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73화
96. 사냥꾼의 밤 (2)
“흐악, 흐아악…….”
진 파총은 신음을 토해냈다.
불과 반 각 전만 하더라도 적을 야습하고자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진격하고 있었거늘.
순간 하늘이 밝아지더니, 소름 끼치는 대신기전의 소리가 수도 없이 났다. 진 파총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지금 자신은 어디에 있는 걸까.
“엄마!”
“내, 내 다리…….”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으면 도망쳐…….”
흙먼지가 가라앉고 드러난 전장의 모습은 실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사방에 흩어진 인간의 살점. 사지가 사라진 병사.
몸이라도 멀쩡한 자는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비틀거리며 알아듣지 못할 소리만 지껄여댈 뿐이었으니까.
붉은 하늘 아래, 인세의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멀리서 익숙한 고함이 들려왔다.
“정신 차려라! 적의 공격은 끝났다!”
밤하늘을 울리는 엄중한 목소리.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는 오직 요동총병 영원백 이성량뿐이다.
진 파총은 자신이 그제야 전장에 있음을, 그리고 조선의 공격을 당해 잠시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끄으응…….”
죽다 살아난 몸뚱어리는 어마무시한 탈력감을 느끼며 움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늘어져 있다간 진짜로 죽겠다는 공포가 힘을 주었다.
전마의 시체를 짓누르며 어렵사리 일어난 진 파총의 귀에 다시 이성량의 목소리가 울렸다.
“제장들은 병사들을 진정시켜라! 이게 끝이다! 대오를 규합하고서 적을 몰아붙여라!”
이성량은 무수한 공훈을 세워 작위까지 받은 명장 중의 명장.
그의 목소리에 진 파총은 안도감을 느꼈다.
몸에도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두 발로 선 진 파총은 정신 차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병사들을 규합했다.
“정신 차려라! 조선군의 공격은 이게 끝이다! 총병 대인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게냐!”
진장에 즐비한 인체의 파편과 불구가 되어버린 병사들은 의도적으로 시선에서 제외했다. 유난히 심각한 자들은, 자비에 사기 보전을 겸해 불우한 인생의 끝을 당겨주었다.
그리고 비교적 멀쩡한 병사들은 뺨을 때리거나 칼끝을 들이미는 것으로 일깨웠다.
그것이 자극이 되어주었는지 반쯤 미쳐 있던 병사들도 하나 둘 정신을 차리고서 동료들을 도왔다. 진 파총처럼 자비를 내리거나, 정신을 깨워주던가.
어느새 진 파총의 휘하에는 부대 비슷한 것이 만들어졌다.
그들의 이전 소속이 어디였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자. 다들 정신 차려라. 이래도 늘어져 있다간 죽는 수밖에 없다! 조선이 모든 힘을 쏟아낸 지금 성을 함락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또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다!”
진 파총의 독전에도 병사들의 눈빛은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다. 끌려 나온 자들이 무슨 용기가 있어서 목숨 걸고 싸울 수 있겠나.
병사들이 소극적일 때는 일벌백계로 몇 놈의 목만 베어주면 사기가 돌아오지만, 진 파총은 그럴 때가 아님을 느꼈다.
지금은 병사들에게 죽음으로 위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죽음이나 다름없는 상황을 마주했으니까. 인세의 지옥을 목도했으니까. 그 한 가운데 있으니까.
죽거나 미치지 않은 채로 눈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상황이었다.
“강요하진 않겠다, 단지 이번 전투에서 이겨 살아서 돌아갈 생각만.”
진 파총은 더 말을 잇지 못하더니 눈이 탁 풀린 채로 풀썩 쓰러졌다.
눈앞의 무관이 벼락처럼 죽자 병사들은 다시 반쯤 미친 채로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베어 넘기며 등장한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계속해서 지휘관을 제거해 나간다!”
“예!”
조선의 엽병들이었다.
적들이 반쯤은 죽고 반쯤은 정신을 놓은 이곳은, 전장의 한복판이었으나 오히려 엽병이 활동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누구도 감히 엽병들에게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몇몇 병사만이 엽병들의 정면으로 도망쳐오다 칼을 맞고 쓰러져 죽는 게 전부일 뿐.
지휘관을 사냥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신을 놓지 않고서 독전하거나 병사들을 규합하는 놈이 바로 지휘관이었다. 그동안 녹을 도적질해온 무능력자가 아닌 덕으로, 그들은 최우선 표적이 되어 지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것도 덧없이 유명을 달리하고 있었다.
“저기에도 하나 있습니다!”
눈썰미 좋은 엽병 하나가 적의 장수를 가리켰다. 그는 용케도 낙마하지 않고 여전히 마상인 채로 주변을 돌아다니며, 독전을 떠들어대고 있었다.
“좋다. 처치하자.”
윤흥신은 막 장전을 끝낸 엽총으로 적의 장수를 겨눴다.
-타다당!
연이은 총성이 있었다.
표적이 된 적 지휘관은 한 발도 맞지 않았다는 것처럼 용케도 고삐를 놓지 않았다. 참으로 강건한 신체에 강건한 정신이었다.
단지 총알을 막아낼 정도는 아닐 뿐이지.
멀쩡하게 보였던 그도 결국에는 말을 더 이끌지 못하고 몸을 기울이더니 그대로 낙마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주변의 적병들은 혼비백산하며 흩어졌다. 싸울 마음이라곤 추호도 없는 자들이다. 윤흥신이나 엽병들은 그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언덕 너머에서부터 들렸던 말발굽소리가 착실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의 돌입이 머지않았다. 잡병의 처단은 그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윤흥신과 엽병들의 몫은,
“대오를 갖춰서 진격해라! 뭣들 하느냐! 물러서는 자가 있다면 내가 친히 베어주겠다!”
안쪽에서 당찬 목소리를 연이어 터뜨려대는 자였다.
요동총병 이성량.
전장은 이미 인세에 구현된 지옥이 되어버렸거늘 놈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과연 황제가 총애하여 작위까지 내려 포상하는 자 다웠다.
그리고 윤흥신과 엽병들의 표적이라면 당연히 그 정도는 되어줘야 했다.
“이대로 기병대가 돌입한다면 적장은 반드시 살아서 도망간다! 그 전에 우리가 놈의 목을 따야 한다!”
“예!”
앞선 엽병들이 환도로 거치적거리는 적병을 베어 넘길 동안, 윤흥신은 엽총을 장전했다.
병사들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극도로 흥분하고 긴장한 탓으로 손끝은 덜덜 떨렸으며 종이탄피는 도저히 총구에 들어가질 않았다.
“젠장할…….”
윤흥신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서 어떻게든 힘으로 종이탄피를 총구에 우겨넣었다. 안에서 터지지는 않았을까.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윤흥신은 꼬질대로 마저 탄피를 쑤셔 넣었다.
“만호 나리! 적의 지휘관입니다!”
“앞으로 마주하는 요인들은 개별적으로 처치해라! 우리의 최우선 목표는 총병이다!”
윤흥신의 명령에 대답 대신 총성이 울었다. 탕!
발을 바쁘게 놀린 덕으로 윤흥신과 엽병들은 어느새 최우선 목표, 총병이 눈으로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만큼 그들은 적진의 깊숙한 곳에 들어섰고 이성량의 존재감과 지휘력은 사분오열되어 방황하던 적병들을 다시 규합해낼 정도였다.
“적병들이 이미 대오를 갖춘 채입니다. 더 접근했다간 위험합니다!”
“이 거리에서 저격할 수는 없나?!”
“주변을 무장들이 지키고 서 있어 제대로 된 사격각이 나오지 않습니다. 만일 저격에 실패해 엉뚱한 놈을 맞춘다면 표적은 숨어버릴 겁니다!”
“하!”
윤흥신은 탄식을 토했다. 하지만 숙고할 시간은 없다. 정신을 차린 주변의 적병들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엽병의 복장은 은신에는 좋아도 한 번 시선을 사면 수상하게 보이거늘.
아군 한가운데 있어도 의심을 받을 정도인데 적들 사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시야를 가린 무장을 쏘겠다! 자네들은 화력을 모아서 이성량을 저격해!”
“예? 무장을 맞추더라도 당장 시야가 나오지는 않을 겁니다!”
“놈이 탄 전마의 엉덩이를 맞추면 다르겠지!”
“아!”
말은 이제 사치였다. 단 한 번의 사격. 그리고 이탈이다.
윤흥신은 이성량을 가진 무장의 전마를 조준했다. 맞출 수 있을까?
당차게 말하고도 적중에 실패한다면 망신 중의 망신이다.
하지만 고민 역시 사치다.
윤흥신은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성이 울린다. 적장과 적병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한다. 그들의 얼굴이 의문이 피어오른다.
소란 속에서 총탄이 적중한 둔탁한 소리가 났다. 환상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중은 했다. 말이 놀라 앞다리를 치켜든다.
무장은 놀라서 말과 함께 뒤로 늘어지고.
일순 이성량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 순간이다!
윤흥신의 간절한 염원을 엽병들이 느낀 것일까. 채 발포를 재촉하기도 전에 수십 개의 엽총이 동시에 격발된다.
마치 하나의 총처럼.
이성량은 반사적으로 팔을 든다. 마치 총알을 팔을 내어주는 것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처럼. 하지만 그의 결말을 두 눈으로 목도할 여유는 없다.
총열은 비워졌고 이성량은 몸을 숙였다. 아수라장이 된 적진에서 누군가 외친다.
“적이다! 쫓아라!”
그러자 적병들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윤흥신은 엽총을 끌어안고 반대편으로 달렸다.
“뛰어!”
방황하는 적병과 죽어서 늘어진 시신을 피해 내달린다.
등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뻔했다. 다급한 발소리들. 추격하는 발소리들.
무식한 고함만이 이어지더니 익숙한 소리가 귀를 때린다.
-퉁!
“활이다!”
산발적인 활 소리와 함께 뱀의 속삭임이 귀 양편으로 들려왔다. 윤흥신은 엽병들을 앞으로 보내고 자신은 대열의 뒤로 향했다.
“왜요!”
막 곁을 지나친 엽병 하나가 외쳤다.
그는 순순히 앞서가지 않았다. 윤흥신은 그의 어깨를 밀어 앞으로 보내며 외쳤다.
“신경 쓰지 말고 달리게!”
엽병들은 앞으로도 중하게 쓰일 귀한 인력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안타까운 사연은 무인으로서의 가치에 가감을 주지 않는다.
누군가 화살을 맞아야 한다면 자신이 맞는 게 맞았다. 이쪽은 대안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리고 과연 기대대로.
-팍!
둔탁한 소리와 함께 등판에 철퇴로 맞은 듯한 충격이 왔다. 고작 화살이겠건만 이 정도라니. 전신에서 힘이 빠졌다.
윤흥신이 쓰러지자 앞서나가던 엽병 몇 명이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만호 나리!”
그러는 와중에도 화살은 날아오고 있었다. 윤흥신은 엽총을 내던지며 말했다.
“가져가! 난 신경 쓰지 말고!”
엽병들은 과연 정예 중의 정예였다. 그들은 구차하게 전장에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조선의 비밀 무기인 엽총만을 챙겨 멀어졌다.
쓰러진 윤흥신은 축축한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 웃었다.
“후후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가문을 되살리고 아버지와 형제의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다짐했거늘. 고작 화살 한 대 맞고서 이런 꼴이라니.
어쩌면 주제넘은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도원수와 대호군이 자신에게 엽병 부대를 믿고 맡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이런 일을 위해서다. 그들을 잘 지휘하고, 필요하다면 대신 죽어주는.
그런대로 비장한 죽음이다.
아버지와 형들이, 그리고 자신이 역적이 아닌 최후까지 나라를 위해 일하다 죽은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가문은 되살리지 못해도 명예 정도는 회복되지 않을까.
적들의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진다.
“만호 나리!”
익숙하지만 바라지 않았던 목소리.
윤흥신은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진즉에 도망쳐야 할 엽병들이 서 있었다. 도대체 여기에 남아서 무얼 하려는 건가.
죽게 내버려 두고 꺼지라 외치고 싶었지만 탈력감 때문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말발굽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엽병들은 엽총을 양손으로 높이 들었다.
항복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고작 나의 시신이라도 건지기 위해서.
조선에서 가장 유능한 무인들이.
비장의 무기까지 바쳐가면서.
이건 자신이 바란 일이 아닌데…….
-두두두두두!
굉음과도 같은 말발굽 소리가 마침내 코앞까지 이르고.
기병들은.
자신의 뒤가 아닌.
엽병들의 뒤에서 나타났다.
원색의 두정갑이 빛났다. 조선군 기병이다! 엽병들이 돌아온 이유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니, 그렇다고는 할 수 있겠지.
위장복을 걸친 채로 이렇게 엎어져 있으면 우군 기병조차 알아보지 못할 거다.
그래서 엽병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돌아온 거다. 부원수의 기병대를 대동하고서.
“후후후…….”
윤흥신은 안도했다.
이렇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