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63화
92. 거래 (1)
“조선이 많이 달라졌다는 말을 접하긴 했으나.”
명나라 사신 진구는 한성의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가진 게 없는 대제국 명나라의 수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고작 변방 국가의 수도 따위에 놀라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는 했으나…….
한성의 광경은 사소한 것들은 차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무엇으로 지은 거요?”
진구는 칙칙한 색상을 가진 대로변의 건물을 가리켰다. 층만 3층이 기본에 4층짜리도 있었으니 꼭대기를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들어야 할 정도였다.
반대로 안의 사람들은 사신단을 보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감히 대국의 태감이 사신을 내려다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호기심만 해결되어 준다면 변방 국가 백성들의 무지함은 이해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이에 원접사 류성룡이 답했다.
“만능분입니다.”
“만능분?”
“거창하게 들리실지 모르나, 이름대로 용도가 다양하니 만능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습니다. 과거 건물을 복층을 세우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었고 삼층이나 사층은 상상조차 못했으나, 만능분 덕분에 실현하게 되었지요.”
자연물은 아무리 잘 가공하고 기술적으로 이용하더라도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
만능분은 그 한계를 단숨에 돌파해 조선의 건축술을 새로운 경지로 이끌었다.
“흐음.”
진구는 손을 뻗어 칙칙한 건물의 벽을 쓸어내렸다. 약간 까끌까끌한 촉감과 함께 돌과 같은 단단함과 둔중함이 느껴졌다.
언제 이런 것을 본 적이 있던가.
“요긴하게 쓰이겠군.”
오랑캐들도 각자의 신변잡기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만능분에 대해서는 조정에 건의해 볼 가치가 있었다.
진구는 조정으로 돌아가 할 말이 하나 더 생김에 만족하며 발길을 옮기려는 순간.
눈앞의 거리가 잠깐 어두워지더니 다시 밝아지는 게 아닌가.
하늘에 유난히 두꺼운 구름이 한 점 걸렸나 싶어 다시 고개를 드니, 구 형태의 정체불명의 것이 하늘에 떠다니지 않겠나.
“저, 저건?!”
진구는 대국 사신의 체면도 잊어버리고 벌러덩 넘어졌다. 커다란 덩어리가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줄 알았으니까.
어떻게 물건이 허공에 떠 있단 말인가.
하지만 눈앞의 덩어리는 정면으로 상식을 부숴버렸다. 그것은 진구가 놀라건 말건 유유자적하게 떠다닐 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류성룡이 팔을 내밀었다.
진구는 민망한 마음에 서둘러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주변 사람들은 태평한데 자기 혼자 꼴값이라니, 낙후된 변방국에서 처음으로 대명 수도를 방문한 놈도 아니고.
자신은 그 대명 수도에서 사신으로 파견되어 낙후된 변방국을 방문한 사람이었다. 황제를 대행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매사에 냉정하고 진중하게 대처해야 했다.
그래야 하는데…….
“붕새다!”
진구는 하늘을 가리키며 경악했다.
커다란 새가 떠다니는 구를 추격하고 있었다!
“아시는군요.”
“뭐라? 저것이 진정…… 붕새란 말인가?”
붕(鵬)은 장자에 나오는 새로, 수천 리의 날개를 가지고서 9만 리 하늘을 난다고 했다.
옛사람의 기록이라 과장이 심했던 모양이다. 눈앞의 새는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한평생 살아오며 무수히 보아온 새 중에서는 가장 컸다.
변방에서 이따금 포획되어 박제되는 사람만한 독수리보다 배의 배는 컸다. 어쩌면 하늘에 멀리 떠 있어서 실제로는 그보다 더 클 수도 있으리라.
“붕새가 실존했다니!”
진구는 놀라움과 허망함으로 탄식했다.
중원은 장자가 나온 송나라 이래 족히 천 년 동안 붕의 존재를 보지 못했고, 모두가 상상속의 존재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학자들은 붕을 추상적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틀렸다. 붕은 실존했다.
“대국이 아닌 변방에 붕새가 있을 줄이야.”
진구가 탄식하자 류성룡은 잠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올렸다.
“저것의 이름이 붕새는 맞으나 진짜 붕새는 아닙니다.”
“아니라고?”
“앞선 둥그런 물체는 기구라고 하는데, 하늘 높이 띄워서 기상을 관측하는데 씁니다. 붕새는 기구에 매달아 새가 하늘을 나는 원리를 연구하는 데 쓰이지요.”
“아……. 크흠.”
대국의 사신으로서 매사에 냉정하겠다고 결심한 지가 언제인데 고작 모형으로 호들갑을 떨었다니.
진구는 차마 철면피를 깔 수 없어 입술만 핥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대국에서는 이런 해괴망측한 장난질은 벌이지 않으니, 앞으로 내가 놀랄 일이 있다면 미리 말해주시오. 나를 부끄럽게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송구합니다, 대인.”
류성룡은 사죄와 함께 허리를 숙였으나 진구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고작 장난질로 치부했으나 내심 원리가 궁금했다. 하늘에 떠다닐 수 있는 건 날개 달린 금수만의 특권이 아닌가?
일개 변방 국가에 불과한 조선이 대자연의 생리를 거스르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니. 불궤한 일이었으나 부럽다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아주 조금.
진구는 또 무슨 수모를 겪을까 싶어 발길을 재촉했다.
머지않아 영은문의 지붕이 보이더니, 그 아래 대로와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대국을 사신을 맞을 때는 국왕이 직접 영은문에서 미리 기다리다 맞는 것이 상례.
과연 인파 속에는 곤룡포를 입은 사내가 있었다.
얌전히 정무만 보는 성격은 아닌지 체격이 남달랐다. 왕위를 차지하기 전에는 변방의 전쟁에서 몇 번이나 기병대를 선두에서 이끌었다던가.
과연 그런 역사가 어울리는 자였다.
진구는 조선 국왕 앞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소인, 사례감 태감 진구라 합니다. 조선 국왕 전하를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자 조선왕도 허리를 숙여 맞절했다.
“조선 국왕 이(李)입니다. 사례감 태감 진 대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짧게 인사가 오가자 조선왕이 덧붙였다.
“북경부터 한성까지 오시느라 노고 많으셨습니다. 먼저 모화관에서 회포를 풀고 계시지요. 석반에 하마연(下馬宴)을 준비하여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하마연(下馬宴)은 명나라 사신이 도성에 방문했을 때 시행되는 연회다. 이름대로 사신단이 말에서 내린 것을 기념하는 절차다.
반대로,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말에 오를 때도 상마연(上馬宴)이라 하여 연회로 기념한다.
“알겠습니다.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진구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자 하급 관리로 보이는 자가 나서서 모화관을 향해 팔을 뻗었다.
“따라오시겠습니까. 모화관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좋다.”
그렇게 명나라 사신단이 모화관의 솟을대문을 넘어 사라지자, 조용히 인사만 올렸던 영의정 노수신이 입을 열었다.
“망극하옵나이다.”
“날 믿지 못했단 말인가.”
“노신이 우매하여 일말이나마 남은 의심까지 차마 다 거두지는 못하였는데, 성상 전하께오서 규례대로 사신을 맞아주시니 이제는 한 치의 의심도 없나이다.”
“빈말은.”
왕은 가볍게 웃고는 류성룡에게 말했다.
“원접사로서 사신을 맞느라 노고가 많았네. 마음 같아서는 충분히 쉬게 해주고 싶지만, 그렇게 해주지 못해 미안하군.”
“아니옵나이다.”
“다들 잠깐 숨만 돌리고 한 식경 뒤에 정전에서 보세.”
“예.”
왕이 먼저 발을 돌렸고 신하들은 회포를 나누었다. 혹시라도 왕이 사신의 면전에서 행패를 부릴까 내심 걱정한 사람이 많았다.
그동안 노수신은 류성룡을 맞았다.
“고생했네.”
“아닙니다.”
“어떻던가?”
“사신을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송구한 말씀이나 그는 사명감이 적지 않습니다.”
류성룡의 대답이 노수신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사신단이 통째로 증발했다.
사신으로나 사례감 태감으로나 후임이 된 진구는 당연히 선임의 행방에 대해 알아내야겠지.
“사명감에 부응해 줄 수 없어 미안하게 됐군.”
전 사신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오직 왕뿐이니까.
류성룡이 말했다.
“우리도 아는 게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지, 입국 때 보여 준 의심과 경계는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마음을 접은 건 아니겠지.”
“예. 배후가 있다며 조선일 수밖에 없지요.”
사실이 그렇습니다만. 류성룡은 누가 들을세라 모기소리로 속삭이고는 덧붙였다.
“일을 무마하는 대가로 과중한 조건을 내밀지는 않않을까 우려됩니다.”
사신 개인에게는 물론 명 조정에도.
“부디 전하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그가 어전에 나오기 전에 먼저 접촉해서 조율하는 게 옳아 보입니다.”
류성룡의 제안에 노수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명나라 사신이 무리한 조건을 강요하며, 대국의 사신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강제하려 든다면 왕은 견디지 못할 테다.
이미 명과의 일전이라는 가능성을 각오한 그에게 명의 권위란 굴복의 대상이 아니라 꺾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니까.
지금은 왕이 평범한 척하고 있으나 그게 본성이 아님은 모두가 안다. 그가 성질을 죽이는 이유는 두 말 나오지 않도록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한 번 마음을 돌리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는 이미 총신인 병조판서 이을룡을 통해 국경에 첨병을 배치한 상태다. 병판은 명의 동태를 감시하여 만일을 대비하기 위함이라지만, 그는 왕명만 떨어지면 일고도 없이 첨병에게 진격을 명하겠지.
“예판께서 태감에게 나의 방문 의향을 전해주게. 하마연이 있기 전에 말을 한 번 나눠보고 싶다고.”
“알겠습니다.”
* * *
명나라 사신단이 모화관에 들어서면, 주변에는 시장이 생겨난다.
조선의 수행원들이 사신을 호종하는 것보다는 장사라는 젯밥에 관심이 더 많듯 명나라 사신단의 수행원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모화관 주변으로 수행원들은 각자가 가져온 물건을 펼쳐놓고 행인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었다.
조선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품목은 도서와 비단이다. 지식욕이 큰 조선의 사대부들은 희귀한 대명의 도서라면 거금이라도 기꺼이 쾌척했고, 비단은 전통적인 고가치 무역품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이상했다.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많았으나 수행원들이 값을 부르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으니까.
주변에서 함께 상품의 가격을 들은 구경꾼들도 덩달아 흩어졌다. 말장난이 도가 넘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조선 놈들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책과 비단을 외면하는 건가?”
오늘 장사 일진이 영 좋지 않은 역관이 동료에게 물었다.
“그러게 말이네. 내가 저번에 조선을 다녀왔을 때만 해도 서로 더 높은 값을 부르지 못해서 안달이었는데.”
“제기랄. 이래서야 본전은커녕 물건값도 못 받겠군!”
수행원들은 웅성거리며 조선인들의 외면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러던 중 반백의 연로한 자가 진중한 목소리로 나섰다.
“어쩌면 조선 것들이 담합을 하는지도 모르겠군.”
“담합이라니요?”
“그동안 물건을 비싸게 사 왔으니, 이번에는 입을 맞춰 관심이 없는 척하기로 한 걸세. 우리가 안달이 나서 물건값을 낮추려는 얄팍한 수작이지.”
반백인의 말에 수행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성의 사람들 모두가 입을 맞췄다는 건 무리가 있는 추측이었으나,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벌어진 일을 해석할 방도가 없었다.
“변방 것들이 간악한 수작을 부리는군요.”
“아마 밤이 되면 한두 놈쯤은 몰래 접근해 오겠지. 그렇게 조금씩 팔리다 보면 언젠가 봇물이 터질 터이니,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게.”
반백인의 말에 수행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반백인이 한 말은 그럴듯한 추측이 아니라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