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왜 이순신이죠-281화 (281/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81화

100. 영혼 흡수자 (1)

“허.”

그새 영의정으로 진급한 이이가 감탄을 흘렸다.

어떻게 되나, 싶었으나 조선군은 대승에 대승을 거듭했고 파죽지세로 요동과 직예를 가로지르며 경로에 있던 모든 방해물을 가루로 만들어버린 뒤 황제를 전리품으로 가져 왔다.

일부 병력은 산해관과 요동에 치안 유지를 위해 남았다.

특히 부원수 신립의 기마부대와 정인홍의 연해도 토병들은 무순관을 통해 기어들어 온 여진족을 쓸어버리고자 남았다.

그 와중에 요동과 연해도 사이의 방대한 영역을 영토로 편입한 것은, 분명 놀랄 일이었지만 최근 연달아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유별나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언제 온답니까?”

우의정으로 영전한 류성룡이 물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강을 넘었겠군요.”

“대단합니다, 참으로 대단해요.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렇게까지 사해만방에 위세를 떨치게 될 줄이야.”

“조선의 신민으로서 오늘날처럼 즐거운 날도 없지요, 하하.”

이이가 웃자, 조용히 눈치를 보고 있던 좌의정 심수경도 끼어들어 거들었다.

“다 성상 전하의 뛰어난 영도 덕분 아닙니까.”

심수경은 이이와 쌍으로 자신을 갈구던 노수신이 빠져나가자, 살만한 입장이 되었으나 노수신이 좋지 않은 이유로 사직해서인지 지금은 눈치의 연속이었다.

혹시라도 이이에게 찍혀서 뒤지게 당할까봐.

“크흠!”

이이는 헛기침하고는 답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주상 전하께서 즉위하시고서 조선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 대조선이 오늘날까지 이르는데 선대왕들의 공로가 없다고는 못 하겠으나 주상 전하의 공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말이야 선대왕도 챙겨주는 식이었으나, 선대왕들 중에서도 빼어난 왕들을 몇 분 제외하면 나머지는 있거나 말거나 수준이었다.

그에 반해 금상은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영화는 절대로 이룩할 수 없었다.

단지 그걸 입 밖으로 내뱉어야만 알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없으니, 굳이 말하지 않을 뿐.

“그렇지요, 그렇지요.”

이이가 받아주자 심수경은 긴장을 풀고서 맞장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성룡은 속에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막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콧대는 높고 개념은 없었을 때 왕을 상대로 무슨 짓거리를 저질렀는지.

‘아, 씨바아……ㄹ.’

류성룡은 입 밖으로는 혼잣말로도 안 내뱉는 저속한 단어를 속에서 외웠다.

대과 급제를 축하하는 연회인 은영연에 참석하는 날.

류성룡은 왕을 상대로 꼰대같이 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냐면, 왕은 이미 현직자인데 자신처럼 막 급제한 자들이 감히 맞먹으려 들어서 되겠냐고 지적한 것이었다.

그게 맞는 소리건 틀린 소리든 간에 대과 급제 동기들과 친해지려는 왕에게 대놓고 꼽을 준 것이었고, 왕이 상급자이자 현직자라고 드높일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그런 식으로 굴어서는 안 됐다.

오죽하면 왕이 감정이 상해 은영연에 참석하지도 않고 발길을 돌렸겠나.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언급되지 않고 있으나 왕의 권위가 한계를 돌파해 현인신 강림 수준에 등극한 지금, 옛일이 다시 거론되면 자신은 때려죽일 놈이 되는 수가 있었다.

‘오래 전에 좋게 풀었으니 다 끝난 일이겠지? 나를 의정 대신으로 기용해 주었으니 분명 뒤끝은 없으시다는 뜻이렷다?’

류성룡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기우를 진정시켰다.

그때의 일로 왕이 갈굴 생각이었다면 기회는 많았다.

하지만 왕은 친절하게도 류성룡을 다른 대신들과 동등하게 괴롭혔다.

가감 없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네놈들이 장관이 되어서도 이따위로밖에 못 하니 내가 나설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아, 좌상.”

“예. 영상 대감.”

“그거 아십니까?”

“말씀하지요.”

“우의정 저거, 성상 전하께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 아십니까?”

이이와 심수경의 시선이 모이자 류성룡의 눈이 파들파들 떨렸다.

의정부 공적이 심수경에서 류성룡이 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 * *

“전하.”

“고하라. 영의정.”

“도원수가 황제를 대동하고서 귀환하고 있다 하옵니다.”

“음.”

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다른 병력들은 계획에 차질 없이 이동하고 있겠지.”

“그러하옵니다. 신 부원수와 정 부원수는 요동의 안정을 위해 남았고, 하삼도와 구주의 병력은 신속한 해산을 위해 수로로 움직일 것이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하삼도의 병력은 육지에 상륙해서 각지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옵니다.”

“잘하고 있군. 내가 일을 크게 저질러 군민의 고생이 많았으니 해산에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된다. 신과 정 부대의 노고도 충분히 치하하라.”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이이는 도원수가 황제까지 대동하고서 돌아온다는 낭보에도 침착하게 답하며, 단순히 승리에 기뻐하지 않고 군민의 고생을 걱정하는 모습에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과연 조선의 새 시대를 개막한 성군이라면 마땅히 이래야지.

만성적으로 신하들을 놀리고 배신하고 뒤통수치고 뒤에서 온갖 사악한 음모와 계획을 수립하지만…….

백성만 잘 챙겨주면…….

음…….

‘신하들에게도 잘 대해주시면 더 바랄 것도 없겠거늘.’

그것까지는 과욕이겠지.

왕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오늘날의 성과를 이룩하지도 못했을 거다.

“또한 대원군이 사군에서 발호한 적장 양목탑올의 수급을 보내왔사옵니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다들 잘할 것이라고.”

그래.

대원군!

요동 원정이 벌어질 동안 왕이 날치기로 저지른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친부인 대원군과 장인인 부원군 권율을 대뜸 폐사군으로 보낸 것이었다.

대 명나라 원정이라는 초유의 대업을 진행하는데 변방 중에서 유일하게 폐사군만이 안정되지 않아 방비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왕의 광기 어린 만행은 알려지는 것이 늦는 게 법칙이었으며 두 사람은 폐사군으로 떠난 지 오래였다.

뒤늦게 안 신하들은 기겁했다.

무관도, 문관도, 참하관도, 재상도 아닌 종친인 대원군과 부원군을 적지에 보내버리는 미친 패기에 말이다.

신하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대 명나라 원정에서 공을 세우게 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하려는 배려인가?’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폐사군에 부친과 장인을 보내버린다고? 미친 건가? 나 정도 되는 인간의 아버지들이라면 이 정도는 해내라, 아니면 죽든지, 뭐 그런 건가?’

자칫하면 왕의 부친과 장인이 동시에 적의 손에 들어가거나 유명을 달리할 수도 있는 말도 안 되는 만행이었다.

평소 미친 짓과 수작을 많이 부리는 왕이라지만 신하들은 ‘아버지들을 강하게 키우겠다’는 상식의 저변을 넓혀주는 신시대적 패륜 혹은 뜨거운 맛 효도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경중에 비해 워낙 터무니없는 일이라 두뇌가 사고를 파업해버린 데다, 명나라 원정이라는 초유의 일까지 진행되고 있어서 두 사람의 일은 한동안 거론도 안 되던 차였다.

하지만.

‘두 분께서는 잘 해내셨지. 내금위장 선거이(宣居怡)도 많이 고생했을 터이다.’

왕은 두 아버지만을 떨렁 적진에 던져놓을 생각이 아니었는지 내금위 병력도 붙여주었고, 이제는 익숙해져 소소한 위화감만을 안기던 후원의 과묵한 자들도 한동안 보이지 않던 차였다.

이 정도라면 폐사군의 여진족들을 충분히 상대하고도 남을 전력이었다.

특히 뒤쪽 놈들은 명령만 떨어진다면 백두산도 없애버릴 자들이었으니까.

왕이 말했다.

“양목탑올의 수급은 살점을 벗겨내고 두개골을 잘라내서 잔으로 만들게.”

“아무리 대조선에 항거한 적장이라지만 엄벌이 과한 듯하옵니다.”

“황제에게 기념품으로 주려고 그런다.”

“……포로 신세나 다름없이 되어 잡혀 온 황제가 그것을 받든다면 경기를 일으키지 않겠사옵니까.”

“돌아갈 때 줘야 하나?”

“눈에 거슬리면 그렇게 만들어버리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옵니다…….”

“아. 까다롭군.”

왕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으나, 신하들에게는 왕처럼 까다로운 사람도 없었다.

“황제가 오면 나는 당분간 접대로 놀 생각이니, 경들은 나의 휴식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 어지간한 일이라면 세자에게 맡기고.”

“아직 세자는 어리옵니다.”

“세자쯤 됐으면 나이가 대수인가.”

세자는 왕을 닮아 총명하였으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왕을 대행할 정도는 아니었다. 경험도 부족하고 지식도 부족했다.

그런데 대뜸 놀아야 하니 세자에게 맡기라니.

“만일 세자가 정무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때려도 된다. 직접 손을 대는 것이 어려우면 대가리라도 박게 하던가.”

“아니…… 전하…….”

부친과 장인에 이어 세자까지 강하게 키우려는 왕의 태도에 신하들은 영혼이 착즙되는 기분이었다.

이미 영혼이 짜이고 짜이고 짜인 상태거늘.

왕은 마른오징어도 짜면 물이 나온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신들이 어찌 감히 세자를 욕보이겠습니까. 반드시 필요한 일들만 보고하겠으니, 그 정도만 처리해주시옵소서.”

“명나라까지 정복한 마당에 무슨 대단한 일이 더 있단 말이냐.”

왕의 일침에 이이는 순간 말이 턱 막혔다.

“무, 물론 명나라를 정토한 일보다 더 대단한 일이야 있겠사옵니까.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옵니다.”

“그래, 그래. 정말로 중요한 일만 보고하도록 하라. 하지만 시답잖은 것들은 세자에게 맡기라. 그 아이도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할 것 아니냐.”

“예에…….”

“제대로 못 하면 혼내는 것도 잊지 말고.”

“아직 어린 세자에게 너무 가혹하실 필요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사자는 새끼들을 절벽에 떨어뜨려 종자를 가린다고 하였다.”

“과장일 것이옵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절벽에 떨어뜨리겠으며, 또 새끼 짐승이 어떻게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남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모르겠느냐. 단지 진위를 떠나 그 방식이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

이이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사고를 끊고서 자신의 가녀린 영혼을 보호했다.

* * *

황제를 굳이 데려와서 접대까지 해주는 이유는 단순했다.

명나라를 뒤지게 패놓고 전통적인 군신관계를 다시 이행하려는 의도야 당연히 아니다.

다만 명나라가 떡이 되는 과정에서 황제가 고생을 했을 테니, 신세계 구경도 시켜주고 잘 다독여서 반감을 무마하겠다는 거다.

아무리 조선이 당장은 명나라를 이겼다 하더라도 땅 넓고 대가리 많은 명나라가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라이벌 의식이라도 불태우는 순간, 조선은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피곤해지는 수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황제인 만력제는 마침 정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명나라에 책임감이라곤 추호도 없으니, 개인적인 감정만 잘 다독여주면 굳이 조선과 분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으리라는 거다.

‘원 역사의 조선에는 덕이 되기도 했고.’

명나라 군대 때문에 조선이 고생했다지만, 놈들이 왜놈들 총탄 나눠서 맞아주지 않았더라면 조선이 다 맞아야 했을 거다.

물론 황제의 명만이 아니라 전장을 조선에 국한함으로써 명나라의 영토를 보존하겠다는 의도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놈들이 도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어쨌거나, 좋게 좋게 하자는 거지.

피차 피곤하게 살지 말고.

승패가 정해졌으면 쿨하게 받아들이고 뒤끝이 없어야 하는 법이다.

물론 내가 졌을 때는 그렇지 않겠지만.

지금은 내가 이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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