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77화
98. 자연재해 (2)
심양의 멸망은 유민들에 의해 빠르게 전해졌다.
귀신 울부짖는 듯한 소리와 하늘을 가로지르는 호선. 그것은 생민(生民)을 지옥으로 안내하는 곡소리와 삼도천의 검은 물길이었다.
콰광, 콰광. 요란한 폭음과 함께 호선의 끝에서 잔불이 바람을 타고 비산하고 불이 붙을 수 있는 건 모조리 불이 붙었다.
물이나 모래를 끼얹어도 지옥의 불길은 꺼지지 않는다.
곧 심양 전체가 인세에 현현한 지옥으로 전락하고,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시뻘겋게 타오르는 화마(火魔)와 장작뿐.
유민들은 살아남고자 성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며 버틴 수문장을 짓밟고 나아가 떨리는 손으로 잠금을 열고 쏟아져 나갔다.
정면의 멀지 않은 언덕에 조선군은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그들의 작품을 주시했다. 유민들은 당장이라도 그들이 말을 타고 쫓아와 모조리 주륙해버릴까 다리근육이 찢어지도록 내달렸으나, 쫓아오는 자는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그리고 그들이 맞았다.
“하, 항복해야 해!”
“문을 열어! 열라고!”
“죽고 싶지 않아!”
요양.
요동의 두 번째 가는 도시인 요양에는 (저들 딴에) 조선국의 진격을 한동안은 묶어둘 수 있는 방어시설과 상주병력이 있었다.
그러내 적은 외부에 있지만은 않았다.
심양에서 몰려온 유민들이 조선군이 왔다는 소식에 대경실색하며 빨리 항복해야 한다고 난동을 부려대는 탓이었다.
“조선군이 그렇게 무섭다면 어찌하여 요양에 왔단 말인가?!”
요양은 심양의 서쪽에 자리한 거읍.
또 산해관과 심양 사이를 잇는 대로에 있어, 조선군이 심양을 함락시켰다면 다음으로 찾아올 곳이 바로 이곳, 요양이었다.
그런데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제 발로 조선군의 다음 표적이 될 요양으로 와놓고는 조선군이 무서우니 항복하라며 지랄인가.
유민이 아니라 조선군의 사신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요양을 맡은 위지휘사 루(婁)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무얼 알겠습니까? 정병들을 시켜 소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모두 참하고 요양은 순순히 항복할 생각이 없음을 고려적에게 알려야 합니다.”
첨사의 간언에 루는 침음을 흘렸다. 그게 맞았다.
대명의 위지휘사가 되어서 고작 오랑캐 간적에게 항복한다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이냐. 문제는 가당치 않다면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라는 점이다.
총병이 심양의 장정 과반을 데리고서 남진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패잔병들이 대패를 알렸다.
봉황성(鳳凰城)이 요동에서 손꼽을 정도로 크다고는 하나, 본래는 천 년도 더 전에 오골성(烏骨城)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고려의 성이었다.
천 년 전 성이 건사하면 얼마나 건사하겠으며 굳건하면 얼마나 굳건하겠나.
총병의 대군이 사방을 에워싸고 진격을 명령하면 봉황성의 조선군은 응당 토멸되었어야 했거늘, 정작 토멸된 것은 대명군이었다.
야습을 위해 봉황성 앞에 포진하고자 불도 죽이고 조용히 이동하던 중 까마득히 떨어진 봉황성에서 대신기전이 떼거리로 날아와 오만 대군을 일시에 궤멸해버렸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으나 수백의 패잔병들은 물론, 무관마저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전장의 일을 이구동성으로 보고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무순관마저 돌파되었는지 사방이 여진족이었다.
놈들은 감히 요양의 성벽마저 범하지는 못했으나, 대신 외곽 마을이 모조리 약탈당해 성내에는 거리마다 오갈 곳 없는 요양과 심양의 유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결정적인 것은,
“심양이 하루아침에 불타 없어진 게 과장이 아니라는 게 문제야!”
심양은 요동의 심장이자 제1 거읍이다. 방비도 충실하고 수비병도 많다. 총병이 제법 데려갔다 하더라도, 아주 무주공산이지는 않을 터다.
그런데 그런 심양이 하루아침에 함락됐다.
아니, 하루아침도 아니다.
조선군은 대신기전을 갈겨대고는 심양이 불타오르는 것을 관망했다.
심양이라는 거읍이 품고 있을 군사적 행정적 가치를 고려하면 조선놈들은 제대로 미친 것이다.
그리고 그 심양마저 한 줌 잿더미로 만든 것들이 요양이라고 없는 이성이 솟아나지는 않을 터였다.
“포성이 몇 번 있더니 심양 전체가 불바다가 되어버렸다지 않나!”
“위지휘사 대인. 아무리 고려적의 대포가 우월하다 한들, 심양이 고작 방포 몇 번에 불타오를 수 있겠습니까? 분명 유민들이 오랑캐 따위에게 패하고서 심양을 잃었다는 것을 변명하고자 말도 안 되는 과장을…….”
-뿌아아아아앙……
“헉!”
위지휘사사 루는 발작적으로 일어났다.
그는 조선의 대신기전 발사음을 들어본 적이 없으나, 마치 저승으로 인도하는 귀곡성 같다는 표현은 근래 귀에 딱지가 앉도록 접했다.
“대신기전이다!”
“대인!”
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휘실을 빠져나와 밖이 보이는 누각으로 향했다.
귀곡성은 가까워졌으며 그것이 그리는 새카만 궤적은 밤하늘조차 묻지 못했다. 별빛을 가리며 빠르게 접근해오는 호선에 루는 난간 아래로 몸을 숙였다.
혹시나 이쪽으로 떨어지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며.
-콰광!
대신기전은 위지휘사에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그가 정면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마을에 떨어졌다.
“불이야!”
“조선군이 왔다!”
“문을 열어!”
“불을 꺼!”
고작 한 대의 대신기전이거늘 수백 채의 가옥이 화마에 사로잡혔다.
야밤이 단숨에 백주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고, 유민들이 말한 인세에 현현한 지옥이 파편이나마 구현됐다.
몇몇 주민들이 물과 모래를 뿌렸으나 화마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고, 항거할 수 없는 지옥불에 주민들은 공포에 젖어 방황하며 울부짖고 난동을 피워댔다.
만일 대신기전이 더 날아온다면…….
위지휘사 루는 발작적으로 절규했다.
“항복해라! 항복해! 다 타죽기 전에 문을 열고 항복해라아!”
* * *
“명국 동녕위지휘사 루국안이 대조선국 대원수 대인을 뵙습니다…….”
요양의 관리들이 불타오르는 요양을 뒤로 한 채 오체투지의 부복을 올렸다.
대원수가 아닌 도원수 이을룡은 한 마디 답했다.
“굳이 실력행사에 들어가야 항복할 정도로 머리가 안 돌아가나?”
“소, 소인들이 감히 천병(天兵)의 위용을 몰라보고 무례를 범한 점, 용서하여 주십시오!”
“천병이라.”
하늘의 군대. 이는 하늘의 자손을 참칭하는 명나라 황제의 군대에게만 허락된 극존칭이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도원수 곁의 부원수 이억기과 신립은 명나라의 고관이 절박한 태도로 굴복하는 모습에 더없이 뿌듯해졌다.
조선은 지난 이백 년 동안 명나라에 굴복해왔고 고작 환관 따위를 황제의 대행자랍시고 왕마저 절을 올릴 정도로 극진하게 모셨다.
두 사람은 그런 굴욕적인 시대에 살아왔으며, 그 시대가 막을 내리는 모습을 생생히 보고 있었다.
“네가 보기에 우리가 산해관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넘지 못할 것 같으냐.”
“넘습니다. 대인께서는 백 번이고 산해관을 넘으십니다!”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는 몰라도 돌무더기마저 불이 붙어 타오른다. 천하제일관이라 자부하는 산해관이라도 어쩔 텐가.
모조리 화마에 뒤덮이면 한 줌 잿더미로 화할 뿐이거늘.
직예에서는 조선군을 막아서고자 대병이 조직되고 있겠지만, 위지휘사 루는 아무리 대병을 몰고 오더라도 조선군을 이기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고작 한 발의 포탄이었으나.
그 한 발의 포탄마저 거읍을 함락시키고도 남음이니.
“나는 산해관으로 간다. 너는 내가 산해관을 넘어설 것을 확신하니, 실수하지 않으리라 믿겠다.”
“예, 예.”
“곧 조선의 후속이 온다.”
“차질 없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 할 것이다. 가자!”
도원수는 기수를 돌려 가볍게 박차를 가했다. 조선군은 거읍을 함락하고도 약탈은커녕 휴식조차 없이 발을 움직였다.
그만큼 요양의 함락은 요깃거리조차 되지 않는다는 뜻.
고작 대신기전 한 발만으로 함락했으니 마땅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위지휘사 루와 그의 수하들은 조선군이 대병이 끝을 보일 때까지 무릎을 꿇고 있다가, 대오의 마지막을 보고서야 다리를 절며 일어났다.
“후, 후우.”
“생각보다 군병의 숫자가 커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채 일 만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대명 전체를 어찌할 수 있을까요?”
“그 일 만이 안 되는 병력으로도 총병을 하루아침에 격파하고 심양을 불태웠는데 대명 전체를 어찌 못하겠느냐?. 제기랄, 후속이 온다니 너는 쓸데없는 마음 먹지 말고 트집 잡히지 않을 생각이나 해라.”
위지휘사 루와 수하들이 요양 성내로 복귀했을 때는, 행정구역 하나가 모조리 잿더미가 된 채였다.
주민과 유민들은 위지휘사의 항복에 분노하지 않았고 불타오른 가옥에 절규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지쳤고 자연재해와 같았던 조선군의 분노가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도했다.
그건 루도 마찬가지였다.
* * *
-짹짹
-까악
-짹!
누르하치는 요란한 새 소리에 눈 떴다.
막사의 틈 사이로 하얀 햇빛이 비쳤다.
벌써 낯인가.
머리맡에 놓아둔 물대접으로 입을 씻어내고 벗어둔 털가죽을 걸치니, 장막 밖에서 누군가 말했다.
“똑, 똑.”
“문도 없는데 무슨 똑, 똑이란 말이냐?”
“좋은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뭐?”
누르하치는 장막 밖의 놈이 보고를 위해 찾아온 전사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개소리를 하는 걸 보니 아니었다. 여진어도 어쩐지 어눌했고.
조선군과 동행하는 상황이라 수상한 놈이라고 칼부터 쑤셔박을 수는 없었지만 쫓아낼 수는 있겠지.
누르하치는 곡도를 챙겼다. 허리라도 한 대 찍어줄 요량으로.
-펄럭.
장막이 걷히고 누르하치는 의아함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넌?”
개소리의 주인공은 누르하치가 한평생 본 적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해를 못 받았는지 허여멀건한 피부에 눈은 쑥 들어가고 코는 쏙 나왔다.
그리고 상한 우유처럼 퀴퀴한 냄새가 났는데 놈은 모르는 것 같았다.
색목인(色目人).
눈에 색이 있는 자들이 있다고 얼핏 들어본 적이 있었다.
“조선성공회에서 왔습니다.”
“그건 또 뭔가.”
“공께서는 신이 공을 위한 계획이 있으며, 국왕 전하께서 그것을 실현하시려 이 세상에 친히 강림하셨다는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뭐어?”
색목인 놈이 장막을 사이에 두고서 ‘똑, 똑’이라고 인사했을 때부터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확실했다.
이 코 큼지막한 놈은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는 게냐. 종잡을 수 없는 헛소리나 지껄일 셈이라면 가라. 내가 진즉에 너를 베지 않은 이유는 조선군의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이니. 하지만 나의 인내심은 크지 않다.”
“그 의문에 대해서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확실하게 조선군의 일원입니다. 군종장교의 역할을 맡고 있지요.”
“군종장교?”
“그렇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말에 누르하치는 눈살을 찌푸렸다.
놈이 여진어로 말하느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되는대로 지껄여대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천 오백 년 전 신의 아들이 모든 인간의 원죄를 짊어지고서 대신 죽음을 맞으셨지요. 지금, 국왕 전하께서도 모든 인간을 위한 계획을 이행하고 계십니다.”
“국왕 전하라면 조선의 왕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조선의 왕이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위한 계획이 있다고.”
“정확합니다.”
“내가 보기엔 네놈은 완전히 미친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하지만, 이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무얼.”
“조선의 왕은 물길을 새로 내고 산을 깎았습니다.”
누르하치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길을 내고 산을 깎다니.
그의 머릿속에서 상상이 펼쳐졌다. 산보다 커다란 거인이 대지를 파헤쳐 물길을 내고, 산비탈을 웅큼 쥐어 깎아내리는 것을.
“조선의 왕이 거인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해내셨지요.”
“그걸 내가 어떻기 믿으라고?”
“신 부원수께 물어보십시오. 아디한 한의 말씀이라면 믿으실 줄로 압니다.”
“……좋다. 하지만 아디한 한의 말씀과 너의 말이 다르다면, 나는 아디한 한께 자신을 군종장교라 칭하며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미치광이를 베어도 되냐고 물어보겠다.”
“기꺼이요.”
누르하치는 이제 볼일 없으니 꺼지라는 투로 손을 내저었다.
자신을 군종장교라 소개한 헛소리쟁이 광인은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고는 옆의 막사로 향했다.
보아하니 내내 저럴 모양이었다.
과연 그는 막사 앞에 서서 ‘똑, 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를 냈고 누르하치는 짧게 평가했다.
“미친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