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64화
92. 거래 (2)
명나라 사신단의 수행원들은 가져온 물건이 팔리지 않자 수군수군 불만을 토해냈다.
그러던 중 반백의 장년이 진중한 목소리로 평가했다.
“어쩌면 조선 것들이 담합을 하는지도 모르겠군.”
이에 가까이 있던 수행원이 답했다.
“변방 것들이 간악한 수작을 부리는군요.”
“아마 밤이 되면 한두 놈쯤은 몰래 접근해오겠지. 그렇게 조금씩 팔리다 보면 언젠가 봇물이 터질 터이니,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게.”
반백인의 말에 수행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반백인이 한 말은 그럴듯한 추측이 아니라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는 것을.
조선은 조지서와 인쇄소가 하루도 멈추는 날이 없어 발에 치이는 것이 책이었고, 거기에는 큐슈에서 수입해온 서양의 도서와 대학에서 출간한 최신 논문집도 포함되어 있었다.
드넓은 세계에서 실시간으로 도태되면서도 중화 제일주의에 사로잡힌 명나라의 도서들은 한여름에 방치된 쉰밥 냄새의 시각적 구현에 불과했다.
수행원들이 가져온 비단 역시 경쟁력 있는 상품은 아니었다.
명나라산 최고급 비단이라면 수요가 있었겠지만, 그들이 가져온 것은 중하품 수준의 애매하기 짝이 없는 비단이었다.
과거의 조선은 이런 비단에도 눈이 돌아갔으니 적당한 것을 골라 가져왔겠으나, 조선의 상업은 그동안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상인들의 눈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들은 국내 비단 산지에서도 구할 수 있는 수준을 명나라산이라는 이유로 눈탱이 맞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사행이 끝날쯤에는 모두 가져온 물건을 내려놓고서 금은을 한 아름 챙겨서 갈 텐지.”
반백인이 신나서 해대는 말들은 하나하나가 망신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수행원들이 잘못된 판단을 하고서 여전히 높은 콧대를 고수하는 동안, 관심을 주었던 몇 안 되는 사람들마저 모화관을 떠났다.
곧 수행원들은 마치 파리만 날리는 상점의 주인들처럼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각자 가기 바쁜 행인들만 멍청하니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반백인의 호언장담이 어쩌면 아주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절한 후회였지만 대명국의 물산이 변방에서 외면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서로 눈치를 보는 중이라 먼저 나서서 물건을 염가로 처분하기도 썩 부담스러웠다.
그러던 중.
“여, 영의정 아니십니까.”
조선국 영의정 노(盧)가 등장했다. 태감과 나누고 싶은 말이 있다던가.
수행원들에게는 노와 태감 사이에 오갈 이야기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명나라에서 가져온 희귀한 서책과 품질 좋은 비단이 있습니다. 조선을 위해 일하심은 곧 명을 위한 봉사이니 특별한 가격으로 모시겠습니다.”
입으로 나온 말은 정중이었으나 단어의 선택은 그렇지 못했다. 대명은 세상의 중심이며 조선은 대명의 질서에 순종하는 번국이다. 그들에게 이 정도 표현은 깔보는 축에 들지도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의정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사신단 수행원의 언동이 불쾌해서는 아니다.
“진 대인과 시급한 약조가 있으니 물품을 둘러볼 처지가 되지 못하오. 선약이 일찍 마무리되면 돌아와서 천천히 보겠소이다.”
수행원들 따위가 진 태감의 일정을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
“······예.”
그들은 실망스러운 투로 영의정을 떠나보냈다. 그리고 이전처럼, 모화관을 지나치는 행인들을 향해 물건 한 번 봐달라는 간절한 눈빛이나 여기저기 보낼 뿐이었다.
그동안 영의정 노수신은 모화관에 입성했다.
거의 유일하다시피 하며 가장 중요한 외교 상대인 명나라 사신의 숙소답게, 모화관은 크고 화려했으며 양식도 중국풍에 가까웠다.
드넓은 뜰에는 잔디와 박석, 석등이 깔렸으며 그럴싸한 위치마다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복층 누각 너머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연못도 있었다.
물론 연못에도 정자가 있다.
소중국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노수신은 아전들의 안내를 받아 진 태감을 찾았다.
“노 모(某, 아무개)입니다.”
노수신 겸손하게 인사를 올리자 태감 진구가 안쪽에서 답했다.
“들어오시오.”
열어놓은 정면과 좌우 문으로 주변의 경치 좋은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진구는 중앙에 탁자를 끼고서 앉아 있었다.
그는 맞은편 의자를 향해 팔을 뻗었다.
“감사합니다.”
노수신은 짧게 예를 표하고 의자를 빼내 앉았다.
“대인께서는 어떤 종류의 차를 선호하십니까? 물론 술도 괜찮습니다.”
“차종은 가리지 않고 뜨거운 물에 푹 끓여서.”
고상한 음다법은 아니었으나 이해는 가능한 주문이다. 진구는 사례감의 태감이라는 지극한 자리에 올랐으나 부친은 평범한 촌부였다.
노수신은 곁의 아전에게 들었냐는 듯 시선을 보냈다. 아전은 허리를 숙이고서 예를 표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가 물러나자 진구가 운을 뗐다.
“하마연은 아직인데 무슨 볼일이 있어서 직접 나를 찾으셨소이까?”
“진 대인께서는 이미 많이 들으셨을 터라 다시 드리기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조정의 대소신료들 모두 장 태감의 행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노 공은 영의정으로서 조선 국왕 전하를 바로 아래에서 보필하는 직무를 맡은 사람인데, 어떻게 대국의 사신이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는 말을 태연히도 하시오.”
“부끄러울 뿐입니다.”
“고작 이런 말이나 하려고 찾아온 게 아니리라 믿겠소.”
노수신은 가볍게 침음하여 목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조선 관리들이 무능한 탓으로 대국 사신의 행방을 모르니, 죄스러운 마음도 지극하나 대국에 오해를 살까 매우 두렵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하오.”
“결백을 입증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해드리고자 합니다.”
“흐음······. 원접사도 비슷한 말을 하던데.”
“그만큼 대소신료가 이 일에 대해서 지극히 반성하며 진지한 태도로 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해드릴 수 있소?”
무엇을 해달라 직설적으로 청하기는 민망하다. 대국 사신으로서 체면도 살지 않거니와, 조선이 얼마나 여유 있고 절박한지도 몰랐으니까.
다만 분명한 점이 하나 있다면 조선에서 얻어낼 것이 작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다.
사신단이 증발한 일은 황제가 직접 조선의 왕을 추궁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은 이유는 오직 폐하가 칩거 상태이기 때문일 뿐.
명 조정이 상황을 과소평가해서는 아니었다.
“대인께서 변방까지 힘들게 행차하셨으니, 그 노고를 위로해드리는 게 먼저라 생각합니다.”
“좋소. 나를 배려해준다니 고맙지만 중요한 건 내가 본국으로 돌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냐는 거요.”
“재물이라면 관리들이 십시일반 하는 일이 있더라도 어떻게든지 마련하겠으나, 재화로써 사신의 행방을 덮으려 한다는 오해를 살까 두렵습니다.”
진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재화를 받지 않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밖에서 알렸다.
“차를 들여도 되겠습니까.”
“들이게.”
자리의 주인인 진구의 허락에 아전이 다가와 다구를 내려놓았다.
“주문하신 대로 찻잎을 뜨거운 물에 끓였습니다. 사족이겠으나 산지와 차종은 북직예 은침입니다.”
북직예는 진구의 고향. 이국으로 와 향수에 젖어 태감답지 않은 격식을 주문하는 그에게 고향의 차는 썩 적절한 선택이다.
노수신은 즐비한 명차를 두고 일부러 북직예산 차를 가져온 아전에게 묵례했다. 과연 모화관에 배치될 정도로 아주 눈치가 좋은 자다.
맞은편에서 진구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건 유리로군.”
그의 시선은 자사호를 향해 있었다.
찻잔에 앞서 찻물을 먼저 받는 도구다. 자기로 만들어진 여러 도구 사이에서 저 혼자 유리였다.
“예. 차를 담을 때 본연의 색상을 즐길 수 있습니다. 격식에 맞지 않아 불편하시다면 자기로 바꾸겠습니다.”
“아니오······. 그대로 두시오.”
대국 명에서도 유리는 귀한 축에 속했다.
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수도인 남경에 스물다섯 장 높이의 유리 탑을 세울 정도였지만, 나라가 쇠락하면서 황실에 배속되었던 유리 가마들이 폐쇄되고 장인의 명맥도 거의 끊긴 탓이다.
‘하나 정도는 기념품으로 달라고 해도 되겠지.’
이토록 투명하고 형태가 일정한 유리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차 본연의 색상을 즐기기 위함이라는 목적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아전이 차를 따라주자 익숙한 맛이 혀끝에서 느껴졌다.
직예의 민물은 석회수라 차를 끓이지 않으면 족히 마실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일개 촌부에 지나지 않았던 아버지는 다도와는 거리가 먼 존재였고, 찻잎 조금 떼어다 물에 넣고 끓이는 게 차를 준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옛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워질 때면 야만스러운 음다법을 찾곤 했으나, 태감을 모시느라 예법이 몸에 밴 시종이나 귀한 집에서 금지옥엽 자라 밤일 못 하는 남자에게 시집온 아내, 그리고 팔자 좋게 자란 양자는 가장의 천박한 소망을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는 눈치 볼 사람이 없다.
“후······.”
진구는 잔을 내려놓고는 썩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좋소. 공(公)께서 직접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면 내 자사호와 북직예의 차 맛을 보아서라도 먼저 제안을 드리겠소이다.”
“감사할 뿐입니다.”
노수신은 사신에게 유리 자사호를 줘야겠다 생각하며 귀를 기울였다.
“조선이 은 삼십만 냥과 함께 국왕이 자필로 동일한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확약하는 글을 써서 바친다면 내 폐하께 사신단이 사라진 일은 조선의 책임이 아니라고 설득은 해보겠소이다.”
설득하겠다, 도 아니고 시도해 본단다. 그러니 결과는 미지수건만 무려 삼십만 냥이라는 초월적인 양의 은과 국왕이 직접 쓴 반성문을 대가로 내놓으란다.
상직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부담스러운 조건이다.
그러나 진구는 한 번 입을 연 김에 말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또한 내가 직접 보았던 기구와 붕새의 도안에 대해서도 알려주었으면 하오. 쓸모는 없겠으나 변방의 잡기라도 알고 있으면 득은 몰라도 해는 안 되겠지.”
대학에서 일궈낸 신기술까지.
진구의 말은 조선을 거덜내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사신단이 증발한 사태의 무게는 가볍지 않으나 대가는 너무나 무겁다.
노수신은 실용적인 가치가 미미한 은과 나눠줘도 사라지지 않는 기술은 전쟁을 방지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의 권한이 아니었다.
결정은 왕이 할 일이다.
노수신은 생각했다.
과연 왕이 이 조건을 받아줄 수 있을까.
잠시 후.
왕이 평했다.
“흥미롭군.”
명나라 사신 진구는 사신단 증발의 책임을 은 삼십만 냥과 조선 왕의 자필 반성문, 신기술의 이전을 대가로 걸었다.
그의 조건을 왕에게 전한 영의정 노수신은 입술을 만 채 왕의 결정을 기다렸다.
사신단이 사라진 일이 아무리 중차대한 일이라고는 하나 사신의 조건은 과하다. 게다가 그는 명나라 조정을 설득하리라 확언하지도 않았다.
뇌물만 챙기고서 입을 닦아도 그만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