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69화
94. 천상의 일 (3)
“어찌하여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일에 껴서 부족 전체를 옮기려는 것이냐?”
신립이 물었다.
눈앞의 여진족 족장이 자신의 단잠을 방해할 때만 해도 화살 한 대 갈겨주고 싶다는 기분은 잠기운처럼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주 흥미로운 놈이었다.
그 흥미로운 놈이 답했다.
“조선이 명을 쳐서 이기고 나면 일대에서 횡행하는 여진족들은 승냥이 떼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들의 명운이란 분명하니, 대국과 대인에게 일신과 부족을 맡기고자 합니다.”
신립은 웃으며 답했다.
“조부와 부친이 죽었다는 것이 약탈을 위한 변명이라 생각했는데, 이걸 위한 변명이었구나.”
종군 타령할 때만 하더라도 잔꾀를 부리는구나, 싶었으나 이놈의 잔꾀는 보통이 아니었다.
아니, 이 정도면 여진족들 사이에서는 혜안이라 봐도 무방하겠지.
다른 여진족들이 화톳불에 몸을 던지는 나방들처럼 파멸로 몰려들 때 오직 눈앞의 족장만이 곧 벌어질 일을 예견했다.
이런 놈은 여진족 사회에 돌려보내는 게 독이다.
부족 전체를 데려왔다니 곱게 돌아가지도 않겠지만.
“좋다.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밖에서 머물러라. 내일 새벽, 출발하기 전에 너희의 인원을 점검하고 부대를 편성해주겠다.”
“감사합니다, 대인.”
“이름이 뭐지?”
“누르하치라 합니다.”
“그래……. 좋다. 기억해 두마.”
“영광입니다.”
누르하치는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수하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신립은 누르하치를 상대하느라 잠기운이 다 달아난 채였으나, 온종일 달려온 피로마저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시 단잠을 청하러 숙소로 향했다.
여진족을 받아준다는 말에 반발하는 부관은 없었다.
연해도와 함경도에서 데려온 기병들은 이미 대다수가 여진족이었으니까.
외부인이라곤 하나 여진족이 더 섞여든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다음 날.
“누르하치에게서 종군하겠다는 장정들의 명단을 확인했습니다.”
군관이 문서를 건네며 보고했다. 신립은 쓱 내려보았다. 여진족들 아니랄까봐 알아먹지 못할 이름들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전부 여진족들 부대에 흩어버리게.”
“놈들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지금 와서 안 받아들이면 어쩔 것인가. 정 싫다고 하면 종군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게.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
누르하치는 부족 전체를 끌고 왔다. 고작 장정들을 흩어놓는 정도로 불만을 가져 물러날 각오로 벌일 일이 아니다.
“따라오는 부족 쪽에는 말단 장수 하나 붙여놓게. 다른 여진족이나 쫓아오는 치중대가 문제 일으키지 않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누르하치에게는 옆에 붙으라고 하게. 무얼 하다 온 녀석인지 궁금하군.”
명나라에 의해 죽었다는 조부와 부친의 이야기도 궁금했고, 이 똘똘한 녀석이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궁금했다.
* * *
요동 총병 이성량.
그의 집안은 고려 출신으로, 명이 고려 국경에 설치한 철령위(鐵嶺衛)의 첨사를 대대로 세습해 왔다.
이성량의 대에 이르러서는 집안의 사정이 곤궁해져서인지 첨사직도 세습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순안어사(巡按御史)의 눈에 들어 북경에서 자리를 얻게 되면서 대대로 지낸 첨사와는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이성량은 잠룡이었다.
묻혀 있을 때는 주목받지 못했으나 한 번 관직에 오르자 유능함을 과시하여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했다.
그리고 명나라 동북면에 난립한 부족들의 수천, 만 단위의 연이은 침공을 막아내면서 마침내 영원백(寧遠伯)이라는 작위까지 받았다.
황제는 군공에 다한 총애만 아니라 포상까지 내려주었고, 관직에 오르기 전만 해도 곤궁한 처지였던 이성량은 요동에서 가장 강하고 부유한 자가 되었다.
그의 인생, 역경과 치부는 많아도 흠이나 때가 황금의 가치 자체를 어쩌지는 못하듯 그의 인생은 가히 황금기라 할 수 있었다.
그래왔는데.
“간자들이 또 생환하지 못했나?”
이성량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원래 보고서에는 정기적으로 조선을 오가는 간자들의 첩보 내용이 적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보고서의 내용에 적힌 글자는 단출하기 짝이 없었다.
기일에 돌아와 보고한 간자가 없었다고.
“흐음. 간자들은 보내는 족족 처리하면서 정작 사신단이 없어졌음은 이실직고한다라…… 도대체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크게는 두 가지 상황으로 좁힐 수 있겠지.
하나는 조선이 명에 도움 되지 않을 일을 꾸미고 있을 경우다. 그러니 간자들을 족족 처단하여 수작질이 외부로 퍼져나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을 각오하지 않는 한 사신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을 터이다.
그러니 사신이 어떻게든 불미스러운 일에 엮이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자신들은 관련 없는 일이라고 알린 것이겠지.
다른 경우는, 조선이 양분되어 있을 경우다.
한쪽은 명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가지고 반대편은 유화적이고 수비적인 입장을 가진 것이다.
전자가 동창과 간자들을 처단하고, 그 사정을 알아내기 위해 파견된 사신단까지 없애 버리자 후자는 문제가 더 불거지지 않도록 서신을 보내 자비를 청한 것이다.
‘어느 한쪽 경우만 아니라 두 경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을 수도 있고.’
이성량은 아주 정확한 추측을 했으나, 물증이 없는 관계로 확신하지는 못하고 고민만 이어 나갈 뿐이었다.
그러던 중.
“대인!”
말단 관리가 집무실을 찾았다.
숨도 헐떡이고 눈도 파들파들 떨리는 게 보통 소식은 아니었다. 총병부에 이런 소란이 벌어지는 경우는 오직 하나뿐이다.
“뭐냐? 외침이냐!”
“예, 그런데…….”
“그런데? 속히 보고하라!”
관리는 침을 꼴깍 삼키더니 어렵사리 답했다.
“조, 조선이 침공했습니다! 진 유격이 기병 오백을 이끌고 맞섰으나 대패하고 진 유격도 전사했다 합니다!”
“뭐라!”
이성량은 책상이 넘어지는 것도 모르고서 벌떡 일어났다.
“조선이…….”
놈들이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대명을 기습 침공하리라곤 추호도 몰랐다.
지난 이백 년 동안 조선은 명나라에 복종해 왔다.
물론 충성이란 신기루와 같다. 진짜인지 거짓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쉽게 사라지니까.
그러나 충심의 진심과는 별개로 조선이 대명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대명은 그 이름처럼 강대한 제국이고 조선은 일개 성(省) 수준의 작은 나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침공을 단행하다니?!
“놈들이 무슨 미친 발상으로 감히 대명을 공격한단 말인가! 진정으로 오랑캐가 되어 토멸되고자 하는가!”
이성량은 진노를 터뜨리고는 명했다.
“당장 전군을 소집해라! 조선군을 격파한다! 후속 부대도 편성하라! 적을 토벌하고 그대로 남하한다!”
“예!”
* * *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부원수 이억기가 평했다. 누각에 자리한 그는, 멀지 않은 곳에 펼쳐진 전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곳에는 조선군의 진격을 막고자 덤볐던 명군의 선발대가 시산혈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그다지 의미 있는 저항은 아니었다.
단 한 번의 사격에 전멸했으니까.
조선의 군대는 그만큼 강했다. 비장의 무기인 장손포는 아직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맞은편에서 도원수 이을룡이 답했다.
“두렵나?”
“군인은 명령하면 따를 뿐이지요.”
“잘 알고 있군.”
“주민들이 도망가는데, 잡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명군의 신속한 전멸에 마을 주민들은 불이라도 붙은 사람처럼 사방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대다수는 제 한 몸만 챙기는 대신 가족과 가산을 챙기고자 했고, 조선군이 진주한 다음에도 도망치지 못했다.
하지만 조선군은 약탈도 억류도 하지 않았다.
그런 짓을 태연히 저지르기에는 아직 군병들의 심신이 지치지 않은 탓이기도 했으나, 도원수가 엄중하게 군율을 유지한 덕이었다.
일부 주민들은 예상과는 다른 전개에 싸던 짐을 풀고 다시 눌러앉았으나, 대부분은 마을이 전장이 되어 휘말리기 전에 도망치기를 결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사방을 향해 흩어지고 있었다.
“기병대라도 보내서 저들을 쓸어버려야겠는가?”
“그러자는 말은 아니었습니다만, 혹 저들이 창칼을 들고 돌아올까 두렵습니다.”
도망가는 주민 중에는 장정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군인의 재목으로는 최적이었다. 요동부에서 징병을 시작하면 빠짐없이 적군이 되어서 돌아오겠지.
“나도 처음에는 무엇 하나 살아있지 않도록 쓸어버릴까 고민해보았지만, 상책이 아님을 깨달았네.”
“으음.”
“요동이 전쟁터가 되면 승냥이 같은 것들이 몰려들 걸세.”
“여진족 말입니까?”
“이 일대에 그놈을 말고 어떤 승냥이가 있겠는가, 하하. 당연히 여진족들이지.”
도원수는 짧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놈들은 각지를 약탈하러 다닐 걸세. 그리고 오직 우리만이 유민들을 여진족에게서 보호할 수 있지. 다른 곳들은 군대를 만들기 위해 장정들을 모두 빼갈 테니까.”
“아…….”
“이쪽에서 나서서 저들을 어찌 해봐야 악명과 악감정만 남을 뿐일세. 그럴 바에야 무엇이 최선인지 저들 스스로 깨닫게 하는 편이 낫지.”
“그렇군요.”
이억기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공연히 입에 담는 사람은 없었으나 금상은 조선의 왕이 아니라 기만술과 계략의 왕이 더 어울렸다. 일각에서는 경멸과 두려움이 섞인 표현으로 통수왕이라고도 불렀다.
방심하는 순간 뒤통수를 맞는다고.
도원수는 그런 왕이 직접 전수한 사람다웠다.
유민들은 전쟁의 병화(兵禍)를 피해 살아남고자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지만…… 피를 보며 명은 저들을 지켜줄 수 없음을 체감하면 제 발로 조선의 품으로 돌아와 안기겠지.
수호자와 침략자가 바뀌는 거다.
명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여진족으로.
왕이 조정을 가지고 논다면 도원수는 전장을 가지고 놀았다.
“빠져나갈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면 방어를 굳히게. 빈 집을 점령해 병사들을 쉬게 하고 외곽과 내부에 초병을 세워.”
“그럴 의도도 있으셨군요.”
“저들이 자발적으로 집을 비워주었는데 안 쓸 수는 없잖은가.”
“맞는 말씀이십니다.”
“실컷 쉰 다음에 천천히 북상하자고.”
“다 계책이 있으시겠지만, 너무 여유를 부렸다가 명군이 증원되지는 않을까 두렵습니다.”
“직예군은 증원되겠지만 타 지역은 산해관을 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날 걸세. 요동총병은 능력이 좋고 자존심도 강한 사람이야. 절대로 본국의 증원을 침착하게 기다리지 않겠지.”
“제 발로 요동군만 긁어모아 찾아오겠군요.”
“그 전에 우리가 저력을 여실히 보여주면 놈이 겁을 먹을 가능성이 높아. 그 정도의 사고는 가능한 사람이지.”
이억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원수는 말을 이었다.
“여유 있게 격파하고서 콧대 높인 상태로 신 부원수의 합류를 구경하자고.”
“신 부원수 배가 좀 아프겠습니다.”
“연해도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 제때 낄 수 있겠나? 신 부원수가 오면 군공은 여진족들 정리하면서 세우라 전해주시게. 하하!”
“하하하하!”
제때 도착하려고 밤낮으로 달리며 고생하는 신립이 들으면 분통이 터져 죽을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