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66화
93. 방점 찍기 (2)
“사신단의 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명나라 사신 진구는 엄중하게 말을 이었다.
“부디 조선 국왕 전하께서는 일의 경중을 가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군사를 일으킬 때 미리 알리지 않고, 또 함부로 여진과 왜를 평정하고도 보고조차 하지 않았습니까?”
“함부로라니요. 듣기 민망합니다. 여진과 왜는 항상 명나라의 안위를 위협하던 간악한 오랑캐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치고 정복했는데 무슨 상관이냐.
“조선에서는 신하가 왕을 위한 일이라며 함부로 군사를 움직여 변경의 적을 치고, 그 땅을 정복하더라도 무방합니까?”
“궤가 다른 일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대명과 조선 사이는 군신관계가 아닙니까? 소인이 보기엔 국왕 전하께서는 문제의 소지를 충분히 인지하시면서도 책임을 회피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해이십니다.”
“오해라면 응당 결백을 증명해야지요! 두만강 이북과 구주에서 철수하세요. 두 지역은 대명 조정에서 논의하여 사람을 파견하든 오랑캐들을 중용하든 알아서 하겠습니다.”
“허어…….”
왕은 곤란하다며 묵은 숨을 토해냈다.
분위기는 냉각될 대로 냉각됐다. 단의 광대들은 언제 물러났는지 사라진 지 오래고, 상석을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진 명나라 사신단과 조선의 대신들은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시선을 모았다.
그리고 바로 왼편에서, 영의정 노수신은 주름지고 마른 손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어떻게든 명나라와 분란 없이 지내고자 갖은 노력을 다하였거늘.
‘어찌하여 저들은 패악이나 부린단 말이냐!’
은을 삼십만 냥이나 요구하고 대학의 신기술에 더해 왕이 자필로 쓴 반성문을 요구한다.
신하로서 왕에게 망신당하는 일을 청한 것만으로도 속이 쓰리거늘 놈들은 그러고도 만족하지 못했다.
조선이 생각보다 잘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군민(君民)이 피땀 흘려 개척한 땅을 강탈하려 했다. 왕의 말이 맞았다.
명나라는 조선이 언제까지고 좁은 반도에서 영원히 갇혀 살기를 원한다. 그것이 과연 대국으로서 할 짓이란 말인가? 졸렬하기 짝이 없다.
아니, 놈들이 졸렬한 것은 동창을 한성에 심었을 때부터 드러났다.
그러고도 동창이 사라지자 간자나 다름없는 사신을 파견해 전말을 알아내려 한 것도, 재차 사신을 파견해 터무니없는 조건을 요구한 것도!
“조선 국왕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용단을 내리지 못하십니까? 진정으로 대국을 향한 충성에 미진함이 있음을 이렇게 입증하려 하십니까!”
사신은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하니 감히 왕에게 재촉하며 면박까지 주었다.
노수신은 참지 않기로 했다.
아니, 참을 수가 없었다.
“대인!”
항상 조곤조곤 말해오던 노수신의 목소리에 엄중한 힘이 실렸다. 가느다란 노구에서 어떻게 그런 무게가 나오는 것일까.
그의 부름에 명나라 사신 진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지금 저에게 언성을 높이셨습니까, 노 공(公)?”
“내 차마 듣자, 듣자 하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렇소! 비록 조선이 의심받을 정황이 있다곤 하나, 명에 위해가 가는 일은 하지 않았거늘 어찌 대국으로서 이리도 핍박한단 말이오!”
“핍박이라니! 조선은 대명의 신하이니 응당 시킨 대로 삼한의 땅이나 다스리면 그만이지, 감히 야욕을 부려 강역을 넓히고 오랑캐들을 밑에 두고도 대명의 은혜가 영원하기를 기대하셨는가!”
“아, 삼한!”
노수신은 코웃음치고는 따졌다.
“고구려도 삼한의 축에 속하는데 어찌하여 대명에서는 아조에 요동을 넘기지 않고 총병을 세워두고서 그 땅을 지배한단 말이오!”
“뭐라!”
“내가 틀린 말 했소?!”
“이놈이!”
진구는 쾅, 하고 상을 때렸다. 충격에 술병이 쓰러지고 안주가 튀었다.
두 사람 사이에 선 왕은 개입조차 없다.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조용히 잔만 기울일 뿐이다. 당연히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처럼.
과연 왕은 이런 미래를 예상하고 있었다.
노수신에게도 친절히 말해주지 않았나. 저들이 조선의 근황을 알게 되면 절대 지금 조건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노수신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명나라의 의심만 거둔다면 최악의 경우는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노수신은 왕과 만나고서 내내 자기 생각이 가능성 있는 계획인지, 희망에 불과한지 고민했다. 그러던 차에 명 사신 진구의 요구와 언행은 고민에 방점을 찍는데 결적적인 도움이 되었다.
“아무리 명나라가 조선의 상국이고 군주의 노릇을 한다지만, 이런 식으로 저열한 핍박과 수작을 거듭한다면 우리도 언제까지고 어울려 줄 생각은 없소!”
“어울려 준다? 하! 그대는 주제파악이 추호도 되질 않는군! 조선은 원컨 원치 않건 대명의 질서에 순종해야 할 거요. 그렇지 않다면 호된 대가를 치를 터이니!”
“지금 아조를 겁박하는 거요!”
“분명한 사실을 전할 뿐!”
진구는 흥, 거칠게 코웃음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왕은 시치미 떼고, 영의정이라는 자가 황제를 대행하는 사신에게 이딴 식으로 나온다면 조선의 입장은 더 보지 않아도 되겠지! 나는 이만 물러나겠소이다!”
진구는 연회상을 넘어 뜰을 가로질렀다. 그 광경에 조선의 대신들은 그저 아연실색할 뿐이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원인은 분명 왕이리라 생각했거늘.
오히려 신중하고 수비적인 태도를 취하고 왕에게도 강요한 노수신이 폭발했다.
명나라 사신단은 정사 진구가 자리를 뜨자 함께 일어나 뒤를 쫓았다. 분위기는 개판이 되었고 자리는 쪽이 났다.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런 중.
“이보시오, 진 대인.”
왕 역시 진구의 뒤를 쫓았다.
그는 조선 왕의 부름에도 멈추지 않고 발길을 재촉했다.
“내 조선의 입장은 잘 알겠으니 국왕 전하께서는 삼가 목욕재계하시고 대명 황제 폐하와 조정의 진노를 기다리시오!”
“하하, 말이 심하십니다. 목을 씻고 기다리는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왕은 바삐 걸어가는 진구의 뒤를 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고자 곱게 타이르는 것일까.
진구는 코웃음 쳤다.
“그리 들으셨다 해도 내가 더 해드릴 말씀은 없을 것 같소이다.”
“하하하. 그렇다면 내 진 대인께서 뜨시기 전에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극이 나올 때는 연기자들이 자신이 연기자임을 잊을 때 나온다고 합니다.”
진구는 바삐 옮기던 발을 멈추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왕을 향해 물었다.
“갑자기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요?”
“이 경우에는 잊은 게 아니라 몰랐다는 것이겠지만요. 이보세요, 진 대인. 나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꾸 헛소리를…….”
진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그는 놀란 표정으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그의 배에서 은백색 칼날이 뽑혀 나왔다.
칼날의 반대편은 왕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리고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방점이지요. 말이 아무리 길어져도, 방점이 찍히면 그걸로 끝이니까요.”
“어어어……?”
진구는 자신의 피로 미지근하게 젖어가는 배를 내려다보더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험하게 돌아가더라도 조선의 법궁에서 칼을 맞을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지난 십수 년 동안 조선의 법궁은 역사 이래 가장 많은 반전이 벌어진 장소였다.
이 일도 그중 하나일 뿐.
“대인!”
굳어있던 사신단 수행원들은 뒤늦게 경악과 함께 저들 한복판에 선 왕에게 달려들었다.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라도 왕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조선의 왕이 어좌를 차지하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몰랐다.
-슈칵!
은백택의 도신은 화등잔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호선이 미려하고 신속하게 그려질 때마다 왕에게 달려들던 자들은 눈이 멀거나 목숨을 잃었다.
“전하를 지켜라!”
대신들도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각자가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가져와 달려들었다.
조선의 법궁에서도 가장 격조 높은 전각인 근정전 앞에서 때 아닌 패싸움이 벌어졌다. 술병이 깨지고 잔은 던져졌다.
대감과 영감 소리를 듣는 자들의 입에서 원색적인 욕설과 저주가 오갔다. 명의 사신단도 시끄럽게 지껄여대기는 매한가지였다.
천박한 난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관리들이 사신단을 묶는 동안 왕의 칼춤이 이어졌고 정전의 뜰이 시뻘겋게 물들 즈음 저항하는 자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저, 전하.”
노수신을 패싸움에는 일단 끼어들었으나 여전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만일 그가 몇 년만 더 나이가 많았다면 심장마비로 쓰러졌으리라.
“옥체는 괜찮으시옵니까?”
“한 손으로 열 손은 못 이긴다지만 칼자루가 쥐었다면 다르지. 나는 아주 괜찮다, 영의정. 간만에 몸 잘 풀었군.”
왕은 환도를 빙빙 돌리고는 내던졌다.
챙그랑.
노수신은 꿀꺽 침을 삼켰다. 왕은 칼을 차지도 않았고 뽑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연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숨겨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어서인가.
일이 어떻게 돌아가건 연회가 끝나기 전에 사신을 베어버릴 생각이어서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게 왕의 계획대로였을 뿐인가.
“경들도 보아 알겠지만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하지만 아쉬워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기를 바란다. 저들이 먼저 우리를 강물에 처넣었으니까.”
“…….”
“살아있는 것들은 상처만 처치하고 금부에 하옥하라. 그리고 죽은 것들은 단에 모아서 불태워라. 야간 연회의 끝은 불장난이 제일이지.”
왕은 볼일 다 봤다는 듯 발을 돌렸다.
감히 그의 앞길을 막는 자는 없었다.
* * *
의주.
조선이 명과 통하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창구에서, 목사는 최근 하루하루를 피 말리는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명의 동태를 경계한다는 이유로 의주에 배치된 병사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예전에는 명나라에 트집이라도 잡힐까 조심스럽기라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았다.
병사들이 성내에서도 공공연히 돌아다녔고 철산(鐵山)에서 수천 명의 병력이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다.
의주는 명나라와 맞닿아 군사적인 중요성은 높아도 병력은 최소한으로 배치됐다. 실질적인 위협이 없는 탓이기도 하나 명나라를 의식해서다.
새 성을 쌓는 일이라면 학부터 떼고 있는 성도 허물라는 놈들이 아닌가.
그런 마당에 의주로 병력이 결집한다는 것은…….
“목사 영감!”
관아의 대문이 요란하게 열리더니 아전 하나가 불이라도 붙은 듯 달려들었다.
“무슨 일이냐?!”
“철산에서 병력이 온다는 게 사실이었습니다. 병력만 오는 게 아닙니다. 영의정 대감께서 직접 행차하셨습니다!”
“뭐라? 영의정 대감께서? 어인 일로!”
“평안병사에 병조판서까지 동행한 걸로 보아.”
아전은 차마 함부로 말하지는 못하고 입을 말았다. 설마. 목사 역시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어 침만 삼켰다.
“대감께서는 별말 없으셨더냐?”
“행차하시는 것만 즉시 확인하고서 달려오느라 사정은 듣지 못했습니다.”
목사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이 맞을 가능성이 9할 9푼 9리다. 설마, 설마 했는데 설마가 사람 잡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