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74화
97. 영광과 명예 (1)
리춘희 동지.
나라님의 수석 대변인인 그녀의 역할은 보름마다 육조거리로 나와 여인답지 않은 힘이 담긴 목소리로 왕과 조정의 성명을 전하는 것이었다.
최근에는 명나라와의 개전으로 도성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면서 리춘희 동지의 육조거리 행차도 잦아졌다.
“패하지 않는 자, 운하의 건설자, 종묘를 바로잡은 자, 사직의 선택을 받은 자, 팔도강산을 비추는 유일무이한 해와 달, 만백성의 수호자, 죄를 정화하는 자, 북방의 지배자, 광산 개발자, 철장과 목수를 비호하는 자, 초석 공급자, 산학의 주인, 종이의 생산자, 산을 깎는 자, 열도 패자, 식량 공급자, 은행 설립자, 지식과 학문을 경영하시며 신을 대행하며 지배하되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 주체 강성대국 영도자 성상 전하의 전언이 있으시겠습니다……!”
사신의 입성을 축하하는 하마연(下馬宴)에서 왕은 소싯적의 무예를 뽐냈다.
은백색 광택의 칼춤이 야밤을 수놓았고, 사신단은 왕이 친히 내지르는 환도에 대가리와 모가지가 두 쪽이 나서 갈라졌다.
역사가와 호사가들은 그날 밤을 가장 파격적이고 비상식적인 전쟁 선포가 이루어진 날로 회자했다.
그날로 왕은 ‘지배하되 복종하지 않는 자’라는 수식어를 취득하였으며, 이제 왕의 영광스러운 수식어를 나열하는 데만 족히 분 단위가 걸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조선이 북로를 정복하고 남왜를 징벌하여 외적을 모조리 주륙하여 거친 황무지를 야만인들의 피와 살점으로 비옥하게 하니, 변방과 종묘사직의 굳건함이 오늘날에야 비로소 이룩되었다. 그러나 대조선은 아직 토벌하지 못한 적이 하나 있으니, 바로 만고의 원수이자 만대의 숙적인 당적(唐敵)이다!”
당적(唐敵).
조선은 명나라를 대국이나 대명 등의 존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들의 공식 명칭이 무엇이고 과거의 관계가 어땠건, 이제는 당적(唐敵)일 뿐이다.
과거 삼한을 지배하고자 야욕을 부렸던 나라.
그러나 결국 실패하고서 멸망의 지경이 이른 나라.
조선이 당적이라는 멸칭을 쓰는 이유는 분명했다.
역사의 교훈을 잊고서 삼한의 뒤를 이은 대조선을 감히 어찌하고자 야욕을 부린 그들에게, 선조가 그러했듯 파멸을 안겨주겠다는 뜻이다.
“당적의 주구는 대조선의 영화를 더럽히고자 인군과 백성이 하나 되어 쟁취한 땅을 내놓으라 패악을 부리니, 어찌 그 목을 쳐서 요설을 늘어놓는 주둥이를 징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아가 당적의 뜻이 그러하다면, 어찌 대조선이 저력을 보여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쟁의 정당성이 설파되고,
“대조선의 기치가 세워진 지난 이백여 년 동안 우리는 세계 평화를 수호하고자 당적을 드높여 불필요한 충돌을 지양하였다. 이제는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 역사 아래 가장 영광스러운 전쟁에서 승리하고 대조선의 위명은 중원의 당적 위에 서게 되리라! 나 지난날 선포하였다. 대조선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들은 짓밟힐 것이며 순응하지 않는 자는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고! 내가 바라니, 진정으로 그렇게 되리라! 주상 전하 천천세, 대조선 만만세!”
연단에 선 리춘희가 두 팔을 들어 마지막 구절을 외치자 주변에 모인 백성들도 함께 팔을 들며 환호했다.
그와 동시에 리춘희가 외운 개전 선언문이 하늘에서 흩날렸다.
군중은 더욱 환호했고 어미새에게 먹이를 바라는 새끼들처럼 팔을 더욱 높이 들어 흩날리는 선언문을 챙기고자 했다.
명령만 떨어진다면 다들 농기구라도 챙겨서 전장에 나설 분위기였다.
그 광경에, 인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선언을 구경하던 우의정 심수경이 혀를 내둘렀다.
“허어, 전쟁을 두려워하기는커녕 환호하는 모습이라니.”
오랑캐와의 전쟁도 아니고 지난 이백 년 동안 조선의 상국으로 군림해온 명나라와의 전쟁 아닌가.
그동안 짓눌려 살았으니 설욕의 순간을 반기는 게 당연하지만, 어찌하여 조선이 지난 이백 년 동안 명나라에 짓눌리고 살 수밖에 없었는지를 걱정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곁에서 좌의정 이이가 답했다.
“이미 벌어진 전쟁이니 두려워하며 떨 바에야 전의를 고취하는 편이 백배는 낫지요.”
“좌상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입궐이나 하십시다. 너무 오래 묶여 있었군요.”
이이가 발을 옮기자 심수경도 마지못해 뒤따랐다.
리춘희의 연설에 집중하던 관리가 두 사람만은 아니었는지, 제법 많은 사람이 흩어지는 인파를 거스르며 광화문으로 향했다.
잠시 후.
대신들이 근정전에 좌우로 도열하자 왕이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어좌에 올랐다.
신하들이 깊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자 왕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다들 간밤에 평안하였는가.”
“예. 성상 전하의 은혜로 푹 쉬었사옵니다.”
“다행이로군.”
운을 띄우기 위한 형식적인 안부가 오갔고, 왕이 입을 열었다.
“요동 정벌은 잘 진행되고 있는가?”
좌의정 이이가 답했다.
“간밤에 의주목사가 치계를 보내, 도원수가 선발대를 이끌고 강을 넘었음을 전했습니다. 그 직후 전투가 있었는데 보병대의 첫 발포에 적이 몰살되었다 합니다.”
“아조 군병의 화력이 우월하긴 하지만, 첫 발포에 몰살될 정도라면 요동이 전쟁을 미리 대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군.”
“평소에 아조를 깔본 대가를 치르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놈들도 바보는 아니니 두 번 방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원정으로 쐐기를 단단히 박아두어야 한다.”
어중간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간 필시 명나라가 보복을 시도할 테니까.
그런 실수가 벌어지지 않도록 일방적인 승리를 끌어내야 했다.
“선발대가 첫 단추를 잘 끼웠으니 주 병력이 증원되면 파죽지세로 당적을 분쇄할 것이옵니다.”
“병력은 어디 있나.”
“충청도에서는 이제 일만 대병을 조직하여 북상을 알렸사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다소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옵니다.”
“큐슈는?”
“이제 소식이 전해졌겠으나 바닷길로 올 터이니 합류는 늦지 않으리라 사료되옵니다.”
“음. 차질이 없어야 한다.”
“지당하신 분부이옵니다. 하오나, 신들이 감히 사료하건대 하삼도의 병마절도사들은 경험은 있어도 경력이 짧아 당적을 상대하기가 버겁지는 않을까 우려되옵니다.”
“다들 유능한 사람이다. 최소한의 자질도 큐슈에서 증명하지 않았나.”
충청도군은 김시민이, 경상도군은 송상현이, 전라도군은 정운이 각기 이끌고 있었다.
세 사람은 원정이 끝난 직후 병마절도사가 되었는데, 군공은 분명하나 이이의 지적대로 경력에 비해 승진이 빨라 뭇 사람들의 의아함을 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아예 대 명나라 원정대까지 이끌게 되었으니 우려가 이만저만이 아닐 수밖에 없었다.
“내가 신중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첨절제사로 붙여주었고, 또 세 사람에게는 그들의 조언을 무시하지 말고 신중하게 움직이라 하였으니 실수를 저지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도원수도 경력은 짧으나 원정대 최고 지휘관이 되는데 반대한 사람이 없었잖나.”
“도원수가 관직을 얻은 시기는 비교적 최근이나 이전부터 성상 전하를 쫓아 종군하였고, 또 모략이 깊어 대군을 이끄는 데 비할 자가 없으니 도원수의 자리가 전혀 과분하지 않습니다. 신은 단지 세 병마절도사가 정병을 이끄는 과정에서 큰 실수를 저지를까 우려할 뿐입니다.”
“이미 정해진 일이고 출병이 확정되었는데 뒤늦게 인사를 행한다면 군의 사기와 조정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것이다. 한 번 부월을 맡긴 자는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예…….”
왕이 확고한 의지를 보여 주니 이이도 어쩔 수 없었다.
왕의 안목과 세 사람의 자질을 믿을 수밖에. 다행스러운 점은 아직 어느 쪽에라도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는 거다.
김시민은 군무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원정의 보급부대 지휘관으로 적의 습격을 적은 피해로 거듭 막낸 자였다.
송상현은 엄중하고 진중하기가 군무에도 이르러 점령지를 맡아 우회해 오는 적의 조공(助攻)을 단 하나의 지역도 잃지 않고 철벽처럼 방어해 냈다.
정운은 의기가 넘치고 용맹하여 기병대장을 맡아 전장에서 종횡무진 분견대를 분쇄하고 패잔병을 처단했다.
이전까지는 조명되지 않았던 세 사람을 왕이 콕 집어서 눈여겨보다 크게 기용했다는 점에서, 이이는 어쩌면 자신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영의정 대감이 없으니.’
영의정 노수신은 자신이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왕의 대업을 늦췄다는 이유로 사직서를 올리고 도원수의 선발대와 동행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기에 문무백관을 대표하는 영의정이라는 직분을 비워둘 수는 없으니, 머지않아 자리가 채워질 터였다.
그리고 왕은 영의정이 빠지면 아래의 의정을 한 단계씩 올리고 우의정을 새로 넣는 인사를 고집했으니 전례를 고려하면 좌의정 이이가 새로운 영의정이 될 가능성이 컸다.
위치만큼이나 책임 역시 막중한 자리였고, 그동안 왕의 행보라면 대체로 동의하고 지지해 온 이이라도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개전으로 백성과 신하들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니, 종묘에 전쟁을 고하고 제단을 세워 선대왕들께 제사를 올리시옵소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오전에 나의 수석 대변인이 육조거리에서 성명을 발표했는데 제신들도 직접 보았을 터다.”
“몇몇 사람은 결의와 전의에 고취되기도 하겠으나, 또 어떤 사람들은 선대왕들께 정성과 성의를 다하여 복을 비는 것으로 위안을 느낄 것이옵니다.”
이이의 간청에 왕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입을 쩝, 다시고는 답했다.
“알았다.”
“망극하옵나이다.”
* * *
조선군이 점거한 장원.
원래 주인이 가족과 가구를 챙기고 떠난 자리에는 야전병원이 세워졌다.
침상이 줄줄이 늘어졌고 의원들은 장원의 숙소나 멀지 않은 저택에 상주하며 대비했다. 지금과 같은 비상상황을.
“비켜, 비켜!”
건장한 의원 한 쌍이 무장 하나를 들것에 실어 날랐다.
들것의 환자는 넝쿨을 엮어 만든 것 같은 특이한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의원들이 다른 부상자들을 내버려 두고 쓸데없이 넝쿨이나 옮기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들것의 환자는 명백하게 넝쿨이 아니라 사람이었으며, 들것이 흔들릴 때마다 요란하게 움직이는 화살의 끝이 그가 어떤 부상을 입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의원들은 분주히 오가는 동료를 헤치고서 수술실로 입장했다.
내부의 사람들이 좌우로 물러났고 환자는 들것째로 수술대에 올랐다.
그와 동시에 마흔 중후반의 기품 있는 중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환자는?”
“등에 화살을 맞았습니다. 아직 숨은 붙어 있으나 의식이 없습니다.”
중년의 의원은 환자의 목을 짚어 맥을 확인했다.
그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환자의 등판에 박힌 화살과 환부로 말려든 갑주를 벗겨냈다. 피가 울컥 흘러나왔다.
가슴과 등판의 깊은 상처는 기흉이라는 치명적인 손상을 초래할 수 있다. 기흉이 발생하면 출혈에 폐의 공기가 섞여 거품이 나오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환자의 피에는 거품이 없었다.
의원은 솜뭉치를 받아 환부로 밀어 넣었다. 건조해 압축한 솜은 피를 빨아들이며 불어나 순식간에 상처를 메웠다.
출혈의 정도는 압박이다. 환부가 팽창한 솜으로 메워지자 출혈도 그쳤다.
젊은 의원이 환자의 경동맥을 짚고는 보고했다.
“맥은 안정적입니다.”
“환부 소독하고 붕대 감아주게.”
“예.”
젊은 의원들은 육중한 체격의 환자를 들어 붕대를 감았다. 환자가 수술실을 나서자 의원 하나가 중년의 의원에게 권했다.
“원장님, 잠깐이라도 쉬시지요.”
허준이 답했다.
“그동안 많이 쉬었네.”
부상자들 모두가 필요한 처치를 받기 전에는 휴식이란 있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