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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75화 (275/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75화

97. 영광과 명예 (2)

성의 누각에 자리한 지휘부.

도원수 이을룡을 포함한 휘하 제장이 모인 이곳에서는 전투의 뒷정리를 위해 한창 논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송구합니다.”

부원수 이억기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

“엽병들은?”

“요동총병을 저격하였으나, 총병이 곧장 적병들 사이로 숨어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다 합니다.”

이을룡은 턱을 매만졌다.

이억기와 기마대가 전장을 종횡무진하며 무수히 많은 수급을 베었으나, 정작 적장 요동총병 이성량의 수급은 거두지 못했다.

저격을 당한 직후 몸을 뺀 게 분명했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곧 적의 손에 들어갈 전장에 버려둘 수는 없잖은가.

“아쉽게 됐어.”

이억기는 허리만 숙일 뿐이었다.

“부원수께서 어련히 최선을 다하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저격을 당했다면 놈의 상태는 오직 둘이야.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거나.”

어느 쪽이건 멀쩡하게 지휘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추적할까요?”

“늦었네. 병사들도 쉬어야지.”

지금이라도 추격해서 총병을 잡을 수 있다면 당연히 보내야 했다.

그러나 패잔병들은 주변의 숲으로 흩어졌으며 숲은 광범위한 영역에 펼쳐져 있었다. 기병을 보낸다고 잡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엽병들을 다시 파견할 수도 있지만, 대군은 패잔병마저 대군이다. 고작 1할만이 살아남았어도 3, 4천 명은 된다.

이미 작전을 치른 엽병들이 무리하게 추격을 시도하다간 중과부적인 상황에 처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지금은 승리 자체를 축하하도록 하세.”

“예. 대승을 경하드립니다, 도원수 대감.”

“경하드립니다. 도원수 대감.”

제장들이 손을 모아 축하를 올리자 이을룡은 손을 저었다.

“다들 피곤할 터인데 다들 돌아가서 쉬게. 나도 쉬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 소장들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노고 많으셨습니다, 대감. 안녕히 주무십시오.”

“자네들도 고생 많았네. 잘 자게.”

부원수 이억기 이하 제장이 군례를 올리고 막사를 빠져나가자, 빈자리에서는 새벽의 선선한 공기가 대신 감돌았다.

이을룡은 피로를 호소했으나 말과는 달리 쉬러 가지는 않았다.

그는 발만 돌리고서 뒤편에 펼쳐진 요동의 지도를 노려보았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총병과 패잔병들이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심양(瀋陽)이다.

심양은 전장이자 조선과 맞닿은 남동부는 물론 각지와도 대로로 연결된 요동의 최고 요충지다.

패잔병들과 유민을 규합하려는 적의 의도를 저지하기 위해서만 아니라, 요동 전체를 수중에 넣기 위해서라도 심양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었다.

* * *

“지금까지의 속도라면 내일 정오 무순관에 도착할 겁니다.”

누르하치가 보고했다.

무순관.

요동은 명나라의 영역과 여진족의 영역이 장성으로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으며, 무순관은 그러한 장성의 정동쪽에 위치한 몇 없는 관문 중 하나였다.

그 이름대로 무순관은 무순과 직결되어 있었고, 무순은 요동의 중심인 심양의 바로 옆에 있었다.

무순관만 통과하면 요동의 심장에 칼을 꽂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신립이 답했다.

“알려주어서 고맙군. 이쪽은 초행이어서 말이야.”

“관문을 뚫을 방도는 있으십니까? 명나라 놈들이라고 바보는 아니어서, 무순관의 방비는 탄탄합니다. 상주하는 병력도 많고 심양과 가까워서 증원도 신속합니다.”

“그 두 개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군.”

지금쯤이면 도원수의 병력은 진즉 강을 넘어서서 요동군과 일전을 치르고 있을 터였다. 아니면 이미 치렀던가.

어느 쪽이건 무순관의 병력은 차출로 줄어들었을 테고 증원도 불가능한 상태일 터.

관문 자체의 방어력만 주의하면 된다. 누르하치의 말마따나 명나라 놈들이라고 바보는 아닐 테니, 여진족의 영역과 이어지는 무순관의 방비는 분명 탄탄할 터.

신립의 선발대는 전원 기병대로 이루어져 있고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기병대로 공성전을 치를 수는 없다.

공성을 위해 말에서 내리는 순간 기병의 강점은 모조리 잃게 되고, 적이 몰래 진영에 야습을 시도해 말을 쫓아낸다면 말이 없는 기병대로 전락하는 수가 있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비책 하나 없이 기병대를 이끌고서 무순관으로 내달렸겠나.

“방책이 있으시다면 다행입니다.”

“뒤편의 여진족들이 대신 주의를 끌어주면 좋겠는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놈들도 여기까지 따라와서 빈손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을 겁니다. 요동에서 약탈만 허락해준다면 기꺼이 주의를 끌어줄 겁니다.”

“약탈이라.”

기병대만으로도 무순관을 뚫을 자신은 있지만, 대신 죽어줄 화살받이가 있다면 당연히 화살받이를 써야지 않겠나.

대가가 약탈이라니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지만, 놈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무순관을 함락하더라도 여진족들은 요동을 약탈하려 들 터였다.

누르하치의 말마따나 여기까지 와놓고 빈손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 이쪽에서 약탈을 엄금한다고 경고했다간 무순의 명군과 싸우기도 전에 여진족들과 싸워야 했다.

아무리 오합지졸 쓰레기들이라지만 화살받이로도 쓸 수 있는 놈들을 적으로 만들어 수하들의 기력을 빼는 건, 그다지 전술적으로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도원수의 입장을 알면 좋겠는데.”

통견원문의 술법도 없고 관심법도 없다.

하지만 도원수가 어떤 사람인지는 조금 알았다.

큐슈에서 그가 보인 행적은 왕이 직접 큐슈 원정을 친림하더라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도원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우군의 피해를 줄이고자 현지인들을 선동해 적들과 맞서게 했다.

만일 도원수가 곁에서 결정을 대신 내려준다면 어떤 말을 해줄지는 분명했다.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쉬겠다. 장수들은 물러나라. 누르하치 그대도.”

장수들은 군례를 올리고는 빠져나갔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안다는 듯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다가, 조선군 장수들이 다 나간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누르하치.”

“소인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무순관 공략의 비책을 너에게 맡기겠다.”

“저 따위에게 중임을 맡기셔도 되겠습니까.”

“아조에 빌붙어 반사이익을 누릴 생각이 아니냐.”

누르하치는 부인하지 않았다.

조선이 명을 이기고 요동을 집어삼키더라도, 요동과 연해도 사이의 드넓은 여진족 영역 전부를 어찌할 수는 없다.

적어도 당장은.

신립은 여진족 오합지졸들이 당장은 쓸모가 있고 괜히 힘을 낭비할 이유가 없어 내두고 있지만, 놈들이 언제까지고 요동에서 약탈하도록 둘 생각은 없을 터였다.

누르하치는 그 간극에서 최대한 이익을 볼 생각이었으며, 그의 계획을 아는 사람은 누르하치 본인만은 아니었다.

“소인이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내일 아침에 알려주겠다. 하지만 수하들에게 미리 알려주는 게 좋겠지. 목숨을 걸어야 하리라고.”

“알겠습니다. 그럼. 소인은 물러나겠습니다.”

누르하치는 조선군 장수들에게 배운 대로 군례를 올렸다. 신립은 손을 휘젓는 것으로 답했다.

다음 날.

새벽이 되어 천하가 밝아지고 날이 걷혔다. 신립의 선발대는 다시 질주했고 과연 누르하치의 예상대로 해가 중천에 이르러서 무순관에 도착했다.

두 눈으로 마주한 무순관은 하나의 장관이었다.

성벽의 높이는 사다리 없이는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높았으며, 관문은 두텁게 보강되어 불룩 튀어나왔다.

황색 기와를 얹은 누각에는 현판이 붙어 있었는데 검은 바탕에 금색으로 무순관이라는 글자가 멋들어지게 새겨져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색색의 바탕에 색색의 문양이 새겨진 군기가 빼곡히 세워진 채 힘차게 나부끼고 있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중압감이 느껴지는 무순관은 마치 명이 위엄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순관은 실제로 명을 마주하는 관문이니 웅장하게 지어진 이유 중 하나는 실제로 명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서겠지.

보통의 여진족이라면 무순관의 모습에 감히 명을 넘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을 테지만, 신립은 여진족이 아니었고 명을 치기 위해서 기병대를 이끌고서 직접 무순관 앞까지 온 사람이었다.

“부총병. 그것을 쓸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부장의 제안에 신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네. 가져오게.”

잠시 후.

명을 받은 부장이 기병들과 함께 선두로 귀환했다. 기병들은 각기 철판을 두른 상자를 들고 있었다.

“개봉하세.”

신립은 목을 두르는 갑주 안쪽으로 손을 넣어, 목걸이처럼 걸고 있던 열쇠를 꺼냈다.

그와 동시에 부장들도 각자의 열쇠를 갑주 안에서 꺼냈다. 평범한 쇠 열쇠건만, 어찌하여 부원수인 신립부터 장수들 전부가 각자의 열쇠를 몸에 차고서 엄중히 다루었던 것일까.

기병들이 가져온 쇠 상자에는 열쇠 구멍이 여럿 있었다.

그 상자가 말단 장수부터 시작해 다른 장수에게로 넘겨지며 잠금장치가 하나씩 풀렸고, 마침내 신립의 차례에 이르러서 마지막 잠금이 풀리며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

새하얀 점토.

장인이 본다면 ‘도자기 빚으면 썩 좋겠구나’하고 평할 정도로 입자가 고운 점토였다.

하지만 그 평가대로 이 점토로 도자기를 빚어 가마 안에 넣는 순간, 가마는 물론이고 점토를 밀어넣던 장인은 물론 주변에 있던 몇 장 반경의 모든 것들이 가루가 되어서 증발할 터였다.

점토의 정체는 궁궐 후원의 사내들이 극도로 엄중하게 생산하고 관리해오던 폭약의 일종으로, 과거 왕이 산을 무너뜨릴 때 썼던 것과 비슷한 놈이었다.

그러니 무순관이 이 점토를 붙여놓고 터뜨리면 무순관 할애비라도, 아니, 천하제일관이라 자부하는 산해관이라도 가루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주의들 하게.”

실전을 몇 번이나 겪은 신립이라도 이 무지막지한 점토 앞에서는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이 점토가 맛탱이가 가서 갑자기 폭발이라도 한다면 가루가 되는 건 무순관이 아니라 자신과 기병대가 될 테니까.

각 철상자에서 나온 점토를 하나로 합치는 신립의 손길은 아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나가 된 점토는 어린아이 머리만 한 크기가 되었다. 그리고 신립은 서둘러 이 점토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었다.

“누르하치를 불러라.”

신립의 명에 부장이 뒤편으로 손짓했고, 대오 속에서 자신의 전사들을 이끌고 있던 누르하치는 한 달음에 나섰다.

“부르셨습니까.”

신립은 누르하치에게 점토를 건넸다.

“이게 자네의 일이다.”

“무엇입니까? ……이 덩어리는.”

“무순관을 돌파할 비책이다. 관문 중앙에 붙여라. 그 다음은 내가 할 테니.”

“알겠습니다.”

누르하치가 전사들을 불러 명을 내리자, 전사들은 뒤편으로 달려나가더니 곧 조선군 기병대 후미에 붙어 있던 여진족들을 불러왔다.

그들 모두 웅장한 무순관을 마주하고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는지 복잡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과연 조선군이 이 무순관을 뚫고서 요동이라는 탐스러운 과실을 보여줄 수 있을까. 면면마다 긴장과 걱정이 반반 섞인 심정을 여실히 드러났다.

누르하치가 외쳤다.

“무순관은 조선군이 뚫을 것이다! 비책이 실행될 동안, 그대들이 시선을 끌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자 여진족 오합지졸 중 하나가 물었다.

“요동을 약탈하게 해준다면, 기꺼이 화살을 받아주겠다!”

누르하치는 신립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대답을 해주라는 듯.

신립은 말을 아꼈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여진족 오합지졸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

“좋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진족들은 요란스런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나갔다.

누르하치 역시 그 대오 속에 파묻혀 전사들과 함께 무순관으로 나아갔다.

흙먼지가 요란하게 피어올랐고 여진족들의 대돌격에 무순관도 소란스러워졌다. 화살과 화살이 오갔다. 무순관에는 대포도 있었는지 간간히 포성도 섞였다.

오합지졸의 여진족들은 탐욕의 지휘와 욕망의 격려를 받으며 성벽 근처를 돌며 화살을 쏘아 보내며 무순관 수비병들의 시선을 끌어댔다.

그동안 누르하치의 기병대는 방해받지 않고 무순관 입구에 붙었다. 누구도 저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고작 일단의 기병 무리가 드높고 엄중한 무순관의 정문을 어찌할 수는 없었으니까.

곧 누르하치는 무순관 정문에 하얀 점을 남기고서 기수를 돌렸다.

그가 몸을 빼자 여진족들도 기수를 돌려 무순관에서 물러났다. 누르하치가 임무를 다했다면 그들도 계속 남아서 목숨과 운명을 시험할 이유는 없기에.

재수가 없어 말과 함께, 혹은 저 홀로 대지에 처박혀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동족들에게 시선을 주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부원수 영감. 붙이고 돌아왔습니다.”

누르하치가 보고했다.

그의 뒤편으로는, 조선군이 어떤 묘기로 무순관을 돌파할까, 하는 호기심과 곧 쟁취하게 될 요동이라는 과실에 대한 흥분으로 젖은 여진족들이 가득했다.

신립은 이번에도 말을 아끼며, 대신 활을 꺼냈다.

“혹시 점토를 맞추시려는 겁니까?”

누르하치는 고개를 돌려 무순관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찰싹 붙여놓은 점토는 눈이 좋은 기마민족에게도 하얀 점에 지나지 않았다.

한평생 말고삐와 활대를 놓지 않은 그조차도 이 거리에서 점토를 맞출 수는 없었다.

그런다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째서 무순관이 함락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시선을 끌어들일까요.”

필요하다면 가까이 가서 쏴야 하니까.

누르하치의 제안에 신립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

신립은 불과 약관의 나이에 무과에 일등으로 급제할 정도로 무예에 능했으며, 그가 아우르는 무재 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것이 바로 궁시였다.

세상은 바뀌어 조선의 정병과 무관들은 활을 버리고 총을 들었으나.

신립마저 활 대신 총을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이 자리에서 증명할 생각이었다.

화살촉에 기름이 뿌려지고 불이 붙었다. 그리고 화살대가 시위에 걸렸다.

으드드득. 불붙은 화살촉이 활대에 가까워지면서 손가락이 뜨거워졌다.

신립은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일렁이는 불꽃 너머로 보이는 하얀 점을 주시했다..

그는 오감으로 바람을 느꼈다.

일렁이는 불꽃의 열기를.

코끝을 스치는 바람을.

힘차게 나부끼는 깃발을.

그 끝에서 신립은 시위를 놓았다.

-퉁!

화살 한 대가 허공을 헤엄치며 무순관으로 쇄도했다.

조선군 장수와 장병들, 그리고 누르하치와 여진족들의 시선이 화살을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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