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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78화 (278/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78화

98. 자연재해 (3)

행군이 이어지자, 무료함이 극에 달한 누르하치는 신립의 곁에서 한 마디 올렸다.

“자신을 군종장교라 소개한 색목인이 군영을 돌아다니며 미친 소리를 해대더군요. 조선의 왕이 물길을 내고 산을 깎았다는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신립이 답했다.

“전하께서 물길을 내고 산을 깎으신 건 사실이지.”

“……사실이라고요?”

“그래.”

“거인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한 사람의 힘으로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단 말입니까?”

“전하 한 분이서 오롯이 벌인 일은 아니지만, 누가 운하를 만들고 산을 무너뜨렸냐고 한다면 전하께서 하신 일이라고 답해야겠지.”

“허.”

누르하치는 상상도 되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도 아닌 아디한 한이 그렇다니 더 부정하지도 못하고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일개 사람이 어떻게 물길을 내고 산을 깎는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으나, 아디한 한도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을 해내지 않았던가.

난공불락의 위세를 자랑해온 무순관을 고작 불화살 한 대로 날려 버렸으니까.

그게 가능한 자를 수하로 부리는 조선 왕이라면, 그도 엄청난 괴물일지도 몰랐다.

당장 아디한 한의 위인 도원수만 하더라도 기이한 병기를 운용하는데 굉음과 창공에 남기는 검은 궤적은 물론, 모든 것을 분쇄해 버리는 위력이 이미 인간세계의 수준이 아니었다.

그동안 기고만장해 온 명나라 놈들마저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고 빌빌 길 정도니까.

“조선 왕에게는 모든 인간을 위한 계획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음, 전하께서는 계획을 수립하시는 걸 즐기는 편이긴 하지.”

“모든 인간을 위해서 말입니까?”

“전하께서 작정하신 일이라면 작은 일은 아니지.”

“진정으로 그가 신의 대행자일까요?”

“하늘의 아들을 자처하는 천자마저도 조선 왕의 명령을 받들어 진군하는 우리를 막아내지는 못하겠지.”

“으음.”

신립의 대답은 만족스럽지는 않았으나, 누르하치는 그가 사실만을 답하기 위해서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자신을 군종장교라 소개한 자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저 미친놈인 줄로 알았거늘.

하지만 신립은 군종장교의 말을 부인하지는 않으면서도 동시에 조선 왕을 진지하게 신격화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아디한 한께서는 조선의 왕이 신의 대행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전하를 따르는 이유는 전하께서 하늘이나 신과 연관 있어서가 아니라, 신임을 받아 신하가 된 자로서 주인을 따를 의무가 있어서이네. 조선의 관리라면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겠지.”

“담담하시군요.”

“신하와 군주 사이의 관계는 그만하면 충분하지. 그리고 전하께서도 조선성공회 작자들의 헛소리에는 관심이 없으시네.”

“숭배자들에게 무관심한 신의 대행자라니. 한번 뵙고 싶군요.”

“하.”

신립이 가볍게 웃자 누르하치가 따졌다.

“비록 소인이 오랑캐 취급이나 당하는 여진족이라지만, 많은 군공을 세우면 왕의 존안 정도는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평소에 왕의 존안을 많이 접하는 분들은 왕에게서 못 떨어져서 안달일세. 그러니 권하고 싶지는 않군.”

도원수에게서 영의정 노수신이 도성을 버리고 국경까지 쫓아왔다가 만류에 더 따라오지 않고 남았다는 말을 들은 참이었다.

전 영의정 박순은 사직하고서는 재산을 다 챙겨서 어딘가로 떠났고, 홍섬도 마찬가지로 사직하고서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산천을 유람했다.

아마 왕의 악명과 관련된 일들이 아닐까.

세 영의정이 연달아 편안하고 안락한 도성을 내버려두고 밖으로 새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이따금 도성에서 파견되어 연해도를 방문한 경관이나, 새로 부임해 온 관리들은 왕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신립의 앞에서 경기했다.

무한한 충성심과 경외심을 바치는 자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하급 관리들의 경향이었고, 고위 관리들은 왕이 없는 곳에서 일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안도하거나 안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왕에 대해서 직설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았다.

다만,

“전하의 곁에서 일하다 보면 영혼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고, 그것이 빨려 나가는 기분도 알게 된다더군.”

“사람의 영혼을 뽑아가는 건 귀신이나 괴물이 하는 일 아닙니까?”

“전하께서는 반은 신의 대행자이고 반은 귀신이나 괴물일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라도 나는 영혼이 빨려 나가는 기분이 무엇인지 굳이 경험해 보고 싶지는 않네.”

“소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조선 왕에 대한 호기심은 접어두기로 했다.

며칠 밤낮의 행군이 있었고 조선군은 마침내 산해관에 도달했다.

신립과 누르하치는 무순관의 위용도 산해관에는 미치지 못함을 알았다.

성벽은 바다에서부터 시작해 산해관을 가로질렀는데, 높이만 해도 어지간한 건물보다 높은 닷장 높이에 폭도 넓었다.

성벽의 올라온 부분인 여장도 얼마나 높은지 사람이 숙이지 않아도 몸이 다 가려질 정도였다.

움푹 들어간 부분인 타구에서 시야를 확보하고 공격한 다음 옆으로 살짝 피하면, 적의 화살을 전부 막아낼 수 있는 것이다.

또 관문이 있는 중심의 누각과 전루(戰樓)도 드높게 세워져, 마치 궁궐이 성벽 위에 지어진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산해관이 천하제일관이라더니. 위용을 보아하니 허명은 아니군요.”

부원수 신립이 평하고는 물었다.

“폭약은 있으십니까?”

“아니.”

“성벽이 너무 높아서, 아예 밑에서부터 무너뜨려 돌무더기로 만들지 않으면 넘어서는 것마저 어려워 보입니다. 장손포의 위력이 아무리 절륜하다지만 산해관을 무력화하려면 꽤나 번거롭겠군요.”

“지금은 장손포가 나설 필요도 없네.”

“폭약도 아니 쓰시고 장손포도 나서지 않는다면 산해관은 어떻게 무너뜨립니까?”

“우리가 접수해야 하는데 멀쩡한 관문을 왜 무너뜨린단 말인가.”

도원수 이을룡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는 천하(天下)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중천에 덩그러니 걸린 채 무심하게 빛날 뿐이었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원병 말입니까. 하지만 정인홍과 김시민이 합류하더라도 정공법으로 산해관을 공략하는 건 피해가…….”

신립이 말을 늘어놓는데, 문득 병사들의 시선이 해안으로 향했다.

거기에 뭐가 있단 말이냐. 신립도 말을 잇다 말고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과연 바다에 무언가가 있기는 있었다.

“명의 수군입니다!”

“쪽배들을 잘도 몰고 왔군.”

산해관의 맹점 중 하나는, 육상을 거치지 않고 바다로 돌아간다는 선택지가 있다는 것이다.

명나라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해안에 수군을 띄워 조선군의 우회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도원수의 원정대나 신립의 기마대에는 수군이 없고, 명 수군이 해안을 점한 지금 급조라도 전선을 건조한다는 건 너무 늦은 일이었다.

“설마 바다로 뛰어들어 적의 전선을 탈취해 우회한다는 계획은 아니시겠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부원수께서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건가?”

“큐슈에서만 해도 기상천외한 일을 많이 저지르셨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실패한 적은 있고?”

“……없지요.”

신립은 도원수의 전술에 대해 평가하는 일이 얼마나 의미 없는 짓인지를 깨달았다.

“이 친구들이 영 늦는군.”

“기다린다는 게 명 수군을 말씀하신 게 아니었습니까.”

“내가 명군 버러지들 따위를 왜 학수고대하겠나. 내가 기다리는 건 큐슈와 하삼도의 수군들일세. 저 쪽배 무더기를 분쇄하고 우리를 산해관 너머로 태워줄.”

“큐슈에서까지 오는 겁니까?”

“열도인들도 여진인 만큼이나 쓸모가 많지. 더군다나 큐슈에서는 일이 없어 방황하는 칼잡이들이 많아 문젯거리라더군.”

“그렇다면.”

신립이 다시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

-꾸궁, 꾸궁…….

포성이 아련히 울리기 시작했다.

“왔군요.”

“그런 것 같군. 수군들이 우리만큼 일을 잘하는지 어디 한 번 볼까.”

* * *

선상에서.

갑주를 두텁게 입은 사내가 생각했다.

살다 살다 명나라를 칠 줄은 몰랐다고.

처음 조정에서 온 인편이 구주좌우병사의 군대를 태워 산해관까지 진격하라는 소식을 전했을 때는, 왜적의 간악한 수작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명을 치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인가.

큐슈 원정이 완수된 지 채 몇 년도 안 지난 시점이었으며, 큐슈는 발호하는 왜적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이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는 것이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듯 조정에서 떨어진 명령은 큐슈의 방비를 약하하고 명과 조선을 이간질하려는 간악한 수작 따위가 아니었다.

조정이 먼저 큐슈의 방어력을 손해보는 한이 있더라도 명을 박살내고자 병력을 차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큐슈와 하삼도의 산단을 규합해 산해관까지 이르러 발견한 것은.

“사선(沙船)이 모래알처럼 해안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선장이 보고했다.

“이름부터 모래알 같은 배라더니. 과연 그 이름대로구나.”

명의 수군도 이순신의 선단을 발견했는지 황급히 선수를 돌렸다. 하지만 그들의 이목이 집중되어도 이순신은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명 수군의 중추인 사선은 왜구의 소형전선인 세키부네만도 못했다.

네모난 정방형의 평평한 갑판을 가진 사선의 전투 수행방식은, 단지 물 위에 뗏목을 다닥다닥 붙여 수상에서 육상의 전투를 구현하겠다는 수준에 불과했다.

사선은 선박과 선박 사이의 화력전이라곤 추호도 고려하지 않았고, 조선의 주력함인 판옥선과 거북선과의 체급도 심각하게 나서 화력을 투사할 필요도 없이 들이박아도 모조리 수장해 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한심하구나.”

이순신은 짧게 평가했다.

조선은 어찌하여 명을 치게 되었는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조선은 빠르게 나아가고 있는데 상국이자 주인을 자처하는 명은 여전히 과거의 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고작 이런 놈들에게 매여 있어서 조선이 어떻게 더 나아갈 수 있겠느냐.

조선의 왕은 자격 없는 주인의 존재를 증오하시는 자였고, 이미 그런 존재를 한 번 없앤 경력이 있었다.

그것이 개인이 아니라 일국이 되었다 할지라도 왕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을 뿐이다.

“어떻게 할까요.”

“중군장에게 명해라. 돌격해서 모조리 분쇄하라고.”

선장이 이순신의 명을 받아 기수에게 전하자, 오색의 깃발이 휘황찬란하게 휘저어졌다.

함선마다 명령을 주고받으며 신호기가 춤추었고 저판에서는 북소리가 커졌다.

선두의 거북선들은 물살을 가로 지으며 나아갔다. 명의 사선들은 진형을 갖추어 충격에 대비한 채 화살로 무의미한 저항을 시도했다.

그리고 거북선의 돌격을 조금도 저지하지 못한 채 들이박혀 폭음과 함께 깨지고 부서졌다. 마치 모래알처럼.

-콰광!

-콰과광!

적진으로 파고든 거북선들은 거리낄 것 없이 좌우의 대포를 갈겨댔다.

한 번의 포성이 있을 때마다, 한 척의 사선이 박살났다. 목재와 인간의 파편이 사방으로 치솟았고 비명과 고함소리가 폭음을 뒤따랐다.

“상대도 안 되는군요. 고작 거북선의 돌격조차 받아내지 못하고 저 지경이 되다니.”

“방심해서는 안 된다. 놈들이 제 발로 해안에 갇혔으니, 우리는 진형을 넓혀서 압박해 들어간다. 한 척의 배도 살려 보내지 마라.”

“명 받들겠습니다.”

판옥선으로 이루어진 수군 본대는 날개를 크게 펼치며 죽어가는 사선의 무더기를 천천히 옥죄어갔다.

명의 선박은 너무 낮은 나머지 포각조차도 내어주지 않았다. 그게 사선의 유일한 장점이었고, 동시에 무수히 많은 단점 중 하나였다.

명 수군은 피할 곳 하나 없는 평평한 갑판에서 그저 방황할 뿐이었고 서둘러 뛰어내리지 않은 자에게는 어김없이 총탄이 파고들었다.

-타당!

-타다다당!

-타다당!

“하하! 토끼를 사냥해도 이것보다는 고생하겠군!”

조총수 하나가 막 총열을 비우고는 대소했다. 그만큼 명 수군의 저항이란 보잘것없고 하찮았다.

판옥선의 틈새 사이로 멀쩡히 뜬 채로 빠져나간 사선은 많았지만 그 위에 살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안에서는 거북선이 종횡무진하며 내부를 박살내고, 외부에서는 판옥선이 좁혀 들어가며 박살내니 한 덩이 모래성은 파도라도 맞은 것처럼 쓸려나갈 뿐이었다.

“저기 우군이 보입니다! 이미 산해관에서 기다리고 있었군요! 도원수 대감도 보입니다!”

선장이 망원경을 거두며 보고했다.

“위협이 없어졌다면 구주좌우병사의 군대를 하선시켜라.”

이순신의 명령에 선박들 사이에서 분주하게 신호기가 움직였다.

판옥선들이 선체를 돌려 산해관 후방으로 나아가 수군이 일방적인 파멸을 목도한 산해관의 수비군들은 나와서 막아서지도 못하고 성벽 너머에 꼭꼭 숨어 떨기만 할 뿐.

곧 도원수 병력도 태워져 후방에 내려졌다.

원색의 휘황찬란한 철갑주를 두른 무사와 갖옷을 두텁게 걸친 전사들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열도인과 여진족이 한 전장에서 적도 아닌 아군으로서 상봉을 이루는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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