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67화
94. 천상의 일 (1)
“연회의 총책은 그대였어.”
영의정 노수신은 이이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명 사신을 위한 공연이었는데도 재인들은 조선어로 말했지.”
“재인들이 어떻게 중국어를 하겠습니까. 책은커녕 한평생 종이 한 장 볼 일도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역관 하나 붙여줄 수는 있었잖나? 전례가 없었던 일도 아니고.”
노수신은 손끝으로 탁자를 찌르며 따졌다.
“내가 극의 내용에 기겁해서 전하께 물어보니 전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 답하시더군!”
하마연이 있기 전 명 사신은 모화관에 머물렀고, 노수신은 사신이 어전에서 왕의 심기를 거스르기 전에 조건을 듣고자 했다.
놈은 논란을 묻는 대가로 터무니없는 조건을 걸었다. 은 삼십만 냥, 재발을 막겠다는 왕의 친서, 대학의 신기술까지.
분명 사신단이 사라진 일은 중차대한 일이다. 그러나 명나라는 조선의 수도에 동창을 심었고, 사라진 사신단도 동창의 연락이 끊어지자 조사차 온 간자나 다름없었다.
하마연에서 광대들은 수하를 의심한 상전의 극을 연기했다. 그리고 하마연은 이이가 준비했다.
과연 이이가 이 일과 무관할까.
“좌상은 전하의 계획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나? 설마 좌의정이나 되어서 간이 배 밖으로 나와 명 사신을 우롱하고 싶었다고 변명하지는 않겠지!”
“이 사람도 놀라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전하께 명을 받았다거나 함께 무언가를 공모한 적은 없어요.”
“그걸 내가 어떻게 믿나?”
“피차 나라와 전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인데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이 사람이 언제 대감 앞에서 말을 아낀 적이 있습니까?”
이이의 말대로 그와 노수신 사이는 각별했다. 왕에 대한 입장은 달라도 이유는 같다. 종묘사직과 백성의 안위를 위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진심을 잘 알았기 때문에 서로 말을 아끼지 않았다. 알게 된 것이 있으면 말해주고, 단독으로 진행할 수 있는 일도 함께 논의했다.
“극의 내용도 이 사람이 검수한 바와는 달랐습니다. 분명 중간에 전하께서 개입하신 것이겠지요.”
“모두 전하께 놀아난 건가.”
“전하께서는 대소신료들에게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싶으셨던 겁니다. 명과 조선은 갈라질 수밖에 없음을요.”
“아무리 사신이 무도한 요구를 해왔더라도 그게 황제의 뜻과 같다고는 할 수 없잖은가?”
“사신은 황제는 아니지만 황제의 대리인으로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이 지경이 되어서 명의 입장을 대변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드르르륵!
미닫이문이 논의를 방해했다. 의정부 대신들은 누가 감히 의정부를 소란스럽게 하는가, 불쾌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승전색이었다.
왕과 승전색 사이를 이어주는 내시다. 그들 사이에서는 신분이 높은 편이나 의정부의 논의를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승전색이 여긴 무슨 일인가.”
“모화관에서 사신과 수행원들이 나눈 말을 기록한 것입니다.”
승전색이 종이 묶음을 건네자 의정부 사인이 받아 노수신 앞에 대령했다.
노수신은 윗장을 들고 내용을 살폈다. 과연 사신이 전날 모화관에서 일행과 나눈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걸 자네가 어째서 가지고 있나?”
“전하께서 소인에게 건네주시며 의정부에 보내라 하셨습니다.”
“그걸 묻는 게 아님을 알 터인데.”
“송구합니다. 소인은 달리 아는 바가 없을뿐더러, 설령 알고 있더라도 입에 담을 수야 있겠습니까.”
노수신은 입맛만 다셨다.
추궁해봐야 말이 나올 기색은 아니었고,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뻔했다. 왕은 모화관을 감청했다.
자신이 사신과 나눈 대화도 기록됐겠지. 조건을 전하기 위해 어전을 찾아가기도 전에 왕은 다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알겠네. 물러나게.”
“예.”
승전색이 예를 표하고 물러나자 우의정 심수경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시 주제에 버릇이 나쁘군요.”
노수신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어쩌냐는 말이냐.
심수경의 하찮은 불만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내시들의 위세가 예전과 달라진 것은 하루 이틀 전의 일도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눈앞의 종이 묶음이다.
사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말을 나누었을까.
-조선이 조건에 응해주겠습니까? 나라의 창고 밑바닥까지 다 긁어모아도 은이 삼십만 냥이나 있지는 않을 텐데요.
-절실하면 고작 은 삼십만 냥이 안 나오겠는가.
-없는 은까지 만들어 내서 바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알아서 잘 할 터이니 자네는 자네 일이나 하게. 일만 성사된다면 궤짝 하나 나눠주지 못할까.
-과욕을 부리다 본전도 못 건질까봐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수행원들도 본국에서 가져온 물건이 안 팔린다고 흉흉한 상태고.
-(침묵)
-알겠습니다. 물러나겠습니다.
명나라 사신은 탐욕스럽기 짝이 없었고, 자신의 몫과는 별개로 조정으로 보내질 은도 떼어먹을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이 삼십만 냥의 은을 지불하느라 나라가 휘청일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과도한 조건을 내걸어 도리어 못 받게 될까 하찮은 걱정이나 할 뿐.
탐욕스럽고 간악하기 짝이 없었으나 노수신이 가장 분노한 부분은 놈들의 대화 자체가 아니었다.
조선 수도에서 한복판인 모화관에서도 조금도 사리지 않고 저들 할 말을 태연히 지껄여대는 사신의 태도였다.
말이 새더라도 무슨 일이 있겠느냐. 놈들이 우리를 털끝이라도 건드릴 수 있겠느냐.
그런 생각이었겠지.
“크흠!”
노수신은 확 치밀어오른 불쾌함에 감청 기록을 내밀었다.
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오만한 사신단은 멋대로 지껄여대며 자신들이 얼마나 죽어도 싼 존재인지 입증했겠지.
이런 놈들이 대가를 받는다고 조정과 황제 설득에 힘썼을까. 절대 아니겠지.
의정부 대신들은 영의정이 밀어낸 감청기록을 나눠 일었고, 이이는 노수신과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기록을 밀어내며 평했다.
“뒤에서는 이럴 것이라 생각은 했습니다만, 직접 두 눈으로 목도하니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군요.”
“그마저도 전하의 계획이겠지.”
노수신은 맞은편을 향해 턱짓했다.
좌우로 나눠 앉은 대신들은 사신단의 태도에 때로는 분통을 터뜨리고 때로는 모욕감에 치를 떨었다.
왕이 먼저 언급하지 않아도 어전에서 개전을 주청할 분위기다.
“승전색이 전해주었으니 다른 사람의 계획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전하의 계획이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전하께 놀아났네. 좌상께서는 개입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되었을 테고.”
“그건 영상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면박을 주려는 투는 아니었다. 담담하게 진실을 말하는 어조다.
과연 이이의 말대로였다.
사신은 조선이 여진과 왜를 정토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자 즉시 돌변하여 땅을 내놓으라 강요했다.
하마연 직전 왕과 면담한 노수신은 고민이 많아진 참이었고, 이런 때 사신이 패악과 억지를 부리자 인내심이 바닥나고 말았다.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며 왕에게 간청할 때는 언제고 노수신은 왕마저 제치고 나서서 사신과 논쟁을 펼쳤다.
하마연은 그렇게 파토났다.
왕은 기다렸다는 듯 숨겨온 칼로 사신단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광대들의 극은 단 위에서만 펼쳐지지 않았다.
“…….”
왕의 계략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록 판을 깐 사람은 왕일지언정, 그가 기대한 대로 움직여준 사람은 명의 사신이었고 노수신이었다.
단지 왕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조선이 영화를 구가하는 한 평화라는 선택지는 없음을.
그리고 반드시 명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결국은 전하께서 옳으셨군.”
“설마.”
우의정 심수경이 탄식을 흘렸다.
“최후의 수단을 주청드리겠다.”
“……!”
“이미 아조에서는 사신단을 한 번 없애 버렸다. 의정부에서는 요동총병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새로운 사신을 받았으나, 그 사신마저 없어졌지.”
그것도 조용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연회가 펼쳐지는 가운데 모조리 칼을 맞고 죽었다.
수많은 사람이 보았고 이 사실이 전해진다면 명나라가 취할 태도는 아직 하나다.
퇴로는 없다.
“명이 전말을 알기 전에 선제공격을 펼치는 것이 유리하다.”
노수신은 좌우를 둘러보고는 일어났다.
“좌우의정께서는 동행하시오.”
이이와 심수경은 불필요한 대답 대신 진중한 얼굴로 함께 일어날 뿐이었다. 세 사람이 의정부를 떠나고 남은 자리에는 무거운 적막만이 남았다.
* * *
의주.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선두로, 장정들의 대오가 끝없이 입성했다.
일군의 위용에 백성들은 진짜 전쟁이 난다며 소란을 떨어댔다. 그 끝에서 의주목사가 예를 올렸다.
“먼 곳까지 행차하시느라 노고 많으셨습니다, 영의정 대감.”
“나는 영의정이 아닐세.”
“……예?”
“도성에서 나오기 전 전하께 사직소를 올렸으니까. 그리고 전하께서는 사직하는 사람을 말리지 않으시지.”
왕은 거듭 전쟁의 필연성을 강조했으나 노수신은 응하지 않았다. 그는 왕이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이제 일의 경과를 보면 누가 억지를 부렸는지는 분명하다.
전쟁의 필연이란 왕이 바라기 때문인지, 세상이 바라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구분은 무의미했다.
어느 쪽이라도 결말은 같을 테니까.
도성에서 한바탕 왕이 펼친 극이 있고서 노수신은 생각했다. 자신을 왕을 모시거나 보필할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박순이 영의정직을 내려놓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군이 강을 넘는 것을 직접 보기 위해 동행한 사람에 불과하네. 진짜 책임자는 이쪽이지.”
노수신은 곁을 바라보았다.
병조판서 이을룡.
큐슈 원정에 이어 도원수로 임명됐다. 그 곁에는 마찬가지로 큐슈에서 복무한 부원수 이억기가 동행하고 있었다.
“인사 올리겠습니다. 소관은 의주목사 서익이라 하옵니다.”
“반갑네. 나는 병조판서이자 원정의 도원수로 임명된 이(李)라고 하네. 이쪽은 부원수인 경수(景受, 이억기의 자).”
“인사드리겠습니다.”
목사 서익이 허리를 숙이자 이억기는 조용히 손만 들었다. 명과의 전쟁이라는 대업을 앞두고 그는 잔뜩 긴장한 채였다.
을룡이 말했다.
“연락은 받았겠지.”
“물론이옵니다. 장정들을 모두 소집하여 강변을 엄중하게 순찰하게 하였습니다.”
도원수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도 목사는 강변을 순찰해왔다.
백성의 입은 한없이 가벼운 법이니까.
사신단이 사라진 일을 직접 전해 받은 요동총병은 조선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을 터.
이럴 때 입이 싼 사람이 넘어가서 조선이 병사를 변경에 모으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큰일나는 수가 있었다.
보아하니 큰일은 나기로 확정되었지만.
“내가 의주는 처음이라 주둔지는 목사께서 마련해주셨으면 하오. 서둘러 떠날 생각이니 너무 공들일 필요는 없고.”
“명 받들겠습니다. 영상 대감과 도원수 이하께서는 안으로 듭시지요. 내아(內衙)는 깔끔하게 비워두었습니다.”
서익이 관아를 향해 팔을 뻗자 을룡은 손을 저었다.
“지휘관이 군을 뜰 수는 없소. 그대는 영의정 대감을 모시시오. 우리는 주둔지에서 병사들과 함께 있을 터이니.”
노수신은 자신도 함께 하고 싶다는 시선을 보냈으나, 을룡은 완고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대감의 결의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하나 대감께서는 군의 일원이 아니십니다.”
“일개 창수로 써줄 수도 없겠나?”
“불가능한 일임을 아시잖습니까.”
노수신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의주 너머는 오롯이 군의 일이어야만 합니다. 소관은 영의정 대감을 존경하지만, 도원수는 오직 명령과 규율만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 그게 맞지. 그래서 전하께서도 도원수를 크게 기용하시는 것일 테고.”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군의 일은 소관에게 맡겨주십시오. 반드시 좋은 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알겠네.”
을룡과 이억기는 예를 표하고서 기수를 돌렸다. 노수신은 서익을 쫓아 관청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