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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70화 (270/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70화

95. 풍림화산 (1)

“잘도 바글바글 끌고 왔군.”

망원경의 시야 너머로 인간의 대오가 저쪽 끝에서 반대편 저쪽 끝까지 펼쳐졌다.

명군의 감상을 마친 이을룡은 부원수 이억기에게 망원경을 건넸다. 이번에는 이억기가 적진을 살피고는 감탄을 자아냈다.

“엄청난 규모입니다. 적게 잡아도 4만은 능가하겠군요.”

그래서 망원경 없이도 누각에서 지평선을 뒤덮은 적병을 볼 수 있을 정도다.

“저만한 대군을 일시에 끌고 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명의 대응은 신속했다. 요동총병이 이미 조선을 주의 깊게 주시해왔다는 뜻이다.

“영원백(寧遠伯)이라는 작위까지 받은 사람은 다르군.”

조선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기는 했으나, 명의 관리들은 태만하고 오만했다. 조선이 저들에게 해를 끼치리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이을룡은 덧붙였다.

“황제의 신임을 받으며 요동을 지키는 자 다워.”

“도원수께서 총병이 4, 5만은 끌고 오리라 말씀하셨을 때 소장은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어째선가?”

“기습하고도 대병을 맞음은 작전의 실패를 뜻하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대성공일세. 놈들에게 시간을 주었다면 군세의 단위가 달라졌을 테니까. 4만에 ‘0’이 하나 붙었겠지.”

명나라는 방대한 영토에, 과장 보태 무한한 수준의 백성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 기준으로 4, 5만은 대군이라 할 수도 없었다. 중원이 갈라져서 서로 싸웠던 과거에도, 중국의 나라들은 도합 백 만 단위가 넘는 전쟁을 일으켜댔다.

무려 천 년 전의 일인 전진(前秦)과 동진(東晉) 사이의 전쟁에서도 전진은 백만의 대병을 일으키고도 동시에 서역 원정도 진행했다.

통일된 왕조이자 최근 부강함을 되찾기 시작한 명나라가 고작 4, 50만 대군을 만들어내지 못하겠는가.

“역시 대국은 달라도 다르군요.”

“하지만 우리 앞에서는 많이 모인 표적에 불과하지.”

조선은 화력의 나라였다.

병사들은 치명적인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했으며, 어중간한 적의 군세는 방아쇠 한 번 당기는 것으로 전멸시킬 수 있었다.

만일 적의 군세가 총격으로 패퇴하지 않는다면 비격진천뢰를 날린다.

비격진천뢰는 시한폭탄으로, 착탄과 함께 즉시 터지지 않고 전장을 점유한다. 적의 경로에 놓아두면 돌격을 분쇄하거나 저지할 수 있다.

큐슈 원정에서 성능을 입증한 장손포도 있다.

정확도는 낮아도 화력이 뛰어나다. 동시타격으로 피할 틈도 주지 않고 일시에 적진을 타격하면 아무리 정예로운 군사라도 파편과 핏물로 분해된다.

4, 5만이 대군이 아니기는 조선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포하시지요.”

“패잔병들을 놓치고 싶지는 않네. 장손포는 가까워지면 방포하도록 하지.”

“예.”

이억기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는 덧붙였다.

“적이 서둘러 쳐들어왔으면 좋겠군요. 군진을 설치하는 모습을 보면, 소장의 바람대로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총병은 유능한 사람이네. 우리가 믿을 구석 하나 없이 요동을 침범할 리 없다고 생각했겠지.”

“공성을 천천히 진행할까요? 저들에게 요동의 다른 지역에서 증원될 시간을 주지는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부원수께서는 겁이 나나?”

“도성을 뜨기 전에 대학의 논문 한 편을 봤습니다.”

“무슨 논문.”

뜬금 없는 논문 타령에 이을룡은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이억기를 바라보았다.

“적조나 녹조 현상이 발생하면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지요. 그런데 적조와 녹조를 이루는 것들이 본래 물고기들의 밥이라지 않겠습니까?”

“아.”

“아무리 명군이 표적에 불과하더라도 수효가 너무 많아지면, 중과부적으로 아군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지요.”

“하하!”

이을룡은 비유가 마음에 들었다는 듯 검지로 이억기를 향했다.

무관이라 학문에는 관심이 없는 줄 알았거늘 대학의 논문까지 보고 있을 줄이야.

이을룡은 이억기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출세를 거듭하여 상관과 주변인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었다.

왕의 집안인 전주 이씨라서 특혜를 받는 게 아니냐고.

이억기가 증명해야 할 것은 무재만이 아니었다.

이을룡 역시, 이제는 왕이 된 주인을 모시는 자로서 부끄럼이 없도록 수양을 거듭해 왔다.

자신을 증명하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같은 선상에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잘 맞는 것이겠지.

“걱정하지 말게. 총병의 신중함에도 한계가 있을 테고, 이미 부관들이 수적 우위를 이용해 단숨에 밀어버리자고 보채고 있을 테니까.”

총병 이성량이 혼자서 아무리 대단한 인간이라도, 군계일학일 뿐이다.

주변의 닭들은 전형적인 명나라의 관리고 장수들이다. 대제국 명나라의 군대가 고작 한 줌의 조선군이 성을 끼고 있다고 주저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할 거다.

“거기에 신경까지 긁어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장손포를 한 발 씩만 드문드문 쏘아 보내는 것이지요. 계속 맞고 있을 생각이 아니라면 쳐들어오지 않겠습니까?”

“그거 괜찮군. 하지만 탄두의 화약은 절반 덜어내는 것이 좋겠어. 장손포에 대해 방심할 수 있도록 말이야.”

“좋은 계책이십니다.”

이억기는 곁의 부관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지금 논의한 내용대로 이행하라는 뜻이었다.

부관은 절도 있게 군례를 올리고는 누각을 내려갔다.

잠시 후.

-뿌아아아아앙……

장손포의 궤적 하나가 창공을 가로질렀다.

이을룡은 서둘러 적진을 향해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그곳에서 적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 채, 하늘만 멍청하니 볼 뿐이었다.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 장면이다.

장손포가 처음 열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왜병들은 장손포가 그리는 호선을 멍청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콰광!

착탄과 함께 검붉은 먼지가 피어올랐다.

적병들은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는 허둥지둥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더 떨어지는 장손포도 없거늘, 참으로 우스운 광경이다.

하급 무관들이 바삐 동요와 소란을 잠재울 동안 뒤늦게 지휘관급 인물들이 폭심지를 찾았다.

“저놈이 총병 이성량인가.”

지휘관들 사이에서 금박이라도 입힌 듯 유난히 번쩍이는 갑주를 찬 자가 있었다.

거기에 환갑을 넘은 연배라더니 백발이 성성해, 제법 분위기가 나는 자였다.

이성량은 맞은편에서 을룡이 바라보고 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정확하게 망원경 너머에서 이을룡의 눈을 마주쳐왔다.

우연이다.

이성량은 단지 조선군이 점유한 성을 노려보았을 뿐이니.

그는 시선을 거두고는 주변에서 몇 마디 올리는 부장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몇 마디 지시를 하달하고는 단호하게 발을 돌렸다.

“침착하군.”

지휘관이라면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태연해야 하는 법이지만, 그렇지 못하는 자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 이성량은 지난 세월 요동을 굳건히 지켜온 자 다웠다.

하지만 속으로는 어떨지 모른다.

반격을 지체했다간 조정에서 어떤 문책이 날아올지 모르고, 조선군이 단지 미쳐서 강을 넘었다고만 생각하는 부장들은 무식한 소리만 해댄다.

이런 와중에 안 들어오고 뭐하냐는 식으로 포탄까지 하나 떨어졌다.

그게 마지막 포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이성량은 선택을 내려야 한다. 설령 그가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황이 여의치 않은데 어쩌겠나.

* * *

반 각 전.

이성량은 자신의 천막에서 조선군이 점령한 성의 공성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오랑캐 따위가 잠시 중화를 받아들였다 해서 대제국 명나라에 항거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 봐야 저 죽을 짓에 불과한 미친 만행에 불과하다.

그러나 야만적이고 미개한 오랑캐라도 믿는 구석 하나 없이 대명을 넘보지는 않았다.

과연 조선은 무슨 배짱으로 강을 넘은 것일까.

참모인 마 참장이 말했다.

“놈들이 화창(火槍, 조총)으로 무장했다곤 하나, 첫 사격만 견뎌내면 성을 함락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성량은 성성하게 난 흰 수염을 쓸어내렸다.

화총.

그래.

중화를 버리고 오랑캐로 퇴화한 조선 아니랄까 봐, 놈들은 오랑캐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화총을 운용했다.

화총의 존재 자체는 30년도 더 전에 포도아국을 통해 알려졌다.

작은 대포나 다름없는 화총은 관통력은 뛰어났으나, 그뿐이다.

정확도는 개판에 장전속도는 느리지, 총구 구격과 탄환이 통일되지 않으면 용처도 없는 쇠막대기와 쇠구슬에 불과했다.

활과는 정 반대다.

숙련된 사수는 눈 깜짝할 사이에 화살집 하나를 비울 수 있고, 개미만한 표적도 백발백중이다. 그리고 활과 화살은 양식에 크게 구애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조총은 곡사가 불가능했다. 우군의 뒤통수에 총알을 박아 넣을 생각이 아니라면 접전 상태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마 참장이 말을 이었다.

“굳이 군진을 세우실 필요도 없으십니다. 아군의 수효가 이렇게 많은데, 고작 한 줌 조선군을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부장들도 마 참장의 말을 거들었다.

“맞습니다. 공성 과정에서 상당한 출혈은 발생하겠으나, 우군의 수효가 적보다 곱절의 곱절을 능가하는데 어찌하여 공성을 꺼리십니까?”

“일단 성벽에만 올라서면 조선군은 늑대 앞의 양떼에 불과합니다.”

“대인!”

“진격을 명해주십시오!”

부장들이 손을 모아 청했으나 이성량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아무리 조선이 당랑거철에 불과할지라도 화총의 장단쯤은 알고 있을 터인데, 대책 하나 없이 대명의 국경을 범하겠는가?”

“생각이 있는 놈들이라면 처음부터 대명을 치지도 않았을 겁니다, 대인!”

“맞습니다!”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게 아니라, 당장에 몰아부쳐 조선의 수도를 함락하고 이왕의 무릎을 꿇려야 합니다!”

이성량은 소란 속에서도 조용히 탁상을 손끝으로 두드릴 뿐이었다. 그의 신중한 태도에, 부장들도 더는 재촉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영원백 요동총병 이성량은 동북면에서 무수히 많은 전공을 세운 명장 중의 명장.

그의 권위와 경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뿌아아아아앙……

“……?”

천막 너머로 수상한 소리가 울었다.

짐승의 울부짖음이 꼭 이러할까. 저 멀리에서 울리는 울음소리에 부장들은 이성량의 눈치를 살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천막을 나섰다.

화창한 볕으로 나선 그들을 반겨준 것은 창공을 가로지르는 검은 호선이었다.

그리고 그 머리는 정확하게 진형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콰광!

폭음이 하늘을 울리고 대지를 진동시켰다. 자존심 강한 부장들도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릴 정도였다.

천막 안에서 이성량이 외쳤다.

“무슨 일이냐!”

“적의 포탄이 떨어졌습니다!”

“뭐라?!”

침착하게 있던 이성량도 결국 천막을 나섰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동요한 부장들과 겁에 질린 짐승처럼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병사들이었다. 이성량은 부장들을 밀쳐내며 외쳤다.

“멍청한 것들! 고작 포탄 한 발 떨어졌다고 이 난리를 설친단 말이냐! 병사들을 진정시켜라!”

이성량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노호성을 터뜨리자 얼 타고 있던 부장들은 주변을 뛰어다니며 총병의 명을 전했다.

말단 무관들 역시 각자의 칼을 뽑아 들고서 진중의 병사들을 위협하며 소란을 제지했다.

이성량은 그 가운데를 헤치고 나와 폭심지로 향했다.

포탄이 직격한 자리는 젖은 흙을 토해낸 채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그곳을 지키고 서 있었을 병사들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진 채였다.

동행한 부장 하나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어떤 포탄이.”

이런 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주변의 무장과 병사들은 내색하지 않았으나 다들 속으로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실로 처참한 광경이었으며, 눈앞의 전우처럼 단말마조차 내지 못하고 무수한 조각으로 흩어지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좌중에 적막과 함께 공포가 내려앉자 이성량은 언성을 높여 외쳤다.

“요란 떨지 마라, 고작 대신기전이 아니냐! 조선의 대신기전은 안 맞기보다 맞기가 더 어려운 쓰레기다!”

동요를 저지한 이성량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면의 성을 바라보았다.

대신기전을 날릴 것이라면 한꺼번에 날릴 것이지 고작 한 발만 날린 이유는 무엇인가.

거기서 미적대지 말고 기어 오라는 뜻이다. 시원하게 한 판 붙자는 소리다. 놈들은 이쪽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또 대신기전을 쏘아 도발하겠지.

‘놈들이 일전을 원한다면 반대로 시간을 끄는 것이 상책이거늘.’

명의 장수는 자존심은 강해도 인내심은 강하지 못했다. 적을 능가하는 대병을 쥔 채로 도발을 당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성량은 썩 곤란한 상태였다.

그는 인간 이성량의 황금기는 아직 지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나 중앙의 관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이성량이 쌓아온 치부를 들먹이며 갖은 압박을 가했으며, 총병부 휘하에서 수십 년을 일한 장수와 무장들을 각지에 흩어버리고 대신 애송이들을 꽂아 감시했다.

요동의 왕이나 다름없다는 이성량이 진짜 요동의 왕이 되지 않도록 갖은 술책을 부리는 것이다.

‘멍청한 놈들, 내 한평생 대명을 향한 충심을 조금이라도 굽힌 적이 없거늘!’

이성량이 심란해하는 차에 곁에서 마 참장이 속삭였다. 그 역시 조정에서 파견된 자였다.

“먼저 공성하지 않으면 조선이 계속해서 대신기전을 쏘아 보낼 것입니다.”

“나도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성에 지체가 있으면, 분명 마 참장이나 전쟁이라곤 추호도 모르는 멍청한 애송이들이 조정에다 고자질하겠지.

총병이 대병을 쥐고도 한 줌 조선군을 두려워하여 공성을 펼치지 않는다고!

조정의 대신들에게는 아주 좋은 숙청의 빌미가 될 테지!

이성량은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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