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76화
98. 자연재해 (1)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기에, 부원수께서 당도한 것을 알았네.”
도원수 이을룡이 말했다.
기마대를 이끌고 합류한 신립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불화살이 폭약에 적중한 순간 섬광과 함께 폭음과 풍압이 조선군과 여진족을 강타했다. 멀리서 그 소리를 들었더라면 과연 마른하늘에 날벼락으로 들릴 만했다.
“무순관은 어떻게 되었나?”
“한 줌 돌더미만 남았습니다.”
무순관이 폭발해 비산하는 광경을 끝까지 목도한 사람은 없었다.
폭음과 풍압이 조선군과 여진족을 덮치자 그들이 타고 있던 전마들이 놀라서 난동을 피웠으며, 기수들이 각자의 말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무순관을 확인하니 관문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직 돌더미만이 남아 한때 여기에 무순관이 있었다는 것을 가까스로 입증할 뿐.
거칠 것이 없어진 여진족 대부분은 말을 재촉해 요동으로 파고들었으나 적지 않은 수가 조선 기마대에 합류했다. 신립을 ‘아디한 한’이라 부르면서 말이다.
“천둥군주라!”
여진족들은 신립이 보여준 기예와 무순관이 굉음과 함께 없어져 버린 것에 감명을 느낀 게 분명했다.
“듣기 민망합니다.”
“어떤가, 멋지기만 한데.”
“크흠.”
“합류하느라 고생하셨네. 지금은 쉬게. 곧, 다들 피곤해질 터이니.”
“알겠습니다.”
신립은 군례를 올리고는 물러났다.
그는 처음 도원수의 막사를 방문할 때만 해도 도원수를 어떻게 맞아야 할지 몰라 잔뜩 긴장했었다.
비록 도원수가 지금은 병조판서와 원정대 총지휘관의 되었다고는 하나, 신립이 기억하는 도원수의 마지막 모습은 주인을 성실히 모시는 머슴이었으니까.
신립의 가문 평산 신씨는 예전만은 못해도 그의 현조(玄祖) 신개 문희공은 벼슬이 좌의정까지 이른 대신이었다.
그의 후손으로서 태어나고 자란 신립은 가정이 유복하지는 않았어도 머슴과 노비 정도는 몇 거느리고 있었고, 신립은 그들을 하대하는 게 익숙하고 당연했다.
과연 그들 중 하나가 대신이 되어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올랐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고작 가정에 불과해도 치졸한 열등감이 들었으나, 막상 막사에 들어서서 도원수를 마주하니 혼란함은 간데없고 심정은 그동안 무수히 거쳐온 상관들 앞에 섰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신립은 도원수가 먼저 상관으로서 확실한 태도를 보여 준 점, 그리고 자신이 천성 무인이라는 데 안도를 느꼈다.
“아디한 한. 볼일은 다 보셨습니까?”
“누르하치. 무슨 일인가.”
누르하치는 손을 모아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이전과는 다른 태도였다.
“주제넘은 말일 수도 있겠지만, 아디한 한께는 지금 여진족 전사들을 맡길 자가 없어 곤란하신 줄로 압니다.”
여진족 오합지졸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거의 보이지 않는 표적을 일격에 적중한 무위에 감명하고 난공불락으로 보였던 무순관이 가루가 되는 저력에 놀라 신립을 칭송하며 주인으로 맞았으나.
정작 신립은 그들의 주인이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두 배로 늘어난 군대를 재편하는 것도 일이지만 조선어를 한 마디도 모르는 데다, 지역까지 달라 연해도 여진족과도 대화가 거의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르하치처럼 조선어를 배우려는 노력이라도 했다면 모르겠지만.
전쟁판에 껴서 한몫하고자 조선군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던 각 부족의 오합지졸 여진족들은, 단적으로 말해 똥멍청이들에 불과했다.
“너에게 맡겨달라는 뜻이냐?”
“그렇습니다.”
“내가 그대를 신임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 텐데.”
“알면서도 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진족의 마음은 바람과 같으니, 잡아두기도 어렵지만 풀어두면 행방을 가늠하지 못하게 됩니다.”
누르하치의 지적대로, 똥멍청이들은 무작정 신립의 군대에 합류했으나 통제할 사람이 없어서인지 수시로 사고를 쳐댔다.
특히 저들끼리 수시로 싸워대며 다른 똥멍청이 여진족들을 동요하게 만들며, 나아가 조선군의 분위기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신립은 안 그래도 방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던 참이었다.
“여진족들을 규합하여 너의 전사로 만들기 위함이라면, 불손한 생각은 다시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소인이 의심받을 것을 각오하고 아디한 한께 조언을 올린 이유는, 야만적인 자들이 아디한 한께 폐가 되지 않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더군다나 이곳은 조선군 대장의 진중이 아닙니까.”
귀화한 여진족이 즐비한 평안도나, 최근까지도 여진족의 영역이었던 연해도의 토병들과는 다르게 도원수의 병력은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
그들은 나라에 해악만 끼쳤던 여진족이라면 조선에 적을 두었건 부족이 무엇이건 경멸하고 혐오했다. 그건 누르하치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여진족은 저들끼리도 반기지 않는 족속이 아닌가.
진중에서 그가 받는 시선만으로도 조선군이 여진족에게 가지는 감정은 잘 알 수 있었다.
만일 오합지졸 똥멍청이 여진족들이 이들을 상대로 사고라도 쳤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네가 나를 걱정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나는 아부에는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디한 한께 진정으로 충성하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고작 활 한 번 쏘았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소인이 본 것은 고작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르하치는 눈을 반짝이며 간곡히 말했다.
그는 한 사람의 전사로서 신립의 무예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고작 화살 한 대로 난공불락의 무순관을 무너뜨리다니!
신화에서나 접한 일을 두 눈으로 목도하자 누군가에게 굴복하는 일은 추호도 고려해 본 적 없었던 누르하치마저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좋다. 새로 편입한 여진족들을 다루는 일은 너에게 맡기마. 하지만 후회할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폐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장에 나설 일이 생긴다면 소인을 맨 먼저 보내주십시오.”
“알았다.”
누르하치는 자신에게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는 듯 공손히 예를 올렸다. 신립은 고개를 끄덕여 가볍게 받아주고는 발길을 돌렸다.
* * *
요동, 심양.
승냥이 떼나 다름없는 여진족이 한 번 훑고 간 심양의 외곽은 폐허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불타고 무너진 가옥이 즐비했으며 거리마다 시신이 늘어져 있었다.
심양의 몇 없었을 수비병, 장대와 농기구를 들고 맞서던 일개 백성, 사냥감에게 도리어 사냥당한 여진족.
계속 눈에 담기에는 썩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다.
도원수 을룡은 시선을 들어 심양을 바라보았다.
“안쪽은 멀쩡하군.”
오합지졸 여진족들은 차마 공성할 엄두는 나지 않았는지, 성곽 주변에는 시신 하나 없었다.
가까스로 피신한 외부의 주민과 내부의 주민들은 외곽이 불타오르고 약탈당하는 광경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곳에 있어서 다행이다. 저들처럼 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이을룡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소망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요동을 정벌하러 온 도원수로서 심양 앞에 섰으며, 성벽을 두른 대도시는 장손포의 위력이 십할 발휘될 수 있는 아주 적절한 표적이었다.
“화살 한 대 날려라. 심양과 함께 죽고 싶지 않다면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고.”
이을룡의 명령에 부관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나섰다.
그가 대오 사이를 헤치고 나가 성으로 다가가자, 심양의 수비병들은 말을 섞고 싶은 생각조차 없는지 단 하나 뿐인 부관을 상대로 활질을 해댔다.
부관은 깜짝 놀라 기수를 돌렸으나 기어코 전마가 화살을 맞았고, 말은 버둥거리다 풀썩 쓰러져 다리 몇 번을 허공에 휘젓고는 축 늘어졌다.
낙마한 부관은 전마의 시체에 기대 쏟아지는 화살을 피했다.
“멍청한 것들. 기회를 주어도 못 죽어 안달이라니.”
“날려버리시지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네, 저들이 그러길 바란다면! 이 부원수, 장손포에 을종탄을 적재하게.”
“을종탄, 말이지요.”
궁궐 후원의 조용하고 위험한 사내들은 장손포가 약간의 범용성을 가지길 원했고 결국 을종탄을 개발해 냈다.
기존의 탄환인 갑종탄은 전형적인 폭발탄으로, 장약이 폭발하며 쇳조각을 사방으로 흩뿌려 표적을 박살 내는 게 목적이라면.
을종탄은 쇳조각 대신 소이제를 품고 있었고 폭발과 함께 불이 붙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대도시는 하나의 커다란 장작이나 다름없었다.
“마침 선선하니 바람도 잘 부는군.”
“도원수 대감. 장손포 장전이 끝났습니다.”
“날리게.”
부원수 이억기가 부관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두 사람을 대신해 장손포 부대에 외쳤다.
“방포하라!”
그와 함께.
-뿌아아아아앙……
-뿌아아아아앙……
-뿌아아아아앙……
-뿌아아아아앙……
장손포 특유의 발사음이 전장을 울렸다.
당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장손포의 위력을 두 눈으로 생생히 보는 사용자들마저 간담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장손포다.
조선군 군병들은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전장을 바라보았고.
장손포를 처음 접한 여진족들은 기수와 말이 사이좋게 놀라 꼴사나운 모습을 만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손포는 검은 궤적을 만들며 하늘을 가를 뿐이었다.
그리고.
-콰광, 콰과광…….
성벽 안으로 포탄이 떨어졌다.
요란한 폭음은 폭심에서 멀리 떨어진 조선군의 대오까지 닿을 정도였다. 그리고 곧, 성 밖에서 보일 정도로 큰불이 치솟기 시작했다.
심양을 장작 삼아 타오르기 시작한 화마는 백주대낮에도 똑똑히 보일 정도였다.
곧 정병과 백성들의 고함과 울부짖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이억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전이 끝났습니다.”
“더 쏴라. 을종탄은 쌓아두기에는 위험한 물건이니 여기서 반을 턴다.”
“알겠습니다.”
-뿌아아아아앙……
-뿌아아아아앙……
-뿌아아아아앙……
-뿌아아아아앙……
장손포가 울었고, 막 흩어진 호선 위로 다시 진한 호선이 그어졌다.
다시 성벽 너머에서 은은한 폭음이 터졌다. 화마는 한층 강해지고, 비명과 울음소리도 한층 더 강해졌다.
성벽의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동안 항복을 권유하러 갔던 부관이 부리나케 달려 돌아왔다.
“소, 송구하옵니다. 도원수 대감. 적들의 거세게 저항하는 바람에 서찰을 날리지 못했습니다.”
“나도 보았네. 자네가 안 죽어서 다행이군. 명나라 것들은 십만, 백만이 죽어도 자네 목숨 반만큼도 못 되지. 저 치들이 그걸 알았어야 했는데 말이야.”
부관은 높게 사주어 황송하다는 듯 꾸벅 허리를 숙였다.
꼭 부관만 아니라 조선의 군민이라면 매한가지였으나,이을룔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심양을 뒤덮은 화마는 갈수록 강해졌고 결국 성문이 열렸다. 그 틈으로 병사와 백성들이 물밀 듯 흘러나왔다.
그 광경에 신립이 슬쩍슬쩍 도원수에게 시선을 보냈다.
자신의 기마대를 보내 달라고.
“항전 의사가 없는 것들을 왜 굳이 주살하려 하나.”
“살아서 돌아간 자들이 다시 적이 되어 돌아올까 우려스럽습니다.”
“저들은 대조선에 항거하지 못할 걸세.”
을종탄 소이제는 한 번 불이 붙으면 물이나 모래를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다.
그것처럼, 대조선의 군병 역시 명나라 적당들이 아무리 애를 쓰고 대들어도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몰랐겠지만 이제는 잘 알겠지.
“그리고 저들이 살아서 흩어져 오늘 심양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려야 다른 것들이 감히 덤빌 생각을 안 하지 않겠나.”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비참한 상태로 전락한 패잔병들과 피난민들이 썩 불쌍하게 보였던 이억기가 긍정하자 신립은 쩝, 아쉬워하면서도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안에 총병이 있었다면 좋겠는데."
“그럴 것입니다. 살았건 죽었건 심양으로 옮겨지지 않았겠습니까.”
이을룡은 한 손을 높이 들고는 외쳤다.
“요양으로 향한다! 그쪽 놈들은 실수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