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84화
102. 운명적 만남 (1)
“차라리 명나라도 동생이 다스리는 편이 좋을 텐데.”
“소국의 왕의 그릇이 대국 황제의 그릇과 같겠습니까. 만일 명 조정에 형님의 말씀이 전해진다면 여러 사람이 근심할 것입니다.”
“흥, 놈들이 근심한다면 나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황제의 자리가 빌 것을 걱정해서지.”
“하하.”
“늙은 잔소리쟁이는 쫓아버리고 함께 조선에서 살면 안 되겠나?”
황제가 헛소리할 때마다 그를 모시러 온 수보대학사 신시행의 가슴이 찢어졌으나, 차마 내색할 수가 없어 조용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분명 신가 놈이 듣기에만 좋은 괴설을 읊었겠지?! 그놈 말은 듣지 말게! 동생께서도 내가 좋다고 하지 않으셨나!”
“형님, 아니. 폐하.”
조선왕은 맞닿은 의자에서 내려와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잡았다.
“동생!”
황제는 기겁하더니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명으로 가는 대신, 동생께서도 함께 돌아가는 건 어떤가? 내가 동생이 조선에서 해준 것만큼은 못 해주겠지만, 함께 있을 수 있어! 내가 동생께서 불편한 일이 없도록 최대한 배려하겠네!”
“폐하께서 신에게 해주신 말씀은 더없이 과분하고 감사하지만, 신에게는 신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조선을 다스리면서 대명을 다스리는 폐하를 성심성의껏 모시는 것입니다.”
“나는 명에 미련이 없어!”
“그렇다면 누가 대명으로 돌아가 대국의 주인이 되어 소국의 왕을 지키겠습니까?”
“조선은 명을 이기지 않았나. 조선은 명나라의 보호를 필요치 않아. 이미 조선은 오롯이 서지 않았나.”
“그건 사신의 농간으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이고, 신하들이 멋대로 저지른 일에 불과합니다. 어찌 조선이 대명을 능가하겠습니까. 그것은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왜 명에 집착하는 건가? 나는 그런 나라는 필요치 않아. 도리어 나를 못살게 굴고, 동생을 못살게 굴지 않았나. 혹시 동생은 내가 명나라의 황제라서 잘 해주었던 건가?!”
황제가 그답지 않게 언성을 높이자, 조선왕은 그가 쥔 황제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처음에는 군신의 관계로 만났으나, 친우와 의형제의 연을 맺었는데 어찌 군신만을 의식하겠습니까. 이 동생이 간언을 드리는 이유는 전적으로 형님의 안위를 위해서입니다. 형님. 형님께서는 이 동생이 진실 된 마음으로 청하는 탄원을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조선왕이 부드럽게 말하자 황제는 더 따지지도 못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나는 명나라로 돌아가고 싶지 않네! 신하란 자들은 다 황제를 이용하고 속여먹을 생각만 하지, 그걸 동생께서도 알잖나! 차라리 범부로 사는 한이 있어도 동생과 함께 있고 싶네!”
“형님. 제가 주기적으로 친서를 써서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형님께서 보내주실 편지를 기다리겠습니다. 군주의 역할이 쉽지 않은 것을, 어찌 소국의 군주라고 모르겠습니까? 소국의 군주로서 대국 군주가 얼마나 노고가 많은지를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형님께서 황제가 된 것은 하늘의 선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대명의 백성을 맡기고자 형님을 선택하셨는데, 하늘의 기대를 쉽게 저버리셔야 되겠습니까.”
“……흐윽.”
황제는 울상이 되었으나 더 이상 따지지 못했다.
조선왕이 한참이나 손을 토닥여주니 황제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눈물 자국을 잔뜩 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명으로 돌아가겠네. 하지만 동생께서는 편지를 보내주셔야 하네. 그리고 내가 답서를 보내면, 동생께서도 반드시 편지를 주셔야 하네.”
“물론입니다. 신하들에게는 보여주지 마십시오. 오직 형님과 저만의, 군주의, 친구의, 형제 사이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가감 없이 나눠봅시다.”
“응. 그래. 그러세. 반드시 그러세! 꼭 그래야 하네!”
황제는 끅끅거리며 울었다.
그가 진정될 동안 밖으로 나와 있던 수보대학사 신시행이 조선왕에게 예를 표했다.
“더없이 감사드립니다.”
“수보대학사께서는 본국으로 돌아가시면 노고가 더욱 심해지겠지요?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제가 폐하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보대학사께서 결의를 가지신다면 폐를 끼친 입장에서 무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수보대학사의 집안까지 억울한 일을 당할 것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흑.”
신시행도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조선왕은 무서운 자였다. 군자의 인품을 보이면서도 군주로서 실리를 잘 챙겼다.
양국의 불화로 인해 벌어진 전쟁이라지만 요동과 산해관의 행방은? 환관과 관리들에게 검열받지 않고 오갈 편지에 담겨 유출될 대국의 비밀들은?
조선은 거인이 벌레를 짓밟듯 단숨에 명나라를 이기면서 저력의 분명한 차이를 알렸고, 황제와 대신의 마음까지 얻었다. 과연 조선 상대로 보복을 꿈이나 꾸겠는가?
신시행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은 천하의 영웅이라고. 그가 조선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한 명나라는 절대로 조선을 능가하지 못하리라고.
그런 영웅의 밑에서 일하지 못하는 것이 한이고 또 한이었다.
* * *
“……?”
조선의 신하들은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던 와중에 영의정 이이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왕이 직무 태만의 좋은 변명거리로 삼았던 황제는 조선의 관리들에게는 영 쓸모가 없는 존재였고, 그가 조선을 향한 마음을 돌린 한 호형호제 놀이는 그만하고 한시라도 빨리 본국으로 꺼져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심한 모습을 계속 봐주는 것도 불쌍했다.
성상 전하가 어떤 인물인가?
입만 열면 사기에 모략에 음모에 귀계다.
그는 마주한 사람을 습관적으로 등치는 자였고, 그걸 이겨내는 사람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어떻게든 당한 상태이고야 마는 것이었다.
황제가 아무리 진심으로 왕을 좋아하건, 결국 사람 우롱하고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는 사악한 자에게 놀아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전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황제에게?”
금상은 제정신으로는 그럴 인간이 아니었다. 말이 되나. 자상함이라니.
좌의정 심수경이 말했다.
“열도에는 카게무샤라고, 군주와 닮게 생긴 자를 훈련해 최악의 상황을 방지한다고 합니다. 혹시 성상께서는 모화관이 아닌 다른 곳에 계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하지만 전하께서 정무에 가짜를 내세우신 적은 없는데. 아씨. 뭐지? 진짠가?”
이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쩌면 놀아난 것은 명나라 황제만이 아니라 조정 전체일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게 평소 왕 다운 짓거리였다.
그새 또 사람들을 병신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이이는 전율을 느꼈다.
이 정도로 수작을 부리는 인간도 없으리라고.
금상은 동서고금을 가려도 비할 자가 없을 정도로 유능하면서도…… 동시에 사람 엿 먹이는 기술마저도 유능함의 극에 달해 있었다.
진짜로 이 모든 것이 왕의 장난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주상 전하 납시오.”
내시의 말에 당혹해하던 신하들이 좌우로 헤쳐모여 시립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면서도 정면을 지나치는 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가짜인지 진짜인지 가려내기 위해서.
‘특이한 점은 없거늘.’
다들 조심스러워하는 와중에.
우의정 류성룡이 입을 열었다.
“전하.”
저게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지?
이이는 자신의 뒤에 선 류성룡을 돌아볼 수도 없고 신경이 쓰였다.
“무슨 일인가, 우의정.”
“모화관에서 황제와 수보대학사에게 한 말씀, 사실이옵니까.”
저게 미쳤나!
이이는 머리가 찡했다. 처음 관리가 되어서도 또라이 짓을 하더니, 의정 대신의 반열에 오르고도 또 또라이 같은 짓이나 저지르고 있었다.
정말 의미 없는 질문이다.
맞다면 어쩔 테고 아니라면 어쩔 텐가. 전임 의정들도 다 못 견디고 도망친 판국에 제가 뭘 하겠다고 물어보고 자빠졌나.
‘어휴!’
이이는 의정부로 등청하면 답이 없는 류성룡에게 단단히 버릇을 새겨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용상에 자리한 왕이 답했다.
“조금 전까지 카게무샤니 뭐니 멍청한 소리나 해대면서 내가 진짜인가 아닌가를 논하고 있던데, 내가 가짜라도 분간할 재주는 있나?”
아.
이건 진짜군.
자리에도 없었는데도 뻔히 있었다는 듯 그새 보고를 받아서 귀신같이 면박을 주고, 느그들이 뭘 알긴 아냐는 식으로 또 면박을 준다.
몇 마디 말로 사람을 병신으로 만드는 기술은 흉내 낼 자가 없었다. 그게 훈련으로 되겠나. 금상이 아니고서야 불가한 일이었다.
‘혹시?’
이마저도 이중 삼중으로 펼쳐놓은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내가 가짜라도 분간할 재주는 있냐.’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것이 사실을 말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건 너무 가는군. 가짜건 진짜건 그 말마따나 전하께서 각오하고 저지르는 짓이면 분간해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이는 그만의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했다. 그것이 그가 가녀린 자신의 영혼을 보호하는 방법이었다. 한 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으니.
왕이 말했다.
“그래서, 나는 왜 불렀나. 피곤한데.”
“송구하옵나이다. 하나 구주좌수사가 치계하기를, 왜추 풍신수길(豐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군사를 일으켜 변방을 침입했다 하였사옵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흐음……. 뭐든지 다 알고 있었다고 하는 건 진짜 왕 같은데.
이이는 그런 생각을 문득 떠올렸다가 서둘러 잊어버리고 말했다.
“명령을 내려주시옵소서.”
“큐슈의 백성들은 아조에 충성심이 높고, 또 다들 혼란한 시대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이다. 쉽게 무너지지는 않겠지. 하나 방심할 수는 없다. 하삼도에서 군세를 규합해 왜추를 치게 하라. 명 원정 참전자는 최대한 배려하라 하고.”
“받들겠나이다.”
“아, 그리고 왜추의 수급은 반드시 가져오라. 내가 이번에는 반드시 술잔으로 만들어 기념품으로 삼아야겠다.”
“……전지하겠나이다.”
* * *
구주좌수영.
최근 자신의 수군을 이끌고 원정에서 귀환한 이순신은 비보부터 받아야 했다.
“그게 사실인가.”
“예. 이미 증언을 많이 받았사옵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이순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수영만큼은 엄격하게 기강과 군율이 유지되어야 했다.
무관과 병사들이 고생한다는 것은 알지만 구주좌수영은 아직 정토되지 않은 왜 영주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만일 저들이 기습이라도 한다면 가장 먼저 받아내야 하는 위치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적의 예봉을 더 꺾어내지 않고, 또 더 버티지 않으면 육지가 위험해진다.
더군다나 자신이 병력 다수를 이끌고 자리를 비운 순간은 특히나 기습에 취약했다.
이런 때 태만과 해이는 용서할 수 없었다.
실수가 아니라 분명한 고의를 가지고서 저지른 죄라면 더욱이!
이순신은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찌그리며 노성을 터뜨렸다.
“원(元)을 당장 내 앞에 대령하라!”
“아닙니다. 오늘날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소인이 수보대학사로서 폐하를 더 잘 모시지 못한 탓이니.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변명 한 번 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