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79화
99. 역천자 (1)
“영원백이 시간을 끌 동안 대병을 규합하여 남진하면 조선 따위는 금방이라도 짓밟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청년이 외쳤다. 피둥피둥 늘어진 살집에 늘어진 금색 용포를 걸친 그는, 복장이 말해주듯 명나라 황제였다.
“그런데 조선군이 어찌하여 벌써 북경을 포위하고 있냔 말이야!”
황제의 말이 마치기 무섭게 궐 너머로 꾸궁, 꾸궁 하는 폭음이 울렸다.
요동에서 조선군의 침공과 함께 출진을 보고한 직후.
조정에서는 여진족과 몽골족을 상대하느라 다져진 요동의 군세와 불세출의 명장 영원백 이성량이라면 소국 조선군의 공세 따위는 얼마든지 분쇄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그리고 직예에서 정병을 규합해 육로와 수로로 밀고 들어가 조선왕의 항복을 받아낸다.
아주 완벽한 계획이었다. 산해관에서 비보가 오기 전까지는. 그리고 대응을 채 논할 새도 없이 다음 날이 되어서 조선군이 북경에 당도했다.
천진(天津)에서 규합하고 있던 직예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길게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장수와 정병들이 황제 폐하의 안위를 위해 한목숨 아끼지 않고 분전하고 있사옵니다!”
황제의 당혹감 어린 진노를 받아주는 자는 신시행이었다.
신시행은 특유의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으로 많은 사람과 친하게 지냈는데, 권신 장거정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장거정이 죽고 그의 일파가 숙청되는 와중에도 해를 입지 않았고, 지금은 전임 수보대학사 장사유가 부친상을 이유로 낙향하자 빈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 법이라면, 신시행은 모난 구석 하나 없는 돌이었다.
하지만 조선군은 신시행의 성격이나 이력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북경을 포위한 채로 사방에서 대신기전을 날려대고 있었다.
그 소리가 구중궁궐의 내부에도 쩌렁쩌렁 울리니 황제가 두려워 떨 수밖에 없었다. 신시행은 그저 황제를 다독일 뿐이었다.
“곧 다른 성에서 북경의 어려움을 알고 구원군을 보낼 터이니, 아무리 기세가 오른 조선군이라도 안팎에서 공격을 받는다면 어찌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뭐, 어쩔 수가 없어?! 네놈들이야말로 저 귀곡성 같은 소리를 어찌 해보란 말이다!”
“북경이 포위된 이래 궐에는 포탄이 떨어진 적은 없나이다. 또 소리만 클 뿐이지 성능은 형편없사옵니다.”
“그러하옵니다!”
“고정하시옵소서!”
신시행의 말에 평소 앙숙처럼 지내던 환관과 관리들이 이구동성으로 찬동했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궐에서도 조선군의 포성이 들리는 이유는 그들의 포탄이 자금성을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놈들은 자금성을 ‘못’ 때리는 게 아니라 ‘안’ 때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금성 너머의 행정구역을 하나씩 불태우고 있었다.
구역 하나가 불탈 때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유민과 병사들은 성을 나가지도 못하고 다른 구역에 누적되면서, 매 구역이 불탈 때마다 피해가 가중되고 있었다.
이대로 반 시진만 지나면 대명제국 수도 북경은 잿더미가 되어, 설령 조선군을 격파하더라도 남경으로 다시 천도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신시행은 조선군만 어찌할 수 있다면 북경 정도는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었다. 지금은 그조차도 불가한 상황이었으니까.
‘평소에는 황제와 동창의 위세만 믿고 호가호위하였던 금의위 놈들이 조선군 포대의 습격에 실패했으니!’
황제의 친위대이자 동창의 집행부대인 금의위.
그들의 존재는 조정의 대신들마저 부담스러워 할 정도였고, 그만큼 금의위의 기세는 호랑이를 등에 업은 여우와 같았다.
그러나 놈들의 삼천 결사대는 평소의 위세와는 다르게 처참하게 실패했다. 몰살을 당했는지 도망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조선군의 포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를 어쩐다!’
이 순간 방방 날뛰고 싶은 사람은 황제만이 아니었다.
신시행 역시 대명국의 수보대학사로서 대명의 활로를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바라고 있었다.
조선군과 맞서 싸워 시간이라도 벌 수 있는 놈들은 분쇄된 지 오래이며 북경의 행정구역은 차근차근 하나씩 불지옥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단 한 놈도 살려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이미 성내에는 문을 열어서라도 대피하려는 백성들과, 그들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맞서 싸우게 된 병사들로 반분이 됐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이다.
북경이 지옥으로 전락한 것은 단순히 조선군이 지옥불을 흩뿌려대기 때문이 아니었다.
‘수보대학사!’
신세경은 자신의 곁에서 속삭이는 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야!’
‘낭보입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신세경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선군이 끼얹어대는 불길이 얼마나 강하더라도, 일개 인간이 어떻게 하늘의 뜻을 거스르겠느냐. 비가 내리면 놈들의 공세도 주춤해질 터다.
그리된다면 일방적인 포격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
놈들이 정공법을 강요받건, 기상이 변할 때까지 기다리건 어느 쪽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제관(祭官)들을 모조리 내보내 제사를 올리게 한 보람이 있구나!’
신세경은 알았다는 뜻으로 손짓해 소식을 가져온 자를 물리고는 용상을 향해 발을 돌렸다.
“폐하, 경하드리옵니다!”
“무, 무엇이냐?! 구원군이 당도한 것이냐!”
“인간의 일도 중요하나 하늘의 뜻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조선군이 불경스럽게도 대명국의 수도에 불을 질러대니, 하늘이 비를 내려 다스리고 있다 하옵니다!”
“다, 다행이구나. 하늘이 아직 나와 대명을 버리지 않으셨다.”
난동을 피우던 황제는 하늘이 자신의 편이라는 소리에 용상에 풀썩 늘어앉았다.
관리와 환관들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선군의 기세가 이제는 한풀 꺾이겠구나 안도하며.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조선의 왕은 역천자(逆天子)라는 것을. 그의 군대 또한 하찮은 빗줄기로 굴복하지 않음을.
* * *
짙어지는 구름 아래.
부원수 이억기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차가운 빗방울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곁의 도원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비가 오는군요.”
“북경에서는 신났겠군.”
“이거, 항복이 늦어지겠습니다.”
“반대로 더 빨라질 수도 있지.”
을종탄 탄두의 소아제는 한 번 불이 붙으면 물을 뿌려도 꺼지지 않는다. 어설프게 뿌렸다간 더욱 기세가 살아버린다.
도원수는 원리를 알지는 못했으나, 알고 싶지도 않았다.
무시무시한 무기의 비밀을 후원의 사내들 외의 다른 자들이 알 필요는 없었으니까.
단지 을종탄의 위력은 빗줄기 따위로는 어찌할 수 없음만을 알 뿐이었다.
“비를 맞으면서도 불길이 전혀 진압되지 않는다면 놈들이 얼마나 좌절하겠는가. 계속 쏟아부어라.”
겸사겸사 위험한 물건을 여기서 전부 털어버릴 생각이기도 했다.
“그리고 선단에서 하역한 대포도 가동하는 것이 좋겠지. 단번에 몰아붙인다.”
“알겠습니다.”
이억기는 곁에서 명령을 함께 듣고 있던 부관에게 손짓했다.
그는 부원수를 대신해 물러났고, 오래지 않아 조선군의 대오 사이로 무지막지한 크기의 화포들이 등장했다.
포문 길이만 하더라도 1장 길이에 탄환 무게만 열 근.
조선 역사상 가장 큰 크기의 대포. 안본소는 그것을 컬버린이라 불렀다. 왕은 혀가 꼬이는 발음 대신 홍이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놈들이 덩칫값을 하는지 볼까.”
“기대되는군요.”
“전방에 배치하고 성문을 조준해라. 당적이 믿고 버티는 석벽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하찮은지 보여줘라.”
“예.”
포수들 십수 명이 홍이포 한 문에 붙어 낑낑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커다란 바퀴를 달았지만, 포신 무게만으로도 땅이 푹푹 꺼질 정도다. 장정들이 아무리 달라붙어도 홍이포란 녀석은 옮기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니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무겁기만 한 고철 쇳덩어리나 보여주려고 여기까지 가져온 게 아니었으니까.
포방렬이 끝나자 탄약수가 머리만 한 크기의 쇳덩어리 공을 껴안고서 끙끙대며 포를 장전했고, 방포 준비가 끝나자.
“도원수 대감.”
“방포해라.”
“방포하랍신다!”
우렁찬 전언이 떨어지기 무섭게,
-콰릉!
천둥 같은 포성이 났다. 포수들은 휘청거렸고 좌우에서 대오를 지킨 병사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홍이포에는 그만한 박력이 있었다.
성문은 홍이포의 포탄이 작렬하자 쿵,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구멍이 뻥 뚫렸다.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육중한 성문의 경첩이 다 나가버려 성문이 그대로 기울어졌다.
“대단합니다!”
“시원하니 좋군.”
“구중궁궐의 당적들은 천둥 번개가 치는 줄 알겠군요. 비바람이 더욱 거세지는 줄로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흠. 그렇다면 직접 목도하게 만들어야지. 잘난 북경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설마.”
“장손포대는 자금성을 조준해라. 내 황제에게 절 한번 받아보고 싶어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주제 파악이 필요하다면 도와주는 수밖에 없겠다.”
“성이 무너져 죽는다 한들 저 운명 아니겠습니까.”
“아, 그럼 안 되지. 황제가 죽으면 누가 당적 대표로 항복하겠나.”
이억기는 그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으며 말했다.
“포수들에게 살살 방포하라고 전하겠습니다.”
“하하하!”
“하하.”
* * *
황제와 관리, 환관들은 안도하고 있었다.
천둥까지 칠 줄이야.
이는 비바람이 더욱 거세어졌다는 뜻이 아니냐. 조선군의 화공도 이제는 끝장이었다.
끝장이어야 하는데.
-뿌아아아아앙……!
그동안 머리 위에서만 울리던 대신기전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심상찮은 징조를 감지했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동안 수보대학사 신시행이 다급해 외쳤다.
“숙이시옵소서!”
“뭐?!”
그러나 징조를 감지하지 못한 황제는 멍청한 표정으로 무슨 소리냐며 묻기만 할 뿐.
신시행이 황제에게 채 실망감을 느끼기 전에도, 황제는 신시행의 뜻을 알게 되었다.
-콰광! 콰과광!
궁궐이 뒤흔들릴 정도의 폭음들. 황제와 신하들이 모여 있던 태화전도 피격 직후 박살나고 부러지고 끊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나더니,
-콰르르르!
폭음과 함께 절반이 풀썩 무너져 내렸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굳건히 대오를 지키던 신하들은 온데간데없고 텁텁한 흙먼지만이 매캐하게 피어오를 뿐.
가까스로 살아남은 수보대학사는 황제의 안위를 살피기 위하여 비틀거리며 용상의 계단을 올랐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것저것 발에 걸리는 것이 많았다.
단단한 것들은 개의치 않았으나 물컹한 것이 밟힐 때면 신시행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가늘게 뜬 시야 너머로 뿌옇게 보이는 관복을 보고는 가까스로 안심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곧 신시행은 용상에 다다랐다.
“폐하! 계시옵니까?! 폐하!”
답이 들리지 않자 신시행은 팔을 뻗어 용상을 확인했다. 부드러운 비단의 촉감과 함께 푸짐하고 물렁한 살덩이가 만져졌다.
다행스러운 점은 용상이나 황제가 떡이 되지 않은 채 잘 있다는 점이었고, 다행스럽지 않은 점은 황제에게서 답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폐하! 살아계시옵니까!”
신시행은 흙먼지에 콜록거리면서 황제를 흔들어댔다.
평소라면 감히 황제의 옥체에 손을 대는 것은 물론, 흔들거나 생사를 추궁하는 일이란 대번에 죽음을 맞이할 일이었으나.
지금은 평소가 아니었다.
신시행이 격정적으로 황제를 흔들자 그제야 답이 나왔다.
“나, 나, 나나나나나난, 살아 있다…….”
황제는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그가 마주한 태화전 내부의 전경은, 대제국의 황제라면 살면서 평생 볼 일이 없어야 할 처참함의 극치였다.
지붕까지 주저앉으면서 어전 한쪽에 시립한 신하들은 온데간데없이 축축하게 젖은 잔해만이 가득했고, 반대편에는 가까스로 깔리지 않은 자들이 여기저기 처박힌 채로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곳곳에서 나오는 죽어가는 신음만이 태화전이 절멸만은 가까스로 피했음을 겨우 확인해 줄 뿐.
신시행도 부옇게 내려앉은 먼지 너머로 보이는 참혹한 광경에 입이 벌어졌으나, 차마 황제의 상심을 더할 수 없었다.
“태화전은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모르니 거처를 옮기셔야 하옵니다.”
“어디를 간단 말이냐? 어디를 가서 저 조선군의 폭거를 피할 수 있단 말이냐!”
신시행은 반파해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린 지붕을 바라보았다. 마치 거인이 우악스럽게 뜯어낸 것처럼 박살이 난 부위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신시행은 다급히 말했다.
“적어도 여기서는 아니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