 독전의 구호를 외쳤다.

원군의 접근은 열세에 처한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는데 제격이지만, 만일 원군이 제때 오지 않으면 도리어 사기를 대판 깎아 먹는 수가 있었다.

지휘관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거짓말이나 한 격이 되니까.

하지만 이순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수평선 저 멀리 좌우에서도 신호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게 문제였다. 수평선 저 멀리.

수영 수군은 일대 해역 전체를 경계하고 정찰하고자 선박을 흩뿌린 데 반해, 놈들은 저들이 가진 선박이란 선박과 군대란 군대를 전부 싹싹 긁어서 하나의 경로에 때려 박았다.

사실상 야습을 가장한 전면적인 침공이었고 작전 수립에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이순신에게도 이건 상정 외의 숫자였다.

조선군 선단은 거북선 한 척 없이 고작 판옥선 네 척.

반대로 왜구들은 백 배나 되는 대군. 놈들이 인명을 아끼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대가리가 썩어나기 때문이었다.

또한, 각지의 조선 수군들이 더 몰려들기 전에 몸을 서로 섞은 채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 조선군의 한 줌 선단을 최대한 빨리 밀어낼 필요가 있었다.

이순신은 속으로 탄식했다.

‘내가 이런 실수를 했구나. 이런 경우는 대비하지 못했다!’

이가 갈렸지만, 상정이 가능했더라도 어떻게 방비한단 말인가? 큐슈의 어느 해안으로 쳐들어갈지 모르는데 한두 군데에서 뭉쳐서 적당히 돌아다니란 말인가?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적의 접근을 발견한 최초 선단을 전멸을 각오하고서라도 놈들을 묶어두는 수밖에 없다! 우군들이 복수해줄 것을 믿고서!

그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오차의 범위가 아니라.

오차 자체였으며.

그것을 극복할 방법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그것이 이순신!

왕에게서 배운 방식이었다.

‘지금 상황은…….’

이순신은 서둘러 전장을 살폈다.

보이는 것은 오직 적선의 불빛뿐.

전장에 들리는 것은 왜구들 특유의 찢어지는 비명이 전부인데 갑판에서는 사상이 착실하게 누적되고 있었다.

이미 화살에 노출된 갑판 중앙은 벼라도 심어놓은 것처럼 대살이 빼곡했다.

놈들은 우월한 숫자를 이용해 계속해서 화살을 갈겨대고 있었다. 그러다 눈먼 조선 수군 하나 맞춰도 이익이라는 거다.

‘이 왜구 떼거리를 상대로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는 없다!’

갑판의 병사들은 갈수록 줄어들고 저판의 격군들도 갈수록 지쳐간다. 이대로는 고사할 뿐이다. 버티는 게 아니다. 죽어가는 것이다.

“격군!! 좌현 선미 나와!!! 포수들에게 당파 인계받아 도선하는 왜구를 쳐죽여라!”

이순신의 명령이 지엄하게 떨어지자 저판과 이어진 계단에서 땀에 젖은 격군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판옥선의 갑판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포수의 숫자는 60 내외. 그중에서 절반은 대포를 맡고 절반은 단창과 조총으로 무장하고서 근접전투를 수행하는 총포수다.

지금 피해가 누적되는 쪽은 후자의 총포수들.

항전을 위해 노출이 있다 보니 왜구들이 그것을 노리고 착실하게 전력을 깎아 먹고 있었다.

그와 비교해 격군의 숫자는 120명.

총포수의 네 배.

본래는 근접전보다 사격을 보조하기 위한 용도가 더 큰 당파지만.

총포수들이 도선하는 왜구들을 상대하느라 거의 사격하지 못하고 있으니.

대신 격군들이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은 그것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병법이 말하였다!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 죽어서!! 살아라!!!”

격군들은 총포수들이 방포하고 장전할 동안 그들을 지키며 도선을 시도하는 왜구를 찍어 내렸다.

수군이 된 이래 반평생은 노질만 해온 격군들이다. 두 번의 창질은 필요 없다. 당파의 날은 깊숙이 들어갔고 어김없이 왜구들은 즉사해 어둠속으로 잠겨 사라졌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격군들도 조금씩 줄어간다.

왜구의 조총에 맞고 왜구의 화살에 맞는다. 그런 와중에도 격군들은 항전을 이어간다. 부상에도 연연하지 않는다.

이미 죽을 목숨인 자신들이 최대한 많을 적을 길동무로 삼아야!

한 명의 전우라도 더 살릴 수 있으니!

그러나 목숨을 건 항전에도 갑판에는 시신이 늘어나고 서 있는 자가 줄어들었다. 이순신은 내장을 끊어내는 마음으로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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