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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65화 (265/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65화

93. 방점 찍기 (1)

“흥미롭군.”

왕이 평했다.

명나라 사신 진구는 사신단 증발의 책임을 은 삼십만 냥과 조선 왕의 자필 반성문, 신기술의 이전을 대가로 걸었다.

그의 조건을 왕에게 전한 영의정 노수신은 입술을 만 채 왕의 결정을 기다렸다.

사신단이 사라진 일이 아무리 중차대한 일이라고는 하나 사신의 조건은 과하다. 게다가 그는 명나라 조정을 설득하리라 확언하지도 않았다.

뇌물만 챙기고서 입을 닦아도 그만이라는 뜻이다.

“경은 사신의 요구를 어떻게 생각하나?”

“신이 영의정이긴 하오나 이만한 일을 어찌 전하께 맡기지 않고 자의로 판단하겠사옵니까.”

“잘 알고 있군. 그럼에도 나는 경의 의향을 불어보는 것이다.”

“과하다 사료되옵니다.”

“무엇이?”

“특히 전하의 친서와 은 삼십만 냥이 그렇사옵니다.”

“말은 값싸지. 나의 친서는 의미가 없다. 은 역시 내수사를 털어보면 삼십만 냥은 나오겠지.”

노수신의 얼굴에 충격이 번졌다.

왕의 사유재산이 그 정도나 된다는 점에서 한 번, 그리고 마치 자신이 대가를 치르겠다는 투의 말에 한 번.

“나는 도성에 뿌리박은 동창을 일소하고 그 일을 조사하러 온 사신도 손을 봐줬다. 인정하지, 품위 있는 방식은 아니었다. 대가를 물어야 한다면 내가 책임지는 것이 맞겠지.”

“나라의 일인데 어찌 전하께서 짊어지시고자 하시옵니까.”

“내가 곧 조선이다.”

왕은 엄중하게 이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경에게 묻고 싶군. 만일 아조가 세작을 파견하여 북경에 소굴을 만들었다가, 그것이 없어져 사신을 보내 조사케 하였는데 사신마저 없어졌다면 과연 명에 사신과 동일한 조건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없을 것이옵니다.”

“나라 사이에는 우열이 있고 약자는 약하다는 것만으로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만일 명이 아조를 절대 꺾을 수 없음을 안다면, 그와 같은 조건을 걸지는 않았겠지.”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하오나.”

“사신의 조건을 명분 삼아 전쟁을 일으키자 말하는 게 아니다.”

“하오시면.”

“사신은 아조가 여진족과 왜를 정토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것 같더군.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

명나라는 국초부터 조선이 여진족과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조선 왕을 상대로 직접 질책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나아가 임진왜란에서는 조선이 왜에게 파죽지세로 밀리자 조선이 왜와 공조하여 명나라를 침공하려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했다.

경이로울 정도로 한심한 꼴이긴 했으나 명나라의 태도는 그들이 조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조선이 순응은 하나 명나라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지 않으며 언제든지 다른 오랑캐들과 협력하여 명을 침공할 수 있는 나라로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의 조선은 명나라의 우려를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상태다.

“내가 진 태감이라면 조선의 발전을 아주 우려할 것이다.”

“사신단이 사라진 일과 겹쳤으니 다소 우려가 강해질 수는 있겠으나, 잘 마무리된다면 아조는 명의 의심을 벗어날 수 있사옵니다.”

“사신단의 일은 문장의 방점과 같지. 동창이 사라진 일도 마찬가지다. 방점만으로는 문장을 완성할 수 없어. 하지만 문장은 방점 없이도 완성된다.”

왕이 덧붙였다.

“확약도 없이 사신단이 증발한 일의 대가가 은 삼십만 냥에 나의 반성문과 재물로는 사지 못할 신기술을 요구했다면, 동창의 지부가 사라진 것과 조선의 강역이 여진족과 왜에게로 뻗어간 것의 대가로는 무엇을 바랄까?”

“신은 명과의 전쟁이라는 최악의 경우를 피하고 싶을 뿐이옵니다.”

“아니. 최악의 경우는 대가를 지불하고도 명에 구속당하는 것이다. 놈들이 아조의 발전을 막으며 내가 이룩한 모든 성과를 빼앗아 간 다음에는, 지난 이백 년처럼 일방적인 상하 관계가 앞으로도 이어지겠지.”

“…….”

“삶은 위기를 극복하기 직전이 가장 고통스러운 법이며 이는 나라라고 다르지 않다. 사신의 조건에 응함으로서 지불하는 대가는 고작 은 삼십만 냥이 아니다. 경은 평화의 대가로 무엇을 내놓고자 하는지 잘 고심하길 바란다.”

“……예.”

노수신이 침통한 표정을 하고서 집무실을 나서자, 왕이 밖을 향해 일렀다.

“상선.”

“부르셨사옵니까.”

“들어오라.”

“예.”

-드르륵.

문 여닫는 소리가 짧게 났다. 상선 김기문은 어좌를 향해 예를 표했다.

“하문하시옵소서.”

“모화관의 감시는 차질 없겠지.”

“예. 이미 태감과 영의정이 나눈 대화는 물론, 수행원들이 숙소에서 나눈 말조차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사옵니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귀가 발밑에도 있을 줄은 모를 것이다. 하지만 조심하라. 그들이 트집 잡을 구석을 줘서는 아니 된다.”

“일의 경중에 대해서는 다들 충분히 주지시켰으니 염려치 마시옵소서.”

“태감의 거동은 어떠한가.”

“사신단 수행원 몇 명이 조선식으로 변장해 모화관을 몰래 빠져나갔습니다. 아조의 근황은 물론 사라진 동창의 행방을 조사하기 위함으로 사료되옵니다.”

“곧 사신의 태도가 달라지겠군.”

오늘 그가 입성하면서 본 것들, 전 사신단이 실종된 일은 조선이라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들이 조심스럽게 수면 아래를 더듬으며 이 나라의 현재와 비밀을 조금이나 알게 된다면 곧 사신단이 사라진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질 터다.

“간자들의 행동거지를 면밀히 관찰하고 기록하라. 문제가 발생한다면 최후의 수단을 써도 무방하다.”

“알겠사옵니다.”

당일 밤.

근정전 앞 드넓은 뜰에 하마연아 열렸다. 가장자리에는 색색의 장막을 펼쳤고 중앙에는 단을 세워 광대와 기생들이 재주를 부리게 했다.

근정전 쪽에 마련된 상석에는 조선왕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태감 진구와 서열 높은 사신단 일행이, 왼편에는 영의정 이하 대신들이 자리했다.

“마음에 드십니까.”

왕의 물음에 진구가 답했다.

“들다 뿐이겠습니까. 조선의 법궁에 초청되어 호사를 누리니 일신과 가문의 영광입니다.”

“진 대인께서 한성까지 오시느라 많이 피곤하셨을 터인데, 너무 일찍 하마연을 연 게 아니었으면 좋겠군요.”

“모화관에서 반나절을 꼬박 쉬면서 피로는 떨쳐낸 지 오래입니다.”

진구의 겸양에 왕은 미소로 답했다. 말과는 달리 진구는 모화관에서 거의 쉬지 않았다. 그러고도 내색하지 않으니 태감은 태감이다.

“모화관에 영의정이 방문했는데 소식 들으셨습니까?”

“물론입니다. 혹시나 영의정이 대인의 휴식을 방해하지는 않았는지 걱정되는군요.”

“아닙니다. 지금은 제가 대국을 대변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받아주어야지요.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들으셨습니까?”

왕과 사신 사이에 진중한 대화가 오가자 옆의 노수신은 혹시나 돌발사건이 벌어질까, 귀를 기울였다.

자신의 전언에 왕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사신단 하나를 통째로 없애버린 그였고 처음조차 어렵지 않았던 그에게 두 번이 어려울 리 없었다.

그러니 귀를 기울이더라도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는 무슨 상관이 있겠냐만.

노수신은 일단 말을 줄였다.

왕이 답했다.

“왕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폐하께 심려를 끼치고 사신을 바쁘게 만들었으니, 이 사람의 죄가 큽니다.”

“죄라니요. 불미스러운 일일 뿐입니다. 대국의 조정은 깊은 우려를 표하고는 있으나, 제가 조선의 진심과 성의를 전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결국에는 삼십만 냥을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물론 말을 잘 전해주기 위해서는 사신에게도 성의를 표현해야겠지.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위안이나 진의는 한없이 노골적이었다.

“안 그래도 이 사람은 대국에 아조의 무고함을 어떻게 알릴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대인께서 쉬운 길을 알려주시니 다행입니다.”

“하하하.”

“하하.”

두 사람의 허울뿐인 대화가 끝나자 맞은편 단에서 광대들이 공연을 시작했다.

탈을 쓴 광대들은 연기를 곁들여 만담을 주고 받았다. 극이 제법 물오르자 관리들을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잊고서 관람에 집중했다.

그동안 사신단 측에서는 지위 높은 수행원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진구의 곁으로 다가갔다.

진구는 수행원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바로 옆의 왕과 조선측 관리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극에 집중하느라 이쪽에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주변을 확인한 진구는 수행원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수행원은 가까이 다가가 무어라 속삭였다.

보고가 이어질 동안 진구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미미했으나 조금씩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는지 노골적인 인상이 지어졌다.

-대감, 소인은 쥐새끼 같은 녀석들이 몰래 말을 엿들길래 혼 한 번 내주었을 뿐인데 어찌하여 죄를 물으십니까.

단의 선비 광대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주인인 대감 광대가 과장된 몸짓으로 노성을 토해냈다.

-이놈아, 네가 쥐새끼라고 잡은 것들은 나의 사람인데 어찌 분별없이 혼을 내었느냐? 너는 나의 사람을 다치게 하였으니 벌을 받음이 마땅하지 않느냐!

-아이고, 대감. 소인을 믿지 못하시면 말이나 해보실 것이지 왜 감시부터 하시고는 책임을 무십니까? 인의가 있다면 이러지는 못할 것입니다!

극의 내용에 노수신은 찔리는 구석이 있이 왕 너머의 진구를 확인했다.

그의 곁에는 수행원이 있었는데, 그가 무어라 속삭이자 진구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혹시 극의 내용을 번역이라도 해주는 것일까. 노수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법이라지만 사신은 그냥 도둑이 아니라 덩치 크고 힘도 센 상전 도둑이다.

“저, 전하…….”

노수신이 극을 멈춰달라고 왕에게 조심스럽게 속삭이자, 왕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러더니 여전히 앞을 바라본 채로 조용히 말했다.

“지금 저놈이 사신에게 아조가 여진족과 열도를 정복한 일을 알려주고 있구나.”

극의 내용을 통역해 주는 게 아니었나. 노수신은 순간 안도했으나 금방 입술을 말았다.

진구가 표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는 아조의 근황을 들어서다. 그것의 의미가 좋을 수는 없다.

“사신단과 동창이 사라진 일은, 배후가 명확하지 않은 한 단지 사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선이 강대한 군사력을 이끌고 오랑캐들을 정복하며 강역을 넓힌 것은 사건이 아니지.”

사고라는 표현이 가깝겠지.

왕은 그제야 노수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동창과 사신단을 손봐준 것이 섣부른 일이며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조선이 오랑캐들을 정복한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경은 이 나라가 망할 때까지 좁은 반도에 갇혀 쥐죽은 듯 삼류 약소국가로 지내야 했다고 생각하나?”

“아니옵니다…….”

“내가 장담하지. 이제 저들은 동창은 물론 사신단의 일마저 거론하지 않을 걸세. 설령 그러더라도, 그게 본의는 아니겠지.”

왕은 씩 미소를 지어주고는 노수신이 채 만류할 새도 없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구가 있는 방향이다.

“대인께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자리가 심심할까 극을 마련했으나 광대들이 무지하여 대국의 언어를 모르니 대인께는 귀만 번거롭게 했겠군요.”

“아닙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밌었습니다.”

“그래요? 다행입니다.”

왕은 한 숨 돌렸다는 듯 가볍게 웃었으나 진구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말을 가리지도 않았다.

“조선이 여진과 왜를 정토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변방이 시끄러워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대국에서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번국이 되어서 군사가 움직이는 일을 알리지도 않으며, 나아가 오랑캐들을 신민으로 삼았단 말입니까?”

“대국은 대국의 사정으로 바쁠 터인데 번국이 오랑캐들 따위와 어울리는 일로 번거롭게 해드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응당 경과라도 알려주셨어야지요.”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사신단의 일로 정신이 워낙 없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왕의 말에 진구가 엄중한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사신단의 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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