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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61화 (261/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61화

91. 보전하는 자 (2)

“전날 새벽, 의주 목사가 치계를 올려 사신의 내방을 알렸다. 영의정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사신의 일에 사활을 건 노수신이니까.

내가 어쩌면 최후의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사신의 내방을 망치지 않기를 원하겠지.

일국의 왕이 처신에 실패해 남을 것 없는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거다.

명과의 충돌을 필연으로 보는 나에게는 괜한 고생이었다.

노수신의 생각처럼 전쟁은 사람이 일으키기도 하지만, 나는 전쟁이 상황과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니까.

조선의 역사 중후반,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는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광해군의 명과 청 사이의 줄타기 노선을 거부하고 친명 척화론을 펼쳤다.

몇몇 사람은 인조가 내건 기치가 청의 침공을 불러왔다고 주장했다.

‘이쪽이 생각하기엔 아니지.’

당시 청은 산해관이라는 고비 앞에서 좌절한 상태였으며 연이은 전쟁에 가뭄이 겹쳐 식량 가격이 폭등했다.

정치, 경제적 위기에서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군주가 된 홍타이지는 둘 중에 하나라도 해결할 결정적인 활로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대상은 오직 조선밖에 없었다.

광해군이 아무리 실리적인 노선을 취했더라도 청의 문제까지 떠안을 수는 없었을 터다.

저항도 없이 순순히 군신 관계나 식량 공급 등 일방적인 요구를 받아준다면 외란 대신 내란이 생길 테니까.

‘내란으로 병력을 소모하고, 강경한 척화론자들을 기용해 홍타이지에게 전쟁을 매력적인 선택지로 만들어준 인조가 병신이 아니란 건 아니지만.’

전쟁의 이유가 꼭 인간만은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노수신을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구구절절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절실했고 그것만으로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입장이 다른 건 인정해야 할 일이고, 나라를 위해 오래 일한 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결과가 어떻건 후회의 여지를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나 노수신에게나.

마지막에 이르러서 미련이 없어야 서로 힘을 합치지 않겠나.

“망극하옵나이다.”

“내가 어찌 해주었으면 좋겠는가?”

“과함이 있을지라도 규례대로 사신을 맞이하시옵소서.”

규례대로라 함은 사신이 지나치는 고을마다 연회를 열어 환대하며, 왕 역시 모화관 앞 영은문(迎恩門)으로 나아가 맞음을 뜻한다.

과함을 전제로 드는 건 내가 자존심이 강하다는 걸 배려해서인가.

노수신도 고생이 많다.

“내가 경에게 일임하기로 하였으니 다른 말이 나올 수 있겠는가. 알겠다.”

평소답지 않게 순순히 따라주어서일까.

노수신은 안도 섞인 얼굴로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에게는 사신보다 내가 더 큰 변수였다. 일전에 졌다고는 시인했으나 협조를 공인하지는 않았으니까. 내가 복심을 품지는 않았나 내심 불안했겠지.

말은 공허한 법이니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못하겠으나 부담은 많이 덜었을 거다.

이번에는 내가 어떠한 공작도 없이 관망만 하리라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군. 물론 입밖으로 낼 말은 아니었다.

그랬다간 의심만 살 테니까. 붉은색이 이제는 붉지 않겠다고 공언하는 꼴이다.

“다들 사신의 일로 바쁠 터이니 회의는 이만 파하겠다. 각자 돌아가서 소임을 다하라.”

“예.”

신하들이 예를 표하고 나는 어좌에서 내려왔다. 평소보다 일찍 정전을 나와서인지, 동행하는 궁인들은 풀어져 있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겁하기는. 금일은 시간이 많으니 간만에 낮잠이나 한 판 때려야겠다.”

기절이나 쪽잠을 제외한다면 낮이 자는 일은 족히 몇 년간 역사가 없었던 호사였다.

조선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인 사신의 방문은 영의정 이하 신하들이 전담하기로 했으니, 여유 좀 부려도 되겠지.

* * *

수평선에 녹색 섬들이 간간히 박힌 연해에서 이질적인 선단 둘이 마주했다.

일대를 순찰하는 조선의 수군과 모리 가문의 수군이다. 간만에 순시를 겸해서 선단에 동승한 이순신은 심상찮은 상황에 직접 뱃전으로 나왔다.

“수사 영감.”

갑사 하나가 우려를 표했다.

수군절도사가 적이 빤히 보이는 자리에 직접 거동했다간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이순신은 개의치 않았다. 하루 이틀 전장을 겪은 몸이 아니었으니까. 자만이나 방심은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는 직접 나서는 것임을 알 뿐이다.

이순신은 갑판 아래 옹기종기 모여 위로 쳐다보는 왜인들에게 말했다.

“물러나지 않고 무슨 일들이냐.”

왜인 중 하나가 어설픈 조선어로 말했다.

“모리 가문의 영지민 일부가 배를 타고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주인을 배신했으니, 도로 잡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근자에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과거 구주의 열도인들은 입을 줄이기 위해 아이를 제 손으로 죽이는 야만적인 풍습이 있었다.

어떤 부모가 제 자식을 죽이고 싶어 할까? 저들이라고 야만적이고 싶어서 야만적이지는 않으리라.

과연 구주에 조선의 지배가 시행되며 세율이 절반으로 줄어들자 아이를 죽이는 풍습은 없어졌다.

그리고 제 아이를 죽이고 싶지 않은 열도인들은 구주 외에도 많았다. 특히나 구주에서 가까운 모리 가문의 영지민들은 수시로 배를 타고 넘어왔다.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모리 가문의 수군은 해역을 순찰했고 지금처럼 도망자들을 쫓다 조선 수군과 대치하는 일이 흔했다.

“그대 영주가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일어난 일이거늘, 어찌 군사로써 아조의 해역을 넘보느냐.”

이순신이 엄하게 명하자 조선어를 하던 열도인이 동료들과 말을 나눴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수군에 투신한 열도인도 많겠다, 이순신은 왜어를 배웠다. 딴에는 저들만의 언어로 말을 나누었으나 빤히 들리는 대화는 시답잖은 것이었다.

“이 수사는 도와줄 의향이 없다 합니다.”

“무어라? 우리의 사정을 간청해서 협조를 받아낼 순 없겠느냐!”

“강단을 보아하니 순순히 도와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입니다.”

“제기랄. 정녕 방도가 없단 말이냐?”

“하필이면 상대가 이 수사라서.”

이순신의 강직함은 열도에도 널리 알려졌다.

시작은 나가사키 앞바다에서 시마즈 수군을 궤멸한 일이었다. 명성을 얻은 이순신은 전공만 아니라 성격과 행실마저 일대에 널리 알려졌다.

타협하지 않는다.

굴복하지 않는다.

엄한 군율과 분명한 신상필벌은 그가 이끄는 수군을 무적으로 만들었고, 그런 절도사를 따르는 수하들도 깐깐하기로 유명했다.

뱃전의 무사가 왜구를 추궁하자 왜구가 반 죽을 상으로 청했다.

“제발…… 수사 공께서 도망간 영지민 몇 명이라도 돌려주지 않으시면 졸자들은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그대 주인이 죽이기라도 한단 말이냐.”

“예에. 지금은 바로 뒤의 무사에게 죽을 판입니다.”

왜구가 뒤편으로 살살 곁눈질했다.

이순신은 쓰게 숨을 토했다. 저들은 한목숨을 구하고자 인정에 호소했으나, 영지민들도 한목숨 살고자 바다를 건너기는 매한가지다.

모리의 영주는 백성만 아니라 군사에게도 모질군.

백성들이 수탈을 피하고자 쪽배에 의지해 해협을 건너니, 병사들을 보내며 데려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한다.

불가한 일에 목숨을 걸게 한다고 무작정 성사되기라도 한단 말이냐. 이순신은 코로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그대들이 영지민들을 쫓아가게 할 수는 없으나, 빈손으로 돌아가 죽임 당할 것이 두렵다면 수영에서 받아줄 수는 있다.”

관대한 제안에 왜구의 눈빛이 변했다.

사면초가에서 활로가 생겼으니 기쁘겠지. 그는 다시 저들만의 언어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눴다.

“영지민들을 돌려줄 수는 없으나 저들에게 투신한다면 받아줄 수는 있다 합니다.”

무사는 입술을 말았다. 마주한 조선 수군은 무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세키부네는 어선이나 다름없고 판옥선은 정면의 이순신을 보는 데만 고개를 들어야 할 정도로 해상의 요새였다.

시마즈가 실은 입만 산 약졸이고 이순신은 그렇게까지 맹장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세간의 과소평가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세키부네와 판옥선 사이의 간극이 좁혀지는 건 아니었다.

“사실인가? 혹시 우리를 조선 수군에 팔아먹어 공을 세우려는 수작은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으음!”

무사는 입술을 말았다. 이대로 돌아가면 극형을 면치 못할 터.

단순히 엄중한 경고라고 생각하고서 빈손으로 돌아온 무사와 족경들의 목이 떨어지는 광경이 아직도 눈앞에 선선했다.

정녕 조선에 투신하는 방법뿐인가?

자신의 목숨이 걸리자 자꾸만 생각이 깊어졌다. 모리는 큐슈의 조선과 혼슈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이에 낀 형국이다.

아무리 120만 석고를 가진 대영주라 할지라도 앞뒤로 등쌀에 실려서야 미래가 밝지 못하다.

무사에게 목숨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무재를 뽐내고 공을 인정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일터다. 그걸 가지지 못해 촌락을 떠돌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낭인들이 무수히 많다.

곱게 눈을 감아서가 아니다. 비싼 무구를 걸치고도 동행하거나 지켜줄 사람 없이 단신으로 돌아다니다 사냥당해서다.

무사가 입을 열었다.

“전해라. 재고해 보겠다고.”

“그럼…… 영지민은 어떻게.”

“멍청한 놈.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일단 전해라.”

“예.”

왜구가 조선어로 무사의 대답을 전하자, 이순신은 볼일 끝났으면 가라는 듯 발길을 돌려 사라졌다.

무사 역시 뱃전에서 물러나 명했다.

“이대로 밤까지 버티다 돌아간다.”

“밤까지 버티다 잠입하는 것도 아니고 돌아간다니요? 그랬다간 진짜 배신자로 낙인찍힐 겁니다…….”

왜구가 떨며 말하자 무사가 답했다.

“처자식들은 모두 버리고 제 한 목숨만 살려 도망칠 셈이냐? 한심한 놈들.”

무사의 말에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었던 왜구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곧장 조선 수군에 합류해 가족과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이별하는 것, 빈손으로 돌아가 억울한 죽음을 맞이해 가족과 이별하는 것.

따지자면 전자로 마음이 기울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지 만족스러운 선택은 되지 못한다. 뒤에 남아 배신자의 가족으로 낙인찍힌 채 살아갈 가족이 걱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 차에 무사의 제안은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밤이 되려면 한참 남았고 다시 올 때 고생할 테니 미리 잠이나 자둬라. 한 놈씩은 돌아가며 주변에 수군이 없나 살펴보고.”

무사는 그렇게 말하며 뒤통수에 깍지를 대고 드러누웠다. 그가 말한 수군이란 당연히 조선 수군이 아니었다.

* * *

원정이 끝나고 삼도수군통제사 직위가 해체된 지금, 이순신은 구주좌수영 수군절도사를 지내고 있다.

구주좌수영의 무대는 이름대로 큐슈와 혼슈 사이의 해협이다.

언제 왜구들이 좁은 바다를 건너와 침공할지 모르니 구주좌수영은 본토의 어떤 수영보다 책임이 막중했다.

‘그러니 전하께서 나를 구주좌수사에 제수하신 것은 크나큰 영광이지만.’

임지를 고를 수 있었다면 구주우수사에 지원했을 거다.

세상이 드넓다는 것이야 이제는 새삼스러운 소식도 아니었으나 머리로 아는 것과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하는 것은 달랐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지 않는다.

구주우수영은 드넓은 세상을 마주하고 있다. 서양인들은 그들 족속만큼이나 특이한 범선을 타고 오갔으며 종종 배에 생소한 인종을 태우기도 했다.

언제는 키가 크고 피부가 새카만 사람을 보았는데 밤에 나타나면 귀신도 몰라보지 않을까, 싶었다.

그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아프리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곳은 어떤 곳인가. 드넓은 세상을 마주하고서 좁은 해역에만 운신하기란 어지간히 좀이 쑤시는 일이었다.

“세상이 평화로워지면 관직을 내려놓고 대양을 향해 떠나볼까.”

듣는 사람도 없거늘 저답지 않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이순신이었다. 마치 자신에게 그런 결의를 새기기라도 하듯.

이순신의 결의와 함께 상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밖에서 사내가 말했다.

“수사 영감.”

“들어오게.”

미닫이문이 열리며 얼굴이 까무잡잡하게 탄 사내가 나타났다. 햇볕과 해풍에 다져진 그는 원정대에 자원하기 전만 해도 흰 피부에 퉁퉁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팔자 좋은 그때로 돌아가긴 힘들겠지.

이순신도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북방에서 일할 때만 해도 살결이 흰 편이었는데 열도에 온 이후 많이도 탔다.

짧게 감상을 끝낸 이순신은 수하를 향해 말했다.

“만호는 왜 선단과 마주한 곳의 위치를 알겠지?”

“예.”

“왜구 두령이 나의 제안을 재고해 보겠다 하였는데, 이는 다시 나를 만나겠다는 뜻이다. 아마 새벽에 야음을 틈타 저들의 굴혈에서 빠져나와 조심스럽게 아조의 해역으로 숨어들 터이니 자네가 미리 가 있다가 그들을 인도해 오게.”

“알겠사옵니다.”

“그러니 지금은 미리 쉬어둬. 배를 끌 수군들도 같이 쉬게 하고.”

“망극하옵니다.”

만호는 군례를 절도 있게 올리고 물러났고 일감을 하나 처리한 이순신은 등받이에 기대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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