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왜 이순신이죠-262화 (262/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62화

91. 보전하는 자 (3)

허준은 절개부를 봉합한 실을 정리하곤 물러났다. 수술을 보조하는 의원이 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었다. 함박 젖은 수건이 더 젖었다.

수술은 성공했다.

파열 부위가 뼈와 가깝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어 붙일 인대 조각이 부족할 경우 뼈에 구멍을 내서 고정하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환자가 이송되자 허준은 입을 막은 천을 내리고 말했다.

“회전근개 파열은 이렇게 수술하는 것이다.”

서양의 해부서가 도입되면서 조선의 의술은 진일보를 이루었다.

특히 외과 분야는 눈이 부실 정도의 발전을 이뤘다.

고인의 시신을 해체해 연구한다는 해부는 상상조차 못 한 짓이었는데, 야만적인 서양인들이 대신 문제를 해결해 준 덕이다.

“다들 머리에 철저하게 새겼는가.”

허준이 주변의 의원들에게 묻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영영 팔 병신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의 어깨를 째서 너덜거리는 근육 조직을 봉합하는 과정은 숨 쉬는 것조차 잠시 잊게 만들 정도였다.

다들 당연히 눈과 머리에 철저히 새겨질 수밖에 없다. 각골명심이 따로 있겠는가.

“인대의 파열은 대체로 이렇게 치료할 수 있으나 파열 부위나 상태에 따라 유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록은 정확히 했겠지?”

허준의 물음에 참관한 화공이 수술 과정이 그려진 책을 펼쳐 보였다.

서둘러 기록하느라 다소 어설픈 구석이 있었지만 충분히 보충할 수 있을 거다.

화공 역시 수술 과정을 수월하게 기록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의학 지식은 교육을 받았으니까.

“좋아. 다들 물러가라.”

허준은 수술이 끝났음을 선포하듯 양손을 감싼 장갑을 벗어 내려놓았다.

세척과 소독을 거듭해 희게 빛났던 장갑은 붉은색과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에 참관 의원들도 각자의 위생용 도구를 벗고는 허준에게 한 마디씩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남게 된 허준은 수술실을 나와 터덜터덜 발을 옮기다 가까운 의자에 몸을 기댔다.

“후우…….”

사람의 몸을 다루는 일에 미진함이나 실수는 용납될 수 없다. 허준은 무아지경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수술에 집중했고, 맥이 풀림과 동시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차라리 진맥하고 약을 처방해주는 편이 백배 낫지 외과는 환자가 아니라 의사를 잡아먹는다.

허준은 새삼 자신의 스승인 외과의들의 노고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외과의를 대대적으로 양성하시라니, 무엇을 또 준비하고 계신 것일까.’

원장이라는 비싸고도 바쁜 몸을 가진 허준이 친히 수술을 집도한 이유는 왕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과의를 대대적으로 양성하란다.

조선의 의학은 사람의 몸에 칼을 대는 일은 지양하는 편이다.

그래서 외과의의 수요는 크지 않다. 까라니 까고는 있으나 이 고생이 무위로 돌아갈까 걱정이 들었다.

‘아니, 무위로 돌아가길 바라야 하는가.’

왕은 이유 없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나아가 세상의 변화를 발 빠르게 인지하고 대응했다. 그런 그가 외과의를 양산하기를 바라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수의 외과의가 필요한 상황이 닥치기 때문이겠지.

‘큐슈 원정군만 해도 외과의가 절실하게 필요했지.’

전체적인 피해는 미미했으나 적의 잔당들의 산발적인 저항은 이따금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각지의 주둔지에서 돌아가며 전상자가 발생하니 의원들이 발 빠르게 돌아다녀도 제때 구하지 못해 죽는 사람이 생겨났다.

궁여지책으로 의원들은 소수로 나뉘어 흩어졌으나 의원의 수 자체가 부족하다는 맹점을 완전히 메우지는 못했다.

그러니 어쩌면.

왕은 큐슈 원정과 같은 일이 반복되리라 예상해 외과의의 양산을 주문하는지도 모른다. 즉, 왕은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원장님.”

상념을 이어가던 허준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의녀였다.

“무슨 일이지?”

“강의 시간인데 안 보이셔서.”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의학의 정수가 모여 한 권의 책으로 발행됐다.

동의보감이다.

과거에는 의원들이 자신을 도울 제자를 하나둘 두어 가르쳤다. 그러니 의원의 수도 적고 가르침이 중구난방이었다.

이제는 다르다.

동의보감에 각 분야의 전문가인 금천병원 의원들과 우수한 교육 시설을 갖춘 대학의 합작이 더해지니 의원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허준은 동의보감의 저자로서 교육 감독의 적임자였다.

“가야겠군.”

끙, 하는 소리와 함께 허준이 어렵사리 일어나자 의녀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자네가 무어 죄송할 게 있나. 더 늦지 않게 찾아주어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허준의 대답에 의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바쁜 일정으로 지친 원장을 귀찮게 해드린 건 아닐까, 하고 걱정하던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원장은 내색도 않고 오히려 자신의 걱정에 위로를 해주었다.

그가 지은 책 이름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이지만, 조선의 의원들(東醫)에게 보배와 거울(寶鑑)이 되어주는 것은 책만이 아니었다.

* * *

평양.

조선의 수도인 한성이 멀지 않은 곳에서 원접사에 제수된 류성룡과 평안감사 권극례가 중국 사신 진구(陳矩)를 맞고 있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진 대인.”

권극례는 인사와 함께 절을 올렸다. 윗사람을 대하는 지극한 예법이었다.

류성룡은 전부터 진구와 동행했으므로 인사를 올리는 대신 권극례를 소개했다.

“이 자는 국왕 전하를 대행해 평안도를 다스리는 관찰사로, 안동 권가에 성명은 극례라 합니다.”

“뵙게 되어 반갑소이다. 권 공.”

진구는 가볍게 공수를 올려 인사에 답했다.

펼쳐진 주안상을 마주하고도 담담하기 짝이 없는 어조였다. 권극례는 이전 고을에서 무슨 실수라도 있었나, 하고 류성룡에게 눈빛을 보냈다.

류성룡은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진구는 입국 때부터 호의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대국의 사신이 귀한 발걸음을 하시겠다는데 당장 모시진 못할망정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왜 이리 오래 걸렸냐, 무슨 수작을 부렸냐 등. 지랄쟁이가 따로 없었다.

지금은 지나온 고을마다 융숭한 접대를 받아 그나마 누그러진 축이었다.

그가 말했다.

“안동 권가라면 국왕의 외척인데 덕을 조금 보셨겠군.”

보아하니 대단한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집안이 좋아 감사질이나마 하는 게 아니냐는 소리였다.

권극례는 미혹되지 않는다는 불혹을 지나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도 넘어섰으나 대뜸 들어오는 도발에 속에서 불길이 피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입을 열었다간 쓴소리부터 나올 것 같아 겨우 침묵하고 있으니 류성룡이 대신 나섰다.

“가문이나 관직이 어떻건 조선에서 관리를 지내는 사람은 전부 전하께 크고 작은 빚을 다 진 신세지요.”

최대한 머리를 굴려서 나온 답이었다.

권극례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서 ‘권 감사는 부원군과는 촌수가 먼 사람입니다’ 하고 모함을 부정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가 틀린 말 했다고 핀잔주는 거냐고 지랄할 게 분명했다.

차라리,

“흐음.”

지금처럼 진구가 진부한 대답에 실망하는 편이 나았다.

무슨 대답을 내놓더라도 만족시킬 수 없을 테니까.

아예 권극례가 사신의 말이 맞다며 수모를 자처하지 않는 한은 말이다. 남의 비위를 맞춘다고 같은 편을 병신 만들 수는 없다.

류성룡은 이쯤에서 권극례가 만족하기를 바라며 그를 향해 고개를 작게 숙였다.

권극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썩어가려는 낯빛을 거두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진 대인께서 해주신 날카로운 말씀 덕에, 소인이 그동안 주상 전하의 은혜에만 의지하지는 않았나 반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깨우쳤다면 다행이오.”

“감사의 인사로 술 한 잔 올리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오는 정성은 마다하지 않는 게 도리지.”

“대인께서는 배포도 남다르시군요.”

권극례는 감사의 자리에서는 느낄 일이 없어야 할 사회인의 비애를 느끼며 술병을 기울였다.

진구는 권극례가 술을 바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자신은 술을 받았으나 권극례의 술잔은 채워주지 않았다.

그는 단숨에 잔을 기울였고 권극례는 다시 채워주었다.

그러자 진구가 말했다.

“내가 평양은 한성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조금은 다를 것으로 알고 묻는데, 혹시 감사는 장 태감의 행방에 대해 들은 바가 없소?”

“송구스러운 대답이지만…….”

“송구스러운 줄은 아니 다행이오. 남은 말은 마저 안 들어도 뻔하군.”

진구는 손을 아예 잔에서 뗀 채 팔짱을 꼈다. 노골적인 불만 표출에 류성룡과 권극례는 목구멍을 내려가는 침이 따갑게 느껴졌다.

전임 사신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것을 알아내는 게 진구의 임무였다. 자신이 조선에 파견된 이유가 그 때문이다.

이따금 조선의 근황을 파악하고자 보내진 사신들은 딱히 아쉬울 게 없다. 조선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돌아가는 길에는 뇌물도 한아름 끌어안고 돌아가면 그만이다.

조선 사신행을 앞다투어 자원하고 경쟁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유람이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진구의 사신행은 유람이 아니었다. 돌아가서 그럴듯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면 곤란하다.

차라리 조선이 고깝게 굴면 돌아가서 조선이 배후에 있는 게 분명하다고 해버리면 그만이겠거늘, 놈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아는지 어떻게든 비위를 맞춰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마치 저들도 추호도 모르는 일임을 알아달라는 것처럼.

진구는 그게 불만이었다.

“대국의 사신이 수행원들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그대 나라의 고관인 판서는 물론 감사마저 추호도 아는 바가 없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진정 할 말이 하나도 없단 말이오?”

“어떻게 대인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의정 대신들조차 사신의 행방을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만일 저희가 수상한 일을 저질렀다면, 어찌 영의정이 직접 나서서 이실직고했겠습니까?”

“……하아.”

진구는 묵은 한숨을 토해내고는 따졌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본국으로 돌아가 폐하께 한 마디라도 할 수 있어야지 않겠소?”

“예, 압니다. 알지요. 하지만 저희들은 진정으로 사신의 행방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대국의 조정에서 그런 변명이 통할 것 같소이까?”

“구차한 변명으로 들려도 별수 없음을 압니다. 하지만 저희의 절실한 마음을 알아주십시오. 오해로 대국의 진노를 사게 된다면 더없이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시치미 떼고 뻔뻔하게 지껄이는 말인지 진심인지 내가 어떻게 알겠소?”

“아조가 오해를 벗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따르겠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

그런 말을 입에 담는 사람 중에 진정으로 무슨 일이라도 다 해내려는 자는 없지만, 적당히 부담스러운 정도의 조건은 강요할 수 있는 명분이 된다.

명으로 돌아가 한 마디도 못하는 일은 면하겠군.

진구는 감정을 거두며 말했다.

“조선의 대신이면서 그런 말을 아무런 각오 없이 입에 올리지는 않았기를 바라오.”

“저희들은 대국의 일이라면 항상 진심입니다.”

“좋소. 내 추궁은 이쯤 하리다. 하지만 도성에서는 사라진 사신단의 행방에 대해서 몇 마디라도 해야 할 거요.”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노력이 곧 결과가 되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사신단의 행방은 진정으로 미궁인 모양이었다.

더 따지지 않겠다 막 말한 참인데 말을 뒤집을 수도 없어, 진구는 술잔만 기울였다.

부디 조선의 왕은 이 인간들보단 아는 게 많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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