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82화
101. 바보형과 함께 (1)
패장이나 다름없는 황제를 굳이 데려와서 접대까지 해주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승패가 정해졌으면 쿨하게 받아들이고 뒤끝이 없어야 하는 법이다.
물론 내가 졌을 때는 그렇지 않겠지만.
지금은 내가 이겼으니까.
“폐하.”
“아…….”
영은문까지 나와 내가 맞아주자 만력제는 침음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적지에 떨어진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
황제라는 직함이 칼침을 막아주는 건 아니니 아직까지는 부담스러울 때다.
하지만 그는 나라를 도외시할 정도로 욕망과 감각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나는 만력제에게 특급 서비스를 해줄 예정이었다.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내가 모화관을 가리키자, 황제는 정문에 달린 현판을 읽고는 쓰게 답했다.
“예.”
제국의 황제가 되어서 사신들이나 쓰는 숙소를 소개 받으며, 번국이자 신하국으로 치부해온 군주 앞에서 차마 큰소리도 못 치려니 속이 쓰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 처음이 어려운 법.
나는 만력제를 모시고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머무르면 되는 것입니까?”
“예. 당분간은 그러실 겁니다.”
“국왕께서는…… 친절하시군요.”
“편하게 대해주셔도 됩니다. 대명 황제 폐하가 아니십니까.”
“아, 아닙니다.”
적진의 포로가 되어서 어떻게 적장에게 싸가지 없이 편하게 대하겠나. 만력제도 대뜸 말을 놓을 정도로 개념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만력제의 근본 자체가 개념 충만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북경이 떡이 되고 심양이 가루가 된 광경에 자연스럽게 개념이 탑재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다음 차례로 떡이 되고 가루가 되는 것은 자신일 수도 있으니.
그것을 안다는 점에서 만력제는 다루기 편한 사람이었다.
“폐하께서 신을 어려워하시니 부담스럽습니다.”
“으, 으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폐하께 부담을 주는 것이겠지요. 알겠습니다. 원하시는 방식으로 대해주십시오.”
“이해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쌍방의 관계에 못을 박는 대화가 오간 후, 만력제는 은근히 당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돌아갈 줄 알았는데 돌아가지 않아서겠지.
“나에게 바라는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당분간은 폐하와 함께 모화관에서 머무르며 휴식을 취하고 싶어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청을 드려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던 차였습니다.”
“아……?”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만력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 때문에 왕이 정무도 보지 못하고 연연하실 필요 없습니다. 진심입니다.”
당연하겠지. 호랑이가 침소까지 쫓아와서 일대일 전담 마크를 하겠다는데. 만력제에게 지금의 나는 방심하면 대가리째 씹어먹을 놈으로 보일 터였다.
“아아. 음. 폐하의 앞이니 신이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예에.”
“아무리 군주가 되었다지만, 매일 같이 정무만 보고 싶은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좋은 빌미를 잡았으니 일개 범부처럼 귀한 손을 모시고 한동안 쉴까 합니다.”
“아……. 하하.”
대답마저도 의외였는지 만력제는 허탈하게 웃고는 답했다.
“그건, 그렇지요.”
“신민들은 군주가 철인인 줄 안다니까요. 정작 저들도 성실하지 못하면서 군주에게만 만민의 본보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징그럽습니다, 징그러워요.”
“조선 왕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몰랐습니다.”
“허어……. 혹시 폐하께서도?”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울 일은 아니지요. 만일 부끄러워해야 할 자들이 있다면, 염치도 없이 위로는 강요하고 아래로는 부리는 신하들 아니겠습니까.”
“하하.”
만력제는 마음이 맞는 소리가 나오자 긴장이 조금 가셨는지 짧게 웃었다.
“만일 대명의 신하들이 폐하를 잘 보필하였으면 양국에 이런 분란이 발생할 일도 없었을 터인데.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전쟁이 벌어진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사신이 조선의 수도에 동창의 지부를 심고서 정보를 빼내 가면서, 최근 아조가 평정한 여진족과 열도의 땅을 내놓으라지 않겠습니까. 다 대명의 안위를 위해 신하 된 도리로 오랑캐들을 정토하여 얻어낸 영토이니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만, 거기에 은을 이십 만 냥이나 내놓으라고 엄포를 놓으니까요.”
“허!”
만력제는 전혀 몰랐다는 듯 경악했다.
“나는 듣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알리지 않았단 말입니까?”
“예.”
“참……. 이게 문제입니다. 신하들은 군주를 진심으로 모시지 않아요. 그저 장식처럼 앉혀두고는, 진정으로 중요한 일들은 저들끼리 다 저지르고 책임질 일은 모두 떠넘기지요!”
“맞습니다, 맞아요. 나 역시 아조의 관리들이 조선을 상대로 이토록 패악을 부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모르겠지, 정무 자체를 안 보는데 뭘 알겠나.
전적으로 황제가 직무유기한 탓이지만, 그렇다고 나라를 일시정지할 수도 없고 신하들은 결국 저들끼리 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만력제에겐 중요하지 않겠지. 그걸 알 만한 사람이었으면 나랏일에서 손을 놓지도 않았을 테니까.
“졸지에 대명과 조선 사이의 이백 년 우정에 금이 간 듯하여 안타깝습니다. 신의 폐하를 향한 마음은 일변도입니다만. 신하들이 왕을 제대로 보필하지 않고 제멋대로 나라를 경영하려 드니.”
“으음.”
만력제는 쓰게 침음하더니 어렵사리 답했다.
“조선 왕께서 혹시나 나에게 아쉬워하는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토록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참으로 안심되고, 미리 배려해 주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신 역시, 절차가 아름답지는 못하였으나 이렇게 황제 폐하를 직접 마주하고서 진심을 전해드릴 수 있어 다행이고 이해해 주시니 은혜가 과분합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하하하.”
만력제는 긴장이 다 풀려버렸는지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와…….
이렇게다 단순하고 순진무구한 사람일 줄이야.
나 같은 놈이 둘 있었으면 서로 웃으면서도 뒤로는 저걸 어떻게 쑤시지, 하고 잔대가리 굴리고 있었을 텐데.
“말만으로는 언제나 부족한 법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아조의 조정을 친히 방문해 주셨는데, 어찌 신하가 되어서 정성을 다해 모시지 않겠습니까.”
“아, 조선왕에게 많은 폐를 끼쳤는데 어찌 대우를 바라겠습니까.”
“신하들이 멋대로 저지른 일은 신하들이 풀 일이고, 군주 간에는 진심과 우정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개의치 마시지요.”
“알겠습니다, 하하.”
“하하하.”
나는 동네 바보형과 함께 대소하며 뒤편을 향해 박수 쳤다.
그러자 모화관의 식구들이 상을 하나씩 이고서 등장했다. 하나같이 보기 힘든 산해진미의 연속이었다.
“오.”
만력제는 대번에 감탄을 흘렸다.
조선은 조선만의 물산이 아니라 여진족과 왜, 특히 서양의 물산이 공존하고 있었다. 없는 것이 없다는 중원이라도 극동을 아우르고 서방과 교류하는 조선만 하겠는가.
오히려 중원의 문화에 한평생 갇혀 있었던 만력제에게는 신기의 연속일 터였다.
“좋은 자리를 봐두었습니다. 호수 위에 정자를 띄워 두었는데, 대명의 전경에는 미치지 못하겠으나 일대에서는 이만한 곳도 없습니다.”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모시겠습니다.”
모화관의 뜰을 가로질러 조금 걸어가니 후원의 호수가 등장했다.
“썩 괜찮습니다.”
“좋게 봐주시니 영광입니다. 상을 들여라.”
정자에 자리를 가깝게 마련하고서 연회상을 켜켜이 들이니 황제는 정신없이 상을 둘러보고는 입술을 말았다.
당장이라도 하나씩 맛을 보고 싶다는 듯.
“드시지요.”
“아, 하하하. 내가 너무 격식 없이 그만.”
“이런 자리가 아니고서야 어찌 군주와 군주가 만나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사심 없이 쉴 수 있겠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허례허식에 매이실 필요 없으십니다.”
나는 마음껏 맛보라고 권하니 바보형은 감명 받은 표정을 지었다. 황제로서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 하나 없었을 그.
이런 관계는 처음인지 해맑은 표정으로 술병을 들었다.
‘헉!’
술병은 언제나 흉기가 될 수 있었다.
만력제가 내 대가리를 술병으로 깨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순간 들었지만 바보형은 술병의 입구를 들이밀며 말했다.
“내가 조선왕께 한 잔 권해도 되겠습니까.”
“아, 폐하께서 직접 내려주시는 술이라면 영광이고 영광입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는 대신 가볍게 웃었다.
방심할 수 없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술잔을 두 손으로 받드니 바보형이 손을 휘저었다.
“조선왕께서 먼저 허례허식에 매이지 말자고 하시고는, 이러시기입니까. 군신의 관계에 매이지 말고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아…… 감사합니다. 예.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나는 한 손을 떼고 가볍게 술잔을 내밀었다. 잔이 채워지자, 이번에는 내가 술병을 들어 바보형의 잔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속은 착잡하였으니.
‘이 인간이 사실 바보형이 아니라 유비처럼 눈치 좋고 약삭빠른 인간이라면?!’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순진할 수 있단 말이냐.
내가 만력제의 역사를 알아서 망정이지, 만일 내가 만력제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면 분명 가식이고 수작이라며 된통 당하기 전에 뒤통수에 칼침 박을 생각이나 하고 있을 터였다.
‘바보형을 상대로 나 혼자 너무 미쳐가는구만. 이제는 명 황제를 마주하고도 눈치 볼 구석 어디에도 없는 위치에 이르렀건만, 이것도 병은 병이구나.’
PTSD라 하든가.
선조 이 썩을 놈이.
뒈져서도 나에게 이런 심병을 남기다니.
사람을 아주 망가뜨려 놓았다.
“자, 자. 한잔하십시다.”
바보형이 해맑은 표정으로 권했다.
“예!”
나는 바보형과 짠, 하고는 술잔을 기울였다. 바보형의 순진무구함은 명에게는 더없는 독이었지만 나에게는 더없는 홍복이었다.
아!
바보형이 백 년 만 년 살아서 명나라를 다스려주면 좋겠구나!
* * *
“허, 허어어!”
바보형이 감탄했다.
그의 발아래에는 도성의 전경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것은 기구!
나에게는 대단한 체험이 아니었으나 한평생 땅 위를 밟고 다녔을 황제에게는 거의 현대인의 우주여행에 버금가는 진귀한 체험일 터였다.
기구가 떠오를 때만 하더라도 덜덜 떨면서 꼴값을 다 떨 정도였으니까.
지금은 진정했는지 고개를 빼꼼 내밀고서 전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원래는 연구 용도를 제외하고는 탑승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께 진귀한 경험을 드리고 싶다고 엄히 명하니 학장도 고집은 안 부리더군요.”
“허어. 대학이라는 기관이 범상치 않게 보이기는 했으나 어찌 신하가 되어서 감히 군주의 비위도 맞추지 않는단 말입니까?”
“대국이나 소국이나 사정은 다 똑같은 모양입니다.”
지랄이다.
내가 대학 이사장이나 다름없는데 학장이고 총장이고 까라면 까야지. 게네들 월급이랑 교수들 연구비를 누가 주는데.
“마음에 드십니까?”
“들다 뿐이겠습니까!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이렇게 하늘에 떠서 천하를 내려다보는 광경은…… 정말 둘도 없을 진귀한 경험입니다!”
바보형은 엄청나게 감명받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진귀한 체험의 극을 누려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조선왕이 권하는 것이라면 독주도 마시겠습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하오시면 폐하. 이걸 등에 메시지요.”
나는 기구 구석에 박혀 있던 가방을 건넸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살리는 물건입니다.”
“이걸 어찌하여 멘다는 말입니까? 설마 기구가 갑자기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겁이 슬쩍 났는지 몸을 웅크리는 바보형이었다.
“그럴 리가요! 기구의 뜬 이래 사고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대신 우리가 직접 뛰어내려야지요.”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