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68화
94. 천상의 일 (2)
언덕에 삼삼오오 모인 여진족 사내들은 기마대의 질주를 구경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중무장한 수천의 기마대가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말발굽이 대지를 때리니 땅이 울리고 하늘이 울었다.
그 광경에 여진족들은 부족의 영토를 가로지르는 일군(一軍)을 감히 방해하거나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저들이 어디로 가서 무엇을 박살 낼지는 몰라도, 첫 번째 전공이 되어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기마대의 질주는 신속하고 거침없었으며 남기는 흔적은 오직 파헤쳐진 들판과 자욱한 흙먼지 바람이었다.
“콜록, 콜록.”
그 광경을 구경하던 여진족 사내는 눈살을 찡그리며 손을 내저었다.
“갑주를 보아하니 조선놈들 같은데 어디로 가는 거지?”
“난들 아나. 우리만 아니면 그만이지.”
“명나라 같은데…….”
조선군은 동쪽에서 나타나 서쪽으로 향했다. 정확하게 연해도가 있는 방향에서 요동이 있는 방향이다.
“설마.”
“그럼 어디를 치려고 저러겠나.”
만일 여진 부족을 치고자 했다면 연해도 일대에도 신경 쓰이는 부족은 많았을 터다. 그런데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에서 광란의 질주를 벌이는 이유가 무엇이겠자.
“허. 그럼 정말로 명을.”
여진족 사내는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명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이 아닌가. 그리고 조선은 지낸 수백 년 동안 명나라에게 순종해왔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라니.
“조선이 많이 크긴 했어.”
그건 사실이었다.
그동안 조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지 못했다. 오히려 기껏 얻어낸 땅을 다시 빼앗기기도 했다. 폐사군이 대표적이다.
조선은 행정구역만 없앴지 영토를 포기한 건 아니라는 입장이었으나, 제때 피신하지 못해 여진 부족의 손에 들어간 조선인들이나 사군으로 몰려든 여진족들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소리였다.
그러다 최근 들어 조선이 날개 단 호랑이처럼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두만강 너머의 연해도를 단숨에 집어삼킨 것은 물론, 빼앗겼던 폐사군도 무려 왕의 장인까지 직접 파견해 되찾았다.
“조선이 잘나가기 시작하니 명이 압박해 보려다 일이 터진 게로군.”
복잡한 일들이 있었던 관계로, 여진족 사내의 말처럼 흘러가지는 않았으나 본질적으로는 같았다.
조선은 잘 나가도 너무 잘나갔다.
기마대가 지나치는 여진 부족들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부족들은 이국의 대병이 영역을 뻔히 가로지르는 광경에도 대응할 생각을 못 할 정도로.
“조선이건 명나라건 어느 한쪽이 박살 나면 우리는 큰일 나겠군…….”
약소세력들은 패자들 사이에 끼어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패자들의 신경전 속에서 여기저기 선을 대며 존속과 이익을 보장 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단 하나의 패자만 남는다면?
주변 것들은 이제 치워 버려야 할 떨거지들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쪽이 이기건 여진족들의 영역은 승자에게 그대로 복속되리라.
여진족의 영역은 모두 명나라의 영토로 취급되었으나 어디까지나 명목상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진짜로 편입되는 수가 있었다.
“어…… 그럼 질 것 같은 쪽은 편들어줘야 하나?”
“어디가 질 것 같은데.”
“조선? 아마도? 놈들은 여태 명나라에 굴복해 왔잖은가.”
“놈들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명나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거겠지. 그리고 고작 우리가 조선의 편을 들어준다고 전황이 달라질 것 같나?”
명과 조선은 저들 사이에나 우열이 있지 일개 여진 부족에게는 조선조차도 거대한 제국이나 다름없다. 과장 조금 보태면 지금 벌어지는 일은 천상의 전쟁이다.
숭산이나 태산에 모래 한 숟갈 얹는다고 어디가 더 높은 산이라는데 달라질 것은 없다.
“이럴 때는 뭔가 대단한 일을 해보겠다고 설치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난장판에 끼어들어서 재미 봐야지!”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조선군이 나타난 동쪽에서 흙바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또 다른 일군의 등장이다.
놈들은 조선군과는 달랐다.
변발하고서 털옷을 걸친 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조선군이 명군을 묶어둘 동안, 요동을 약탈해 한몫 건지는 것.
“그렇다면 우리도.”
끄덕.
여진족 사내들은 의미심장한 시선을 나누더니 말허리를 걷어찼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을 가로지르는 여진족들의 대열에 파고들었다.
참으로 여진족다운 선택이었다.
그들은 이익에는 밝았으나 시야는 어두웠다. 조선군과 여진족들의 기병들이 각자의 목표를 향해 같은 지점으로 달려갈 동안…….
“대조선의 군병 앞에서 항거하는 자들은 오직 죽음뿐이다. 쏴라!”
연해도 관찰사 정인홍이 환도를 휘두르며 외치니, 동시다발적으로 총성이 터졌다.
정면으로 달려들던 여진족 전사들은 변변찮은 저항조차 못 하고 말과 함께 대지를 굴렀다.
이미 조선군이 지나온 길에는 여진족과 전마의 시신이 가득했다.
연해도와 함경도의 보병 겸 치중대는 먼저 나선 기병대의 뒤를 쫓으며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들을 박살 내고 있었다.
여진 부족들은 대부분의 전사가 약탈에 눈이 멀어 부족을 빠져나간 지 오래였으므로 조선군 보병대의 진격은 파죽지세였다.
그들이 시신과 피 웅덩이만 남기고 떠난 자리에는, 연해도의 여진 유력자들이 장정들을 이끌고 들어섰다.
점령지라곤 해도 황무지나 다름없는 여진족의 영역은 조선에게는 가치가 없다.
개나 소나 조선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와중에도 눈치를 잘 살피다 살아남은 연해도 유력자들은 그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유력자들은 조선군 원정대에 인력과 물자를 바치는 대가로, 조선군이 깨끗하게 밀어버린 땅을 대신 통치하기로 했다.
이 땅에 조선의 행정이 확립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터.
유력자들은 조선이 정한 적은 세율만 바치면서 방대한 영역을 다스릴 생각에 얼굴이 밝았다.
* * *
늦은 밤.
너른 들판에 주둔지가 세워졌다. 급하게 세워진 주둔지라 방벽은 없었으나 대신 사방으로 초병들이 세워졌다.
물론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며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려운 존재다. 방벽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주둔지의 병사들은 연해도에서 십수 년을 복무하며 내전에 준하는 반란으로 단련되어온 정예 중의 정예였다.
그 중심에는 연해도 병마절도사인 신립이 있었다.
“다들 피곤하니 초병들은 반 시진마다 갈아주도록 하게. 제대로 쉬지 못해 낙오하면 큰일이니까.”
“알겠습니다.”
군관은 신립의 명을 받들고 물러났다.
그렇게 천막에 홀로 남은 신립은 보는 눈이 없어지자 눈가를 비볐다.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하루종일 달렸더니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무예 단련을 즐기는 자신도 이럴 지경인데 병사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신립은 수하들을 편히 쉬게 해주고 싶었으나, 일정이 따라주지 않았다.
“고작 하루 이틀 전이라도 좋으니 미리 전해줄 것이지.”
대뜸 파발이 도착하더니 부원수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알리며 군사를 이끌고 요동으로 진격하라지 않겠나.
조선과 명 사이가 예전만 못하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기습공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명령이었고 신립은 다급히 기병들만 모아 내달렸다.
파발이 동북면 끝인 연해도까지 올 동안 도원수의 본대는 평안도를 한창 가로지르고 있을 게 뻔했으니까.
게다가 수도에서 명 국경지대인 의주까지는 사행로랍시고 길도 넓고 예쁘게 잘 닦여 있었다.
이쪽에선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아니 말발굽에 땀이 나도록 내달리지 않으면 명에 의해 각개격파되는 수가 있었다.
“후.”
피로에 쩐 신립은 서둘러 요동까지 내달리는 일을 제외하고는 다 잊기로 했다. 상념 따위로 아까운 수면 시간을 더 낭비할 수는 없었으니까.
신립은 침소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그 순간.
“부원수 영감.”
초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여진족 족장 하나가 영감을 뵙고 싶다고 청하고 있습니다.”
“하아…….”
놈의 목을 쳐버리고 다시는 이런 일로 귀찮게 하지 말라는 명이 턱끝까지 올라왔지만, 여기가 여진족의 영역임을 잊어서는 안 됐다.
이미 대군을 이끌고서 저들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긴장해야 할 상황이다.
거기에 불씨까지 던져줄 필요는 없었다.
“가겠다.”
“예.”
신립은 막 벗어놓은 갑주를 다시 걸치고 천막을 나섰다.
어떤 싸가지 없는 놈이 감히 바쁜 부원수의 수면 일정을 방해하는 것일까.
안내를 받아 주둔지 입구로 나아가자 잘 무장한 여진족들의 무리가 보였다.
저들도 괜한 오해는 사고 싶지 않았는지 말에서 내린 채였고 이쪽이 등장하자 꾸벅 허리를 숙였다.
선두에 있는 놈이 족장인가.
“무슨 일이냐.”
신립의 물음에 족장이 답했다.
“대인께서 명나라를 치러 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돕게 해주십시오. 목숨 걸고 한몫 거들겠습니다. 종군에 필요한 물자도 가져왔습니다.”
족장은 뒤편을 향해 팔을 뻗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수레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한가득 무언가를 실어놓은 것을 보니 식량과 무기처럼 보였다.
“다른 여진족들처럼 뒤만 쫓지 않고?”
신립은 후미를 쫓아오는 여진족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요란을 떨며 떼거리로 들러붙는데 어떻게 모르겠나.
놈들은 전쟁의 혼란을 틈타 저들의 야욕을 채울 생각이다. 승냥이가 따로 없었다. 그렇지 않은 적이 있었냐만.
그동안 저들의 부족이 후속 치중대에 의해 초토화되고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난 뒤 갈 곳 잃은 약탈자 무리는 어떤 결말을 맞을까.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눈앞의 여진족 무리도 마찬가지로 욕망에 눈이 멀어 종군을 청하는 것이겠지.
“알았다면 나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겠네. 나 역시 자네를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신립이 염증을 느끼며 발을 돌리려는 순간.
“대인! 저는 명나라에 의해 조부와 부친을 잃었습니다!”
“복수라도 하겠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부디 종군하여 저들에게 복수하게 해주십시오. 부족민들도 멀지 않은 곳에서 각자 짐을 싸고 대인의 허락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족민 전체를 받아줄 수는 없다.”
“쫓게만 하십시오. 혹시나 물자에 손을 대지는 않을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식량을 있는 대로 긁어왔습니다.”
“도둑이 당장 재물이 있다고 손이 착해지는 건 아니지.”
“단속도 엄중하게 하겠습니다. 만일 손이 착하지 않으면 그 못된 손을 잘라 버리고 추방하겠습니다.”
“흐음……. 사활을 걸었다는 느낌인데, 어찌하여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일에 껴서 부족 전체를 옮기려는 것이냐?”
“조선이 명을 쳐서 이기고 나면 일대에서 횡행하는 여진족들은 승냥이 떼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들의 명운이란 분명하니, 대국과 대인에게 일신과 부족을 맡기고자 합니다.”
신립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는, 웃었다.
“조부와 부친이 죽었다는 것이 약탈을 위한 변명이라 생각했는데, 이걸 위한 변명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