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왜 이순신이죠-272화 (272/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72화

96. 사냥꾼의 밤 (1)

-사박, 사박, 사박…….

열한 명의 사내가 어둠에 잠긴 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말을 나누는 사람은 없었고, 오직 나뭇잎 바스러지는 소리만 은은히 날 뿐이었다.

그러던 중 전장에서 미미한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신호를 받은 선두의 엽병 오장(伍長)이 주먹을 들고 자세를 낮췄다.

“무슨 일인가?”

막 엽병 지휘관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투입된 윤흥신이었다. 주변의 엽병들과 같은 무장을 걸쳤으나 같은 무구를 걸쳤다고 하루아침에 엽병이 될 수는 없었다.

신호 교환도 마찬가지였다.

오장이 답했다.

“전방에 적의 첨병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나?”

오장은 대답 대신 품속에서 주먹 반만 한 크기의 거울을 꺼냈다. 그리고 달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살살 흔들자, 거울이 월광으로 반짝이기를 반복했다.

“달이 없으면 어떻게 되나?”

“방법은 많습니다. 일단은 선두의 오와 합류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지.”

오장이 검지와 중지를 펼쳐 앞으로 향하자, 두 개의 오가 한 몸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윤흥신은 그 수신호를 눈에 새겼다.

열한 명의 인영은 다시 수풀을 헤치고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 이제는 낙엽 밟는 소리라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두 개의 오는 선두의 오와 합류했다.

오장들은 수신호로 대화를 주고받더니, 조원들을 향해 다시 수신호를 펼쳤다.

알아듣지 못할 윤흥신을 위해서, 바로 곁에 있던 조원이 해석해주었다.

“활과 화살을 꺼내, 시위에 조용히 걸라는 뜻입니다.”

“어렵군.”

“나중에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엽병들의 주무기는 엽총이지만, 지금처럼 총성을 내지 말아야 할 때는 활과 광택을 지운 환도를 썼다.

오장과 조원들은 시위에 화살을 걸고서 정면의 초병들을 조준했다. 팡! 파공과 함께 적병의 얼굴과 목에 화살이 박혔다.

초병들은 단말마도 내지 못하고 나무토막처럼 처박혔다.

오장은 다시 검지와 중지를 펼쳐 앞으로 향했다.

‘이동하라는 뜻이군.’

과연 조원들은 신속하게 초병이 있던 장소로 나아가, 엄폐물을 하나씩 점유하고서 주변을 살폈다.

은밀하며 엄중하기가 궁궐 후원의 사내들 못지않았다.

‘어찌하여 대호군 영감은 나에게 엽병 부대를 맡기셨을까.’

일개 만호로서는 과분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도원수 대감과 대호군 영감이 이를 모르서 자신에게 맡기지는 않았으리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과분한 수하들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들을 이끌 수 있는 지휘관이 되어 도원수와 대호군의 믿음과 신뢰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첨병들이 둘만 덩그러니 있지는 않겠지. 분명 언덕 어딘가에 집결지가 있을 걸세.”

언덕에 주둔한 첨병들이 휴식과 교대를 위해 오가며 정보와 보고를 나누는 곳. 그곳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언덕을 점령할 수 없었다.

“맞습니다. 집결지는 대체로 중앙에 있습니다. 놈들이 교대시간이 되어 의문을 느끼기 전에 은밀하면서도 신속하게 제압해야 합니다.”

“시간은?”

“한 식경 남았다 합니다.”

식경(食頃)이란 말 그대로 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시간이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이 야산이나 다름없는 언덕에 숨어 있는 집결지를 확보하지 않으면, 적병들은 휴식을 위해 돌아오지 않는 첨병에 의문을 느끼고 경계상태에 돌입할 터였다.

그것이 적의 본진에도 알려진다면 도원수가 수립한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서둘러 집결지를 찾아내고 확보하기 위해서는 오가 갈라질 필요가 있겠어. 이렇게나 많이 뭉쳐다닐 필요 없네.”

엽병들은 다섯 명의 오 단위로 움직였으며, 상황에 따라 합종연횡하여 상황에 대응했다.

지금은 흩어져야 할 때다.

윤흥신의 명령에 오장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자의 조를 이끌고 좌우로 흩어졌다. 윤흥신은 자신에게 남은 일개 조를 향해 배운 대로 수신호를 날렸다.

검지와 중지를 펼쳐 앞으로 향하는 것.

오장과 조원들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전진했다.

수색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선두의 오장이 다시 주먹을 들었다. 윤흥신은 조원들과 한 몸이 되어 몸을 숙였다.

“무슨 일인가?”

“전방에서 세 명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세 명?”

“예.”

윤흥신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방금 전에 처단한 적의 수효는 둘. 그런데 교대를 위해 세 명이 접근하고 있다.

최대한 좋은 쪽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

우연히 전자의 조에 한 명이 덜 편성되었다든가.

병이 나서 경계를 서지 못했다던가.

하지만 전장은 좋을 대로만 해석해도 되는 장소가 아니다. 문제가 발생한다면 대체로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만일.

우리가 한 명을 놓친 것이라면?

첨병 하나가 똥오줌이라도 갈기러 간 사이에 그만 남아 있는 적병을 처단한 것이라면?

“큰일 났군.”

오장은 새삼스러운 소리라는 듯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아직 적병들은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면에서 접근해 오는 세 명의 적병들에게는 특별히 긴장한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그건 아직 집결지는 물론 적진에도 언덕에서의 일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신속하게 움직이세.”

윤흥신은 엽병들이 처음 초병을 저격했을 때의 수신호를 펼쳤다.

활과 화살을 꺼내 시위에 조용히 걸고, 두 명씩 하나의 표적을 맡는다.

단 한 번 조원이 곁에서 해석해 주었을 뿐이거늘 윤흥신은 빠르게 적응하고 배웠다. 그의 지휘에 오장과 조원들이 시위를 조용히 활에 걸었다.

-팡!

시위가 허공을 때리며 소리를 내자, 오장과 조원들도 동시에 시위를 놓았다. 연이은 파공 소리와 함께 중얼거리며 접근하던 첨병들이 얼굴을 부여 쥐며 쓰러졌다.

적막이 가라앉자 양편에서 거울을 이용한 신호가 오갔다.

오장은 윤흥신을 대신해 적과의 접촉이 있었고 그들을 제거했음을,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전 장소에서 첨병 하나를 죽이지 못했음을 알렸다.

양편에서 거울의 달빛이 다급히 반짝였다. 오장이 전했다.

“명령을 내려주시지요.”

“화살을 시위에 걸어둔 채 쾌속으로 전진, 지역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네. 설령 도망친 녀석을 추적해 죽이더라도 시간이 많이 지체됐어.”

막 처치한 첨병 셋은 경계를 교대하려던 참이었다.

곧 집결지에서는 병사들이 휴식을 위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수상하게 여길 터. 한 식경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었다.

언덕을 우회하기로 한 부원수의 기병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점령이 지체될 동안 첨병들에게 포착되어 존재가 적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을까.

윤흥신은 꼴깍 침을 삼켰다.

“서두른다.”

윤흥신은 다시 수신호를 보내고는 앞서 나갔다.

적의 시신을 넘어서 쾌속으로 움직이는 엽병들의 발소리가 요란했다. 사박, 사박, 사박. 주변에서도 미미하게 낙엽 소리가 들렸다.

위험하기 짝이 없었으나 작전은 이미 위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일대가 언덕이라 불릴 정도로 지형이 험하지 않고 좁다는 것이다.

속도를 낸 덕에 윤흥신와 엽병들은 언덕에 주둔한 첨병들의 집결지를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중심에는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어, 적이 얼마나 많으며 주변에는 어떤 시설이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오장이 수신호를 보냈다.

‘적병 여섯에 작은 천막이 여섯이라.’

천막 안에서도 적병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겠지. 그들을 전부 조용히 제거하기 위해서는 모든 오를 불러모을 필요가 있었지만,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이미 각 오는 신호를 주고받으며 한곳에 모인 상태였다.

윤흥신은 오장들을 향해 수신호를 날렸다.

‘위치가 파악된 여섯 명의 적은 일시에 활로 저격해 없애고, 나머지 인원은 모두 환도를 빼들고서 진입한다.’

윤흥신은 각 오에 세세한 명령을 날리고는 돌입조에 파묻혔다.

광택을 죽인 환도는 달밤 아래에서도 거의 빛나지 않았다. 그래도 만일을 대비할 필요는 있다. 윤흥신은 환도를 등 뒤에 세워두고서 수신호와 함께 전진했다.

사박, 사박, 사박.

수십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움직이면서 아주 은밀하기란 어렵다.

적병들의 얼굴이 세세히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자 모닥불 근처에 앉아 있던 무관이 서둘러 일어났다.

“응?!”

마치 무언가를 듣기라도 한 듯.

무관의 반응에 주변의 병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병사 하나가 묻자 무관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에 화살이 처박히고서, 모닥불에 처박힐 뿐이었다.

-콰르!

갑주 입은 몸이 처박힌 모닥불의 불씨와 잔해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주변 병사들이 황급히 창대를 세웠으나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엽병은 적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연이은 파공 소리와 함께 단말마가 여기저기에서 터졌고, 윤흥신은 즉시 일어나 천막으로 달려들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소란에 수상함을 느낀 적병들의 고함이 밤의 숲을 울렸다. 엽병들은 굳이 소란에 보태지 않고, 천막마다 흩어져 들어가 적을 베었다.

슈칵, 샤칵.

쉬고 있던 적병들은 제때 반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슴과 얼굴이 갈렸다. 거무죽죽한 피가 천막에 흩뿌려졌다.

수하들과 함께 천막의 병사 둘을 처단한 윤흥신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시끄럽다면 시끄럽고 조용했다면 조용한 습격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다가 봉변을 피한 적병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가 적진으로 허겁지겁 달려가서 야습을 알리지는 않았을까.

한 번 실수가 있었다 보니, 거의 피해망상 수준으로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건 이미 일어난 일이다.

윤흥신은 환도를 휘둘러 적의 피를 털어내고는 천막을 나섰다.

엽병들이 오 별로 모여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은 주변을 마저 확보해라. 우리는 비탈로 향한다.”

끄덕.

윤흥신은 수하들을 이끌고서 동쪽 비탈로 향했다. 적진이 보이는 방향이다.

비탈을 내려가는 길에 적의 첨병을 다시 마주했으나 제거는 신속했으며 이동은 금방 재개되었다.

그리고 시야가 확보되자, 놀라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무수히 많은 인영이 어둠에 잠긴 채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만일 월광이 없었더라면 단지 새카만 파도로만 보였으리라.

과연 성에서는 그들의 접근을 눈치채고 있을까?

무의미한 걱정이었다.

자신이 엽병을 이끌고 언덕을 오른 이유부터가, 도원수가 적이 이 순간 야습을 시도하리라 예측했기 때문 아니냐.

과연.

-삐이이이이…….

-삐이이이…….

성에서는 효시가 동시다발적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작은 폭음과 함께 밤하늘의 곳곳에 붉은빛들이 별처럼 걸려 환하게 빛났고, 전장이 환하게 밝아졌다.

윤흥신이 두 눈으로 이 광경을 목도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야습을 시도하던 명군은 느닷없이 전장이 밝아지자 놀란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뿌아아아아앙……

-뿌아아아아앙……

-뿌아아아아앙……

-뿌아아아아앙……

명군을 동요하게 만들었던 대신기전, 아니 장손포의 폭음이 천지를 울려댔다.

이번에는 감질나게 한두 발씩 쏘아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포대가 동시에 방포했다.

각 탄두에는 위력을 속이기 위한 이전과 달리, 화약과 철 조각이 그득그득 담겨 있었다.

윤흥신은 전율을 느꼈다.

검붉은 밤하늘에도 새카만 호선은 그어진다. 눈으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호선이다. 새카만 빛살이 적지로 작렬했다.

-콰과과과과과광!

폭음이 하늘을 울리고 위력이 대지를 울린다.

우르르릉…….

윤흥신과 엽병들이 선 언덕마저 신음을 토해냈다.

야습을 위해 적막만이 감돌았던 적지에서 비명과 고함이 발작적으로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전장의 소리라기보다는, 지옥의 소리에 가깝다.

지옥에 떨어진 수많은 인간이 고통과 절망을 호소하며 사방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두두두두두두…….

언덕 반대편에서 말발굽이 대지 때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부원수의 기병대가 전속력으로 전장을 우회하는 소리였다.

이제 윤흥신과 엽병들의 역할은 분명해졌다.

그들이 전장에 돌입하기 전에, 이 혼란을 틈타 적의 장수들을 저격하는 것이었다.

“모두 엽총을 장전해라! 언덕을 내려간다!”

거리낄 것 없어진 윤흥신이 외치자 곁에 있던 오장이 하늘 위로 효시를 쏘았다. 삐이이이. 총구를 빼꼼 내면 수십 개의 넝쿨 덩어리가 쾌속으로 비탈을 달려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