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왜 이순신이죠-283화 (283/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83화

101. 바보형과 함께 (2)

“기구의 뜬 이래 사고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대신 우리가 직접 뛰어내려야지요.”

“예?!”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것은 기구.

드높은 상공에 뜨자 한평생 땅에 발붙이고 살았던 황제는 겁을 내다, 감탄하다, 다시 겁을 내고 있었다.

“어, 어찌하여 뛰어내린단 말입니까! 이 높이라면 반드시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하. 안 죽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가방을 메면 죽지 않는다고.”

“도대체 이 가방이 무어라고요? 죽는 사람마저 살리는 비책이라도 있습니까?”

“죽어가는 사람은 살릴 수 있어도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지요.”

“헉.”

바보형 만력제는 죽지는 않으나 죽어가는 상태로 전락하였다가 살아난다고 생각했는지 덜덜 떨었다.

“방금 드린 말씀과 이건 관련이 없습니다. 단지 아조의 의술이 발전해서 말이지요.”

“그럼 어떻게 여기에서 뛰어내리고도 살아난다는 말입니까?”

“여기 줄이 보이십니까. 폐하께서 멘 가방에도 있습니다.”

“보입니다.”

“뛰어내리면서 이 줄을 확 잡아당기면, 가방에서 새처럼 날개가 펼쳐져 추락하지 않고 천천히 내려올 수 있게 됩니다.”

“아…….”

바보형은 원리를 알자 그제야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땅에 처박고 난 뒤 어떻게 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하지만 기구에서 뛰어내릴 용기가 나지는 않았는지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침음했다.

“꼭 해야겠습니까?”

“폐하. 본국으로 돌아가시고 나면 이와 같은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기 힘드실 것입니다. 만일 폐하께서는 신선의 초대를 받아 별세계를 가게 된다면, 바둑 한 번을 아니 두시렵니까?”

“그건.”

다시는 하지 못할 체험이라는 말에 황제는 결심이 선 듯 물었다.

“조선왕께서 나를 지켜주시는 것이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럼 하겠습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시지요. 함께 내려가야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예!”

나는 바보형을 끌어안고 기구의 난간으로 향했다. 바보형은 피둥피둥한 살집이 바들바들 떨렸으나 주저하지는 않았다.

“내려가겠습니다!”

“우악!”

기구에서 떨어지자 도성의 한복판이 쾌속으로 가까워졌다.

“조선왕!”

“신이 있습니다! 침착하시고 줄을 당기시지요!”

“그래, 줄! 줄!”

바보형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낙하산 줄을 찾더니 확 잡아당겼다.

그러자 낙하산 가방이 열리면서 퍽, 하는 공기 치는 소리와 함께 추락이 멈추고 천천히 하강했다.

낙하산 착지 훈련을 미리 할 수는 없었고 황제의 체형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으므로 낙하산은 특대형이었다.

이대로 서로 붙들고서 사이좋게 착륙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브로맨스는 내 타입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바보형에게 말했다.

“이제 양쪽의 손잡이를 잡고 방향을 조절하시면 됩니다. 저기 갈대숲이 보이십니까?”

“보, 보입니다!”

“나무에 걸리면 위험하니 거치적거릴 게 없는 갈대숲에 착륙하겠습니다. 그럼.”

“조선왕!”

나는 바보형을 밀어내고 하늘에 몸을 맡겼다.

다시 추락이 시작되고 대지가 면전으로 빠르게 날아왔다. 나는 서로의 낙하산이 부딪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서는 줄을 당겼다.

-퍽!

공기 치는 소리와 함께 어깨의 줄이 단단히 조여왔다. 하강이 시작되고, 나는 천천히 갈대밭으로 향했다.

낙하산이 시야를 가려 바보형을 바로 볼 수는 없었으나 외곽에서 따로 노는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대로 잘 따라오는 모양이었다.

대지가 가까워지자 나는 발을 뻗어 내달렸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착지는 안전했으나 살짝 분 바람이 낙하산을 밀어 앞으로 굴렀다.

“후!”

나는 낙하산에서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보형도 대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다리가 다칠 수 있으니, 바로 떨어지지 말고 내달리십시오!”

“알았소!”

바보형은 시킨대로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 역시 내달리다가 낙하산을 뒤집어썼다. 다행스럽게도 바보형은 그마저도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후!”

간만에 몸을 써서인지 바보형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거칠게 숨을 쉬었다.

“어떻습니까?”

나의 물음에 바보형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눈물부터 핑 돌았다. 이 인간이 쫄아서 울려는 건가 싶었으나 그건 아니었다.

“흐어엉! 조선왕께서는 나를 이렇게 잘 대해주시고 둘도 없을 경험을 안겨 주었는데, 나는 내가 못나서 신하들이 조선왕을 모함하고 양국이 싸우는 것을 막지 못하였소!”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그게 내가 바라던 수순이었거든…….

덕분에 나는 명나라를 시원하게 패주고 상하 관계를 분명히 한 다음, 간섭의 여지도 없애고 요동도 먹었다.

그뿐이랴.

요동에서 좌지우지하던 여진족들이 전부 조선의 영향력으로 들어온 것은 물론, 패권국이 조선군 앞에서 개박살 나는 광경을 여진인과 열도인들에게 똑똑히 보여주었다.

어설프게 깝쳤다간 다음에 가루가 되고 피떡이 되는 건 자신이라는 걸 알았을 테니 함부로 설칠 생각이 싹 사라졌겠지. 조선의 저력을 동네 친구들에게도 잘 퍼뜨려 줄 거다.

거기에, 언제든지 수도권인 직예를 위협할 수 있는 산해관도 차지했다.

물론 명은 복수를 시도하려면 자신들이 피땀 흘려 세운 천하제일관부터 뚫어야겠지.

이 얼마나 수지맞는 장사냐?

바보형은 국제관계의 말랑카우, 아니, 우량 고객이시다.

이 정도 대접은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울지 마십시오. 폐하가 번국에서 옥루를 보이신다는 말이 퍼졌다간 품위에 해가 될 것입니다.”

“흐어엉…….”

“이미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진즉에 조선왕을 신경 써주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흐엉.”

“그리 말씀하신다면 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일어나시지요. 긴장하시느라 많이 시장하실 겁니다. 아침과는 다른 식사를 마련하였으니, 어서 갑시다.”

또 다른 산해진미를 맛보여주겠다는 소리에 바보형은 훌쩍이기를 그치고 나의 손을 붙잡았다. 그는 용포로 얼굴을 쓱 닦고는 말했다.

“내가 본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오늘 일은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조선왕은 나의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일개 신하와 친우가 되셔도 되겠습니까.”

“신하들은 군주라면 모두의 앞에서 면을 세우라고 강요하지만, 정작 저들은 편하게 친우를 사귀고 다니지 않습니까? 내가 하늘의 보우를 받아 조선왕을 만나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았으니, 조선왕만 괜찮다면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호형호제의 의리도 세우고자 합니다.”

바보형…….

“물론입니다!”

이 인간, 본국으로 돌아가면 신하들이 아무리 개지랄을 떨어도 절대 조선에 해가 갈 짓은 안 받아주겠군.

설령 명 조정이 감히 보복할 상황이 아니고 그럴 생각조차 감히 품기 힘든 상황이라 해도 악감정은 남을 터다.

주제 파악 못 하고 한 줌 땅덩이 쥐고 있다고 쌍팔년도 감성으로 천하를 오시해 왔는데, 한 번 맞았다고 단번에 철이 들겠는가.

하지만 황제씩이나 되는 사람이 조선을 못 물고 빨아서 안달이라면 신하들도 눈치를 봐야 할 테고, 내색조차 못 하게 되면 감정은 빠르게 희석될 수밖에 없다.

진짜 우리 바보형은…….

어떤 역사에서도 조선밖에 모른 사람이 되었구나.

“형님…….”

“아, 아우!”

나와 바보형은 찐한 포옹을 나눴다.

* * *

신시행은 황제가 사신들이 머무는 모화관에서 조선왕과 호형호제하는 모습에, 30년은 일찍 늙는 기분이 들었다.

적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무엇이 좋다고 적장과 형, 동생 하며 하하호호 한단 말인가.

걸레가 되어버린 명 조정은 대패의 원인과 황제를 넘긴 치욕스러운 항복의 원인을 내각수보대학사 신시행에게서 찾았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기도 했고, 어지간한 인물이 다 죽어서 책임 분담마저 불가능했으며, 결정적으로 직접 황제를 넘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모든 잘못을 신시행에게 떠넘기고 자신들은 추호의 불이익도 받지 않으려는 구차한 의도 때문이었다.

덕분에 신시행은 곱게는 못 죽을 팔자였다.

아직까지 관직과 명이 붙어 있는 이유는 오직 조선군이 산해관에서 신시행만은 들여보내 줄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일 뿐.

그래서 신시행은 황제를 모셔서 본국으로 안전히 귀환한 다음에는 죽음으로서 죄를 갚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에 그럴 기운도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폐하. 대명의 대소신료들과 만백성들이 폐하의 귀환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이제 거동해 주시옵소서.”

“너는 수보대학사가 되어서도 내가 편안하게 즐기는 모습을 한 시도 용납하지 않는구나.”

“만일 폐하께서 조선에 남아 계시면 명나라의 정무는 누가 보겠습니까?”

“언제는 너희들이 나의 허락을 받아가며 정무를 본 적이 있더냐? 내가 황제로 기능하면서 얻은 심려와 피로가 많으니 조선에 좀 더 남아서 피로를 풀어야겠다!”

“폐하…….”

신시행은 입술을 말았다.

황제를 모시겠다고 홀홀단신으로 찾아와 도성에 입성한 지도 사흘째.

하루 이틀이야 그렇다 쳐도 사흘째 버티고 있으니 신시행은 죽을 노릇이었다.

제때 황제를 데려오지 못한다고 먹을 욕은 또 얼마나 되려나.

분명 대명제국과 황제 폐하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만고의 역적으로 남아도 무방하다. 북경에서만 해도 그런 결의를 세웠지만, 지금은 무뎌진 지 오래였다.

책임을 나눠 지고 싶지 않아 자신만을 쥐 잡듯이 몰아붙이는 조정의 신하들에게.

충신이라고는 못하겠으나 목숨을 걸었던 신하의 간언을 무시하는 황제의 모습에.

“조선 국왕 전하.”

신시행은 몸을 돌려 조선왕에게 손을 모았다.

“잠시 소인이 긴히 말씀 한 번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황제가 초를 쳤다.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또 동생에게도 간사한 소리를 올려 심기만 불편하게 만들 생각이냐?!”

“아, 아니옵니다. 폐하.”

신시행이 답하자 조선왕도 거들었다.

“형님. 신(申)이 폐하를 모시고자 단신으로 아조를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이 동생은 신(申)이 고생한 만큼의 대우는 해주고 싶습니다.”

“내가 찾아오지도 않았거늘 제 발로 찾아와서는 민폐나 끼칠 뿐인데 대우라니.”

“형님께서 이해해주십시오.”

“동생께서는 너무 마음이 착해서 탈일세. 저런 것들은 당해줄수록 감사해하지 않고 도리어 기어오른단 말이야!”

신시행은 찍 나오려는 눈물을 겨우 참았다.

분명 자신의 주인은 황제이고 원수는 조선왕인데 도대체 누가 자신의 주인이고 누가 원수인가.

대국에서 태어나 수보대학사라는 자리까지 올라온 것이 일신의 과분이고 가문의 영광이라 생각했거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조선국에서 태어나서 말석이나 해먹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한 번만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흥. 서둘러 다녀오게. 자네는 동생의 시간을 너무 빼앗지 말고!”

“예. 폐하.”

신시행은 황제에게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리고는 발길을 돌리는 조선왕을 쫓았다.

그리고 모화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선왕은 발을 돌렸다.

“수보대학사께 죄송할 뿐입니다.”

“아? 아닙니다!”

신시행은 기겁해서 손을 젓고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분명 조선왕은 악독한 사람이고 주도면밀한 사람이라 생각했거늘, 황제와 호형호제하는 마당에 감히 추궁할 자도 없거늘 명나라의 신하 따위에게 사과를 한다.

그것이 군자가 보이는 진의이건 소국을 이끌고 대국을 정벌할 정도로 심모원려가 깊은 자의 수법이건, 어느 쪽이라도 대단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황제와는 그릇부터가 다른 자.

“폐하께도 말씀을 이미 많이 드렸지만, 전쟁은 절대 대명에 악의를 품고서 벌인 일이 아니며, 황상께 폐를 끼치고 싶은 마음 역시 추호도 없습니다.”

“예. 직접 보아 잘 알고 있습니다. 조선 국왕 전하께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전자의 진위야 어땠건 약속대로 황제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얼마나 잘해줬는지 본국에서 누릴 건 다 누리고 살았던 황제가 돌아가기 싫다며 떼를 쓸 정도였다.

그게 문제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조선왕이 말을 이었다.

“내가 폐하께 진심을 고하고 양국의 평화와 함께 나아가야 할 건전한 미래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말씀을 여러 번 올렸는데, 보아하니 이 사람의 행동이 도리어 폐하께 해만 된 듯합니다.”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건 다 명에서 폐하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탓이지요…….”

“전해 듣기를, 명에서 수보대학사께서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다 폐하를 위한 일인데 오명을 얻고 악명을 얻으면 어떻겠습니까.”

“하아……. 신 수보께서는 참으로 만고의 충신이신데. 폐하께서는 수보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으시니.”

신시행은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황제가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아서는 아니다. 어디 하루 이틀이 일이었던가. 이제는 무감각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원수여야 할 조선왕이 황제가 알아주지 않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고 위로해주니, 서러운 심정에 복잡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흐윽!”

“내가 폐하를 잘 설득해 보겠습니다. 폐하께서도 나와 조선의 진심을 이해해 주셨으니, 이만 대명으로 돌아가 정무를 보시는 게 양국의 상처를 보듬고 다시 정상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요. 오히려 수보께서 직접 거동하게 만들어 송구할 뿐입니다.”

“아닙니다……. 조선 국왕 전하의 배려와 은의에 소인은 그저 망극할 뿐입니다.”

신시행은 손을 모아 꾸벅 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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