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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80화 (280/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80화

99. 역천자 (2)

태화전 내부의 전경은 처참함의 극치였다.

지붕까지 주저앉으면서 어전 한쪽에 시립한 신하들은 온데간데없이 축축하게 젖은 잔해만이 가득했고, 반대편에는 가까스로 깔리지 않은 자들이 여기저기 처박힌 채로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곳곳에서 나오는 죽어가는 신음만이 태화전이 절멸만은 가까스로 피했음을 겨우 확인해 줄 뿐.

“태화전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 서둘러 거처를 옮기셔야 하옵니다.”

“어디를 간단 말이냐? 어디를 가서 저 조선군의 폭거를 피할 수 있단 말이냐!”

신시행은 반파해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린 지붕을 바라보았다. 마치 거인이 우악스럽게 뜯어낸 것처럼 박살이 난 부위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신시행은 다급히 말했다.

“적어도 여기서는 아니옵니다.”

“다, 다리가.”

황제는 덜덜 떨기만 할 뿐 내려오질 못했다. 옥좌는 그가 모두의 경배를 받으며 가장 안도할 수 있는 곳.

그동안은 정무를 도외시하며 옥좌를 찾은 적이 까마득한 황제였으나 이제는 옥좌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신에게 업히시옵소서.”

신시행이 뒤로 돌아 등을 내밀자 황제는 마다하지도 못하고 업혔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느라 피둥하게 살이 찐 이십 대 후반의 황제가 환갑이 다 되어가는 노신의 등에 업히니, 신시행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으나 내색조차 않고 계단을 내려왔다.

“어, 어디로 가는 것이냐?”

“궁성이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면 궐내에서는 안전한 곳이 없을 것이옵니다. 일단은 공터로 나와서…….”

신시행과 황제가 태화전을 나서는 순간.

-뿌아아아아앙……!

“폐하!”

-꽝!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태화전에 조선군의 포탄이 작렬했다.

이미 반파된 태화전은 견디지 못하고 박살이 나버렸고, 신시행과 황제는 폭발에 휘말려 튕겨 나갔다.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은 막 태화전을 나서던 참이었고, 죽지는 않았다. 단지 밖으로 내동댕이쳐졌을 뿐.

신시행은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황제의 안위를 확인하고자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부, 부, 북경이…….”

성벽 너머로도 드높게 치솟은 화마. 천둥소리와 함께 들리는 무너지는 소리. 비바람 아래에서도 채 지워지지 않고서 부옇게 흔적이 남은 포연들.

북경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과거 경술의 변에서 북경이 포위된 적은 있었으나 기세 오른 오랑캐들도 감히 북경을 범하지는 못했다.

조선은 달랐다.

그들은 북경을 점거하거나 차지하거나 정복할 생각이 없었다. 놈들은 모든 것을 불살라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각오로 북경을 파괴하고 있었다.

귀곡성이 한 번 울릴 때마다 화마가 치솟았고 우레가 칠 때마다 무언가가 박살 났다. 꽈르르릉. 엄청난 것이 무너진 듯한 소리였다.

막 태화문으로 등장한 군관 하나가 경악을 하더니 드넓은 뜰을 질주해 왔다.

“폐하!”

군관은 펄쩍펄쩍 계단을 올라 쓰러진 황제를 부축했다.

“으으…….”

“괜찮으시옵니까!”

“이, 이대로는 안 된다. 조선에 항복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대로는 안 된다…….”

무엇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일까. 자신의 수모가? 아니면 명나라의 몰락이.

군관은 한쪽 어깨로 황제를 부축하고는 신시행에게 속삭였다.

“서문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아까 그 소리가.”

꽈르르릉, 하더니.

군관은 그것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신시행. 그리고 태화전 밖에서 황제를 기다리던 궁인 몇 명.

대신들의 행방은 뒤편에서 요란스럽게 불타오르는 태화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조선군은?”

“있던 자리에 있습니다.”

“병사들을 보내지도 않겠다는 거냐.”

“…….”

군관은 고개를 숙였다. 무인이 되어서 황제가 이 몰골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함을 참담해 하듯이.

“한데 조선군은 어찌하여 찾으십니까? 혹시.”

“내가 만고의 역적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더는 안 된다.”

“대인!”

“이대로 어쩔 셈이냐? 북경이 싸그리 잿더미가 되어야 만족할 텐가, 아니면 폐하께서 수모를 더 겪으셔야 만족할 텐가!”

“……아닙니다.”

군관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자 신시행이 조용히 일렀다.

“아니야. 자네 잘못은 아니지.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나를 포함한 조정의 신료들 잘못이 크다. 내가 폐하를 제대로 모시지 못해서…….”

신시행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황제를 바라보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황제를 대동한 한 줌의 생존자 무리는 자금성을 빠져나왔다.

궁성부터 남문까지 펼쳐진 황도를 중심으로 좌우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고 단숨에 유민으로 전락한 자들이 사방팔방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만일 안전한 곳이 있다면, 역설적이게도 조선군의 진영이다. 저들 스스로에게는 무시무시한 포탄을 날리지 않을 테니까.

“마필은?”

“말들은 전부 죽거나 도망쳐서 당장 취하시기 힘듭니다. 송구합니다…….”

“아니다, 됐다. 서문으로 가자. 이미 무너진 성문을 향해 계속 대포를 쏘지는 않을 터이니. 폐하를 업어라. 서둘러야 한다.”

“예.”

황제를 조선군이 포진한 서문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서 어쩌겠다는 말인가. 뻔했지만, 군관은 물론 궁인들은 말리지 못했다.

온 세상이 무너지며 인세의 지옥도로 전락한 북경은 황제가 있을 곳이 아니었으니.

일단의 무리는 내달렸고 혼돈 속에서도 얼핏 그들을 알아보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신시행은 그들을 챙기지도 못하고 그저 내달릴 뿐이었다.

한참을 나아가니 돌더미로 전락한 서문 너머로 조선군의 대오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도망가는 유민들까지 말살할 생각은 없었으니,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서 포성만 날려대고 있었다.

‘그렇다면 폐하를 변장시켜서 유민들 속에?’

신시행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곧 조선군이 태만하기까지 한 여유를 부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있었다.

황제가 어디로 가든.

명나라가 굴욕적인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중원을 돌아다니며 모든 것을 파괴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북경마저도 함락한 저들이 무엇을 못하겠나. 그들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풍광만큼이나 지옥 같은 군세였다.

그리고.

이미 대오의 중심에 선 장수들이 신시행과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황제가 알아서 올라와 자신들을 맞이하라는 뜻이었다.

‘어쩔 수가 없구나.’

황제가 여전히 비몽사몽이라 다행이었다. 멀쩡한 정신으로, 두 발로 서문에 이르렀다면 그대로 두 발로 조선군 앞까지 나아가야 했을 테니까.

참으로 치욕스러운 광경이었다.

이대로 업혀 있는 편이 나았다.

“가세.”

“예.”

신시행과 황제를 업은 군관이 유민들을 헤치고 조선군의 대오 정면으로 나아가니, 궁인들이 뒤늦게 오열했다.

황제가 적병들 앞에 바쳐지는 몰골을 어찌 맨정신으로 보겠는가.

신시행도 그들처럼 울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여기에서 쓰러져 한탄이나 하고 있으면 황제의 안위는 누가 챙길 텐가. 대명의 미래는 누가 보전할 텐가.

만고의 역적으로 남는 한이 있더라도 황제의 목숨과 대명의 미래를 지키기로 각오한 그였다.

그가 대오에 다다르자 중앙의 장수 하나가 손짓했다.

그러자 조선군의 정병들이 좌우로 늘어져서 길을 만들었다.

신시행은 그들의 면면을 보더니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여진족과 왜병들. 그들이 조선군과 동행하는 것만 보아도, 동방의 번국이 이제는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신시행과 일행은 조선군 앞에 엎드렸다.

“명국 수보대학사 신시행이 대조선국 대원수 합하께 삼가 절을 올립니다.”

그러자 조선국 장수들이 서로 몇 마디를 나누었고, 중앙에 있던 자가 답했다.

“뭐지, 버릇없이?”

“소, 송구하옵니다. 소인이 명나라에 살아 대조선국의 예의범절을 잘 모르니.”

“항복도 네놈들 말로 할 테냐?”

신시행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대명제국의 말 이외에는 쓸 일도, 쓸 필요도 없던 처지에 어떻게 조선어로 말을 하겠는가.

“요, 용서하여 주십시오, 대원수 합하. 소인이 조선의 말에 조예가 없고, 또 그러한 자를 수배할 상황이 아님을 긍휼이 여겨주십시오.”

“하.”

대원수는 하찮다는 듯 답했다.

“네놈들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니까 황상 폐하께서 이런 수모를 겪으시는 게 아니냐!”

“예, 예…….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지당한 분부이시옵니다.”

신시행은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내심 깊게 안도했다. 대원수의 말을 보아, 황제에게 해를 가할 생각은 없어 보였으니까.

“우리는 여기서 확실하게 할 생각이다. 대조선국과 계속 맞서 싸우겠느냐, 아니면 무조건 항복하고 부질 없는 목숨이나마 보전하겠느냐.”

“어찌 감히 소인들이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항거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 지경이 되도록 항복하지 않은 건 너희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네놈들의 주제 파악이 부족하다면 얼마든지 더 무력을 행사할 수 있다.”

“아, 아닙니다. 소인들의 우매함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어떠한 조건이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다만?”

대원수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자 신시행은 머리를 깊게 조아리면서 청했다.

“황제 폐하의 안위만은 보전해주시옵소서. 이 노구가 간절히 빕니다!”

“감히 우리에게 조건을 걸다니.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부디.”

“네놈이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대조선국은 천자의 안위를 해할 생각은 없다.”

“가, 감사합니다!”

신시행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하나 너희들이 황제를 제대로 모시지 못해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당분간 천자의 신변은 우리가 보호하겠다.”

“……!”

신시행은 벼락이라도 맞은 표정이 되었다. 그건 군관과 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를 데려가겠다니.

이미 명나라는 황제를 빼앗긴 경력이 있었다. 치욕스러운 일이었고, 그 뒤로 얼마나 혼란스러웠던가.

그나마 황제가 해를 입지 않고 귀환한 점은 다행이었지만 또 그로 인해서 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문제라도 있나? 내가 보기엔 네놈들에게 거부권은 없는 것 같은데.”

신시행과 황제는 이미 조선군의 진 한 가운데 있으니.

과연 대원수의 말대로 거부권은 없었다.

“합하의 말씀 대로이옵니다…….”

“황제가 걱정된다면 명나라의 사정을 정리하고 산해관을 찾아와라. 그대 한 사람 정도는 들여보내 줄 수 있으니.”

“폐하의 귀환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망극하옵나이다.”

대원수가 손짓하자 조선군의 병사 몇 명이 나왔다.

황제를 업고 있던 군관은 바들바들 떨었다.

하지만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황제를 빼앗기고는, 엎어져서 대성통곡했다.

조선군은 별다른 미련이 없어 보이는 게 분명했다.

황제를 챙긴 대원수가 손짓하자 포성도 멎고 폭음도 멎었다. 조선군은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군세를 돌렸다.

신시행은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산해관으로 찾아오라니……. 요동은 조선의 차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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