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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71화 (271/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71화

95. 풍림화산 (2)

장손포를 쏘아 보낸 당일, 밤.

도원수 이을룡은 정면에 포진한 명군의 진형에 도합 여섯 발의 장손포를 떨어뜨렸다.

아침에 한 발, 점심에 두 발, 저녁에 세 발.

“용케도 버티는군요. 이성량이라는 자가 굉장히 침착한가 봅니다.”

부원수 이억기가 평했다.

“그는 침착하겠지.”

“그럼 공성은…….”

조선이 아무리 화력의 나라라도 적이 너무 많아 중과부적인 상태에 처하면 위험했다.

만일 명나라가 시급히 공성을 시도하지 않고 시일을 지체하며 증원을 받는다면, 지금의 4만이 8만이 되고 16만이 되는 건 일도 아니다.

지금쯤이면 도성에도 소식이 전해져 북직예에서 대병을 소집하고 있지 않겠는가.

그다음은 산서, 하남, 산동, 남직예다.

조선의 당초 계획은 명이 대병을 꾸려 대응하기 전에 서둘러 요동을 확보하고서 북경, 못 되어도 산해관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하루 지체될수록, 작전의 실패도 하루 가까워진다.

이을룡이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그는 침착할 거라고. 그‘는’ 침착할 거라고.”

“소장은 이성량의 침착함과 명군의 공성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놈이 침착할수록, 공성은 늦어지지 않겠습니까?”

“이해하지 못했군.”

“송구합니다.”

“아니, 부원수께서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말해주지 못한 내 실수지. 이성량‘만’ 침착할 거란 뜻이었네. 제장들은 그렇지 못할 테지.”

“아.”

이성량은 대병을 쥐고도 공성부터 걸기 전에 군진을 세웠다. 공성시 쉽게만 흘러가지는 않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명의 장수들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고작 성 하나를 단숨에 함락하지 못해 심기일전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이성량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무수한 군공을 세워 요동의 총병으로 일해 왔고, 황제의 총애를 받아 작위와 특권이 비할 자가 없습니다. 과연 부하들이 동요한다고 흔들릴까요?”

“흔들릴 수밖에 없네. 명 조정에서는 이성량을 압박하고 있으니까.”

“잘만 일한 사람을 왜 압박한다는 말입니까?”

“이성량은 능력만큼이나 욕심도 많지. 권력과 재물을 꿰차 요동의 총병이 아니라 왕이라는 소리까지 듣는 그가 독립이라도 시도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요동은 수도 북경이 있는 북직예와 붙어 있지만, 군사적인 요충지라 인구와 군사가 많고 자율성도 상당하며, 북직예와는 고작 산해관과 그 일대라는 좁은 영역으로만 연결되어 있었다.

이미 요동의 왕이라는 소리까지 듣는 이성량이 독립을 시도하겠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이을룡이 말을 이었다.

“그의 휘하 장군들 대부분이 이미 조정에서 파견된 외부인들로 바뀌었다는 첩보가 있었네.”

“이성량을 견제하기 위함이군요.”

“이성량은 공성을 서두를 수밖에 없어. 지금 당장은 신중하게 견디는 것처럼 보여도, 어쩌면 이미 공성 계획을 세워두어서 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렇겠군요.”

“장손포 네 발을 날리고 장수와 병사들을 미리 쉬게 하게. 오늘 새벽에 공격이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알겠습니다.”

이억기는 제장들을 바라보았다. 부원수씩이나 되는 그가 일일이 각지를 돌아다니며 명령을 전할 필요는 없었다.

“적들이 패주한다면 성에서 나와 추격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기병들은 밖에 숨겨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괜찮은 제안이군. 부원수가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남문으로 나가서 숨어 있게. 그리고 엽병들도 동원하는 게 좋겠어.”

엽병.

귀화 포르투갈인 안본소는 새로운 종류의 조총을 알려주었다.

기존의 화승과는 달리 부싯돌로 격발하는 이 총에는 엽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질 좋은 부싯돌과 이를 고정하는 복잡한 장치, 총신에 새기는 정교한 강선으로 엽총의 생산비는 화승총의 배나 들었으나, 비용의 간극을 넘어서는 결정적인 장점이 있었다.

은밀하다는 점이다.

화승총은 격발을 위해 상시 불을 붙이고 있어야 해, 은신에 제약이 컸다.

그러나 부싯깃을 사용하는 엽총은 사용자가 몸만 잘 숨기면 그만이었다.

엽병은 이러한 엽총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병종으로, 사냥꾼을 뜻하는 한자 엽사(獵師)에서 따온 이름 그대로 적을 사냥하는 자들이었다.

“도원수 대감.”

엽병 부대를 지휘하는 대호군 최호였다.

지천명을 넘긴 연배에도 큐슈 원정 때 날아다닌 자였다. 애초에 불혹이 다 되어서 무과에 급제할 정도로 정정한 자였다.

“최 호군. 말씀하시게.”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장은 금일 상태가 좋지 않아 작전에 임하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최호는 깊게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전선을 형성해 싸우는 일반 부대와 유격전을 펼치는 엽병의 활동량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약간의 난조로 큰 차질이 발생하기 때문에, 말단 병사조차 상태가 안 좋다는 이유 하나로 자의나 타의로 투입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지휘관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아니오, 솔직하게 말해주어서 고맙네. 그만큼 이번 전투에 진지하게 임하고 자신의 상태를 냉정하게 평가했다는 뜻이니까.”

“입이 백 개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엽병 지휘관으로는 누가 좋겠는가?”

“윤 만호가 좋겠습니다. 엽병으로 복무한 적은 없으나, 누구보다 진지하게 임무에 임하니 그만한 적임자도 없을 것입니다.”

“호군의 평가를 믿겠네.”

최호는 손을 모아 감사를 평했다.

* * *

당일 새벽.

“엽병을 말입니까?”

“내가 추천했고, 도원수께서는 의문 없이 응하셨네. 그걸 의미하는 바를 모르지 않으리라 생각하네.”

최호가 전언에 윤 만호는 손을 모아 허리를 숙였다.

“일신과 백골이 진토되는 한이 있어도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맡기겠네.”

“망극합니다.”

최호가 발길을 돌리자, 윤 만호. 아니 윤흥신의 주먹이 거세게 쥐어졌다.

그는 중종 대왕 시절부터 명종 대왕 시절까지 파평 윤가를 이끌었던 대신 윤임(尹任)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그러나 명종 대왕 치세 초반 파평 윤가의 내전이나 다름없는 을사사화가 터지면서 대윤을 이끌었던 윤임은 역적으로 몰려 자식들과 함께 명을 달리했다.

그런 와중에 윤흥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나이가 어려서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뿌리도, 부모도, 형제도 모르고 살다가, 폐주의 치세에 을사사화 희생자들이 복권되면서 역사를 되찾았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청산해야 할 역사였다.

윤흥신에게는 적신 윤원로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와 형제들의 억울함을 갚고 집안을 다시 반석으로 일으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명의 대군을 마주한 지금.

윤흥신은 비단 명령이 떨어져서 임전을 각오하는 게 아니었다.

자다 깬 기운은 결의 앞에서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는 엽병들의 숙소로 향했다.

“병사들을 깨워라, 성을 나간다.”

윤흥신의 말에 초병의 얼굴이 굳어졌다. 엽병이 되어서 고작 바람이나 쐬고자 이 새벽에 성을 나갈 리는 없었다.

“전투입니까?”

“오늘 새벽 적의 공성이 있으리라 예상된다. 부원수께서는 우리가 적의 요인들을 제거해주기를 바라신다.”

“알겠습니다.”

초병은 절도 있게 군례를 올리고는 숙소로 들어섰다. 그리고 머지않아 완전무장한 엽병들이 차례대로 나섰다.

잠을 깨운 초병에게서 전해 들었는지 피로한 기색은 어디에도 없었다. 임전무퇴의 각오만 서려 있을 뿐.

윤흥신은 그들에게 길게 말하지 않기로 했다.

엽병들은 함경도에서부터 왕을 쫓아 포수로 종군한 자들이며, 큐슈 원정에서는 화승총으로 산병전과 유격전, 저격을 수행한 정예 중의 정예였다.

이제 엽총으로 무장해 한층 더 위험해진 이들은, 목숨을 건 전투 앞에서 병사가 가져야 할 결의나 신념 따위를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대들에 대해 잘 모르지만, 대조선과 주상 전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경험도 일천한 내가 과분하게 그대들을 이끌게 되었지만, 명령은 믿고 따라주고 실수할 때는 다그쳐 주길 바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고맙다.”

“아닙니다. 이걸 걸치시지요. 만호께서도 엽병과 동행하시려면 전용 무장을 하셔야 합니다.”

초병이 넝마주이를 건넸다.

“보기는 많이도 보았지만 직접 걸쳐보는 건 처음이로군.”

엽병들은 은신의 최적화를 위해 위장복이라는 전용 갑옷을 걸쳤다.

얇은 종이 갑옷에 덩굴과 잎사귀, 또는 현지의 수목을 엮어 만든 위장복을 걸친 엽병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발견조차 어려웠다.

위장복의 개념은 그 자체는 놀랍지 않으나, 어째서 이런 생각을 진작하지 않았냐는 점에서 놀라게 된다.

“바로 환복하지.”

윤흥신은 걸치고 있던 두정갑을 벗어 건네고는 위장복을 걸쳤다. 달아놓은 것이 많아서인지 생각보다 무거웠다.

초병은 받아든 갑주를 뒤로 넘기고 엽총을 건넸다.

화승 대신 부싯돌이 달렸으며 길쭉한 총신은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느낌을 동시에 주었다.

“엽총을 써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아직.”

“쓰는 방법 자체는 화승총과 같습니다. 대신 신속한 대응을 위해 전용 탄환을 씁니다.”

초병은 가죽으로 된 네모난 곽을 건넸다.

안에는 종이뭉치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한쪽에는 둥그런 쇠구슬이 만져졌고 반대편에는 눌러 담긴 가루의 감촉이 있었다.

“화약과 탄환을 한데 넣었군. 확실히 편하겠어.”

“대신 화문에는 화약을 넉넉히 부어주셔야 합니다. 종이포장 때문에 불발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알겠네.”

“이만하면 알려드릴 사항은 다 알려드린 것 같습니다. 이제 명령을 내려주시지요.”

“일단은 성부터 나가지.”

윤흥신은 엽병들을 이끌고 남문으로 향했다. 이미 남문에서는 기병들이 두 줄로 대오를 갖춘 채 성문을 나서고 있었다.

적이 공성을 시도하면 측면에서 들이받아 대오를 무너뜨리고 패잔병들을 사냥하기 위함인가.

그들이 효과적으로 적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엽병들이 적장들을 저격해 적이 대응하지 못하게 만들어 줄 필요가 있었다.

“먼저 나가세.”

윤흥신과 엽병들은 기마대가 다 나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들 대오와 문 사이의 틈을 통해 성을 나섰다.

기마대의 선두는 부원수 이억기가 이끌고 있었다.

“제때 나와줬군.”

“예.”

“작전 회의 때 졸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만호께서는 엽병들을 이끌고 서쪽 언덕을 점하시게.”

서쪽 언덕은 언덕보다는 야산에 가까웠다. 전장이 될 성의 북쪽 마을과 논밭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로서 엽병이 활동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언덕은 이미 적의 첨병들이 점하고 있겠지. 전투가 시작될 때 혼란을 틈타 진입하는 게 좋을 걸세.”

“소장이 언덕을 미리 확보하지 않으면 기병대가 미리 전장을 우회하지 못하게 됩니다. 먼저 진입하겠습니다.”

“엽병으로 복무한 적은 없다고 들었네만. 자신이 있다고 실수를 안 하는 건 아니네.”

“소장은 엽병으로서의 경험은 없으나, 여기 엽병들은 자신의 임무를 잘 알 것입니다. 병사들의 조언을 숙지하고서 신중하게 임할 터이니 기회를 주십시오. 목숨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좋네. 대신 내가 후회하지 않도록 하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부원수 이억기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윤흥신은 절도 있게 군례를 올렸다.

그리고 엽병들을 이끌고서 어둠에 잠긴 야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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